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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에 해당되는 글 64건

  1. 2018.01.12 들리지 않는 눈물
  2. 2018.01.05 엄마는 24시간
  3. 2017.12.29 깊은 구멍
  4. 2017.12.22 세 얼굴 사이에
  5. 2017.12.15 그들만의 영광과 굴욕
  6. 2017.12.01 둘을 위한 기념사진
  7. 2017.11.20 웃는 남자
  8. 2017.11.10 의미의 시차
  9. 2017.11.03 시각과 사각
  10. 2017.10.27 어두운 섬광
  11. 2017.10.20 핀치투줌
  12. 2017.10.13 현기증
  13. 2017.09.29 십년 동안
  14. 2017.09.22 낙차와 궤적
  15. 2017.09.15 토마토와 손가락
  16. 2017.09.08 얇지만 깊은
  17. 2017.09.01 짓궂은 운명
  18. 2017.08.25 키스의 뒷면
  19. 2017.08.21 마음의 준비
  20. 2017.08.11 85번의 절망

세상에 순한 아이는 없다.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예민함을 지녔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예민함을 표출한다. 이 아이는 소리에 예민해 소리를 지르고, 저 아이는 잠자리에 예민해 잠투정하며, 또 어떤 아이는 음식에 예민해 음식을 뱉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 힘주어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는 순하다고, 착하다고.

 

그래, 눈물은 원래 들리지 않는 법이다. ⓒ이옥토

 

그러나 각자 타고난 예민함은 달큰한 말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나이를 먹고도 마냥 아이처럼 유난스럽게 예민함을 티낼 수 없기에 스스로 자신을 억누르는 요령이 생길 뿐이다. 소리 없이 울거나 억누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내면에 잔존할 것이다.

 

젊은 작업자 이옥토의 사진을 보면서 그런 종류의 예민함을 헤아려본다. 사진 속에 자주 등장하는 미약한 빛과 유약한 형체들 그리고 연약한 색은 극도로 예민하게 바라볼 때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그런 예민함으로만 감지되는 또 다른 세상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귓바퀴에 고인 들리지 않는 눈물처럼. 그런 세상을 예민한 눈으로 바라보는 건, 예민한 만큼 상처를 얻은 자기 자신과 전력으로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예민함도, 그 상처도 모두 결국 자기 자신이니까.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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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한 손에는 별금당이라고 적힌 장바구니를, 허리에는 포대기를 한 여인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예닐곱 살 아이가 영화 <끝없는 사랑>의 포스터 속 키스 장면에 정신이 팔려 있다. 오른쪽에 버스 정류장 표지판인 것 같은 쇠기둥이 보인다.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으로 짐작되는 여인의 얼굴에는 오늘의 고단한 외출이 그대로 묻어 있다.

 

엄마는 24시간, 경남 마산, 1983년 ⓒ권태균

 

어디 오늘뿐이었을까. 어제도 내일도 두 아이를 챙기며 생활을 꾸려야 하는 엄마의 무게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함석판에 붙은 영화 포스터 속 여인의 웃음은 엄마의 검은 얼굴을 더욱 수척하게 만든다. 그 절묘한 대비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사진가(고 권태균)는 놓치지 않고 화면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결코 영화 제목처럼 ‘나인 투 파이브’할 수 없는, 끝내 퇴근이 없었던 여인의 삶을 사진 제목 ‘엄마는 24시간’으로 간명하게 표현했다.

 

그럼, 30여 년이 지난 요즘 엄마의 삶은 좀 나아졌을까. 노키즈존이 어른 전용 공간을 위한 대책이기보다 이른바 ‘맘충이 방치한 아이들’에 대한 비난으로 작용할 때, 그 안에 아이의 행동거지에 대한 책임이 모두 엄마의 인격으로 연동될 때, 여전히 ‘엄마는 24시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식당에 들어서면 아내와 아이를 나란히 앉힌다. 아이의 밥은 엄마가 챙긴다고 몸에 밴 것이다. ‘엄마는 24시간’일 수밖에 없는 건, 아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연장전을 치르기 때문일 것이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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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사진 속의 장면을 파악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차근차근 보아도 잘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환과 향, 병풍이 있는 영안실은 왜 난장판이 됐을까. 도대체 무슨 연유로 벽에 구멍까지 뚫린 것일까.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의 영안실 벽에 뚫린 구멍, 1991년, 경향신문사

 

1991년 5월7일, 의문사를 당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영안실에 백골단이 침입했다. 그들은 물대포를 쏘아대며 시신 사수대를 폭행했고, 해머로 벽을 뚫어 시신을 탈취해 강제로 부검했다. 이러한 정보를 얻은 후에도 사진은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 담겼기 때문이다.

 

최근 아이돌 스타의 자살 그리고 제천 화재 참사를 둘러싼 몇몇 보도를 접하며, 구멍 뚫린 영안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아이돌 스타의 비극적 죽음을 다루는 기사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고 집요했다. 유서부터 자살 방법, 당일 행적 그리고 심리 상태와 친분 관계까지 모두 낱낱이 공개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공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죽은 이와 유가족을 위한 배려가 없다는 면에서 ‘클릭 장사’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한편 KTV 국민방송에서는 제천 화재 참사를 홈쇼핑 방송 형식으로 전달했다. 원래부터 ‘홈쇼핑’ 형식의 차용이 해당 방송의 설정이라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망자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만큼 미개한 일은 없다. 한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와 방식에는 여전히 깊은 구멍이 뚫려 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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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거실로 이어지는 자리에 엄마가 앉아 있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큰아들이 누워 있다. 엄마의 손은 아들의 가슴 위에 살포시 놓여 있고, 두 사람의 단단한 입매가 서로 닮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하는 엄마의 얼굴에도, 눈을 지그시 감은 아들의 얼굴에도 청량한 빛이 은은하게 감돈다.

 

 

찬란 - 유예에서 바라봄으로 ⓒ박현성

사진가 박현성의 ‘찬란’ 시리즈는 어머니와 형의 일상을 따라간다. 꽤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진을 면밀히 바라보면서 연출된 장면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중년의 엄마와 청년의 아들 사이에서 무릎베개가 왠지 흔치 않은 일인 것 같고, 두 얼굴을 감싸는 빛의 기울기가 우연이라 하기엔 절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업이 가족을 향한 기록이기에 앞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족 사이에 솟아난 공백을 더듬는 몸짓이기에 그렇다.

아버지를 잃은 엄마와 형 그리고 ‘나’는 카메라 주위에 모인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엄마와 형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만큼 작은아들 그리고 동생의 카메라 앞에 서는 일도 익숙해진다. 얼굴이 닮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또 아버지의 빈 그림자도 발견할 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망자는 떠나도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가족의 생 앞에 렌즈를 밀어 넣은 작가는 미약하지만 찬란한 빛을 보고야 만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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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14일, 보안사령부에서 군인들이 카메라 앞에 도열했다. 12·12 쿠데타의 주역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촬영 이틀 전 정권을 찬탈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그들은 자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만의 영광은 사진으로 기념됐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안되기에 뒷줄 맨 우측의 백운택 준장은 따로 편집해 붙이기까지 했다. 

 

1979년 12월14일, 신군부의 기념촬영(위)/1996년 12월16일, 12·12 및 5·18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아래).

 

1996년 12월16일, 그들은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다시 카메라 앞에 도열했다. 흑백사진에서 앞줄 중앙에 보였던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등은 컬러사진에서도 역시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했다. 군복 대신 수감복을 입고, 별 대신 번호표를 단 주역들의 모습은 늙고 지쳐 보인다. 그들만의 굴욕이 찍히는 순간, 그들만의 영광 때문에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는 걸 반성이라도 했을까.

 

12·12 및 5·18 사건 1심 선거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됐던 전두환은 1997년 12월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들만의 굴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역들이 목숨을 걸었던 쿠데타의 성공은 또 한번 그들을 살려준 것이다. 그들만의 영광을 묵인한 슬픈 현실은 얼마나 굴욕적인가. 14일과 16일 사이, 그들만의 또는 우리의 영광과 굴욕이 카메라 앞에 교차로 도열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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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한 장면.


젊은 남녀가 등장하는 통속적인 영화는 대개 떠들기 마련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디서 첫 키스를 했는지, 언제 사랑이 식기 시작했는지, 무엇 때문에 헤어졌는지 그 시작과 끝을 낱낱이 이야기하기 바쁘다. 그러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시게루와 듣지 못하는 다카코가 등장하기에 대사가 거의 없다. 게다가 감독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말하는 대신 곁에서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작정한 것 같다. 함께 서핑보드를 들고 가는 둘의 모습을, 시게루가 서핑하는 동안 해변에 남아 그의 옷을 개는 다카코를, 그녀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게루를 떨어져서 보여줄 뿐이다.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시점은, 이 세상에서 오직 둘만 아는 이야기를 대신 떠들 수 없다고, 타인의 삶과 사랑을 속속들이 헤집어 볼 수는 없다고 역설하는 건 아닐까.

 

그 흔하디흔한 섹스신 하나 없이, 끝날 때까지 손잡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 영화는 그동안 타인의 삶과 사랑에서 어디까지 듣고 보며 지냈는지 자문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게루는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서 사라지고, 다카코는 남자친구가 남긴 서핑보드에 둘의 기념사진을 붙여 바다로 흘려보낸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념사진은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할 순 없지만, 이 세상에서 오직 둘만 아는 이야기가 존재했단 걸 기억한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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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이한열 열사(왼쪽)와 어머니 배은심 여사, 1986년,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얘야, 사진 한 장 찍자”고 했을까, 아니면 “엄마, 사진 찍어요” 했을까?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가을 햇볕이 환해서, 노란 국화가 탐스러워서 카메라 앞에 섰을 것 같다. 사진 찍고 싶을 만큼 햇살이 좋았던, 국화가 예뻤던 그날은 두 사람의 소박한 모습으로 동결된다.

 

어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기념사진이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다. 저기 해맑게 웃는 청년이 바로 이한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한열 열사가 저리도 예쁘게 웃는 아이였단 말인가. 내가 사진으로 기억하는 이한열은 1987년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이종창에게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모습뿐이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처럼 어떤 사진이 누군가를 기억하는 대표 이미지가 될 때, 그 사진은 강력한 기억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망각의 도구가 된다. 하나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고, 다른 이미지들은 서서히 지워지거나 그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정작 확인할 것은 프레임 안에 보이는 기억뿐만 아니라 프레임 밖에 숨겨진 망각의 빈자리이다.

 

문득,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무척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생때같은 아이를 하루아침에 잃는 것도 그렇지만, 저리도 웃는 게 예쁜 아이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일은 얼마나 억울할까.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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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어느 작가는 자신의 전시회 때 도슨트 프로그램에 몰래 참여한다.

관객 사이에서 자기 작품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니 왠지 짓궂다. 도슨트 입장에서 원작자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건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Sub/Ob-Ject, WeⅠ, 2017 ⓒ기슬기

 

반면, 발화자(주체)가 아닌 청자(객체)의 위치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건 작가에게 유의미하다. 작품의 의미가 청자에게 어떻게 (오)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슬기의 ‘Sub/Ob-Ject’ 시리즈를 보며 이미지를 둘러싼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교란하거나 역전시킨다는 측면에서 앞서 말한 작가의 행위가 떠오른다.

 

기슬기는 외국인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얻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이미지를 제작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차이, 발화와 청취의 시차, 기록과 기억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러니 그 이미지는 결국, 발화자에게 비롯된 이야기를 통역자와 청자가 번역하고 왜곡시킨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전시장에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철장을 설치하고, 이 안에서 카메라로 관객을 관찰하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이미지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카메라의 대상이라는 걸 인지할 때, 관객은 철장의 안과 밖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럽게 된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자신은 시선의 주인인지, 대상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 내 눈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본 것을 믿어도 될까.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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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군데군데 찌그러졌다. 드문드문 빨간 도색도 벗겨졌다. 각질처럼 허옇게 일어난 타이어 표면은 심하게 마모됐다. 둥근 휠 가운데 호랑이 엠블럼은 작지만 눈에 박힌다. 범퍼 밑에는 물먹은 주황빛이 반짝인다.

 

이렇게 열심히 사진을 들여다봐도 왜 찍었는지,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Red car by the river fig 9 ⓒ목정욱

이처럼 목정욱의 ‘Car’ 연작(2006~2017)은 어떠한 이야기도 담지 않은 파편적인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뤄진다. 산산조각 난 앞 유리창, 먼지와 때가 잔뜩 낀 헤드라이트, 절연 테이프로 칭칭 감은 사이드 미러 등이 담긴 사진을 보며 알 수 있는 건, 피사체가 자동차라는 것뿐이다. 작가의 프레이밍은 형태와 색의 윤곽을 선명하게 묘사하지만, 어떤 정보를 제공하거나 설명하지는 않는다. 전체를 가늠할 수 없고, 특정한 형태와 색을 가득 채운 클로즈업은 묘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촬영자인 작가 본인조차도 왜 찍었는지 똑 떨어지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동차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추려 전시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애써 말로 할수록 궁색해진다. 그건 어쩌면 언어의 논리가 아닌 망막의 논리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은 아닐까. 말하자면 어떤 대상을 찍는 이유를 먼저 정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선 눈을 따라 움직이고, 그 결과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망막에 왜 맺히게 됐는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그건 자동차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과 자동차밖에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사각을 동시에 역추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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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새벽, 칠흑처럼 먹먹한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강하게 터진다. 창백한 섬광을 마주한 병사의 헬멧과 얼굴 그리고 요대의 버클이 부러질 듯 딱딱하게 빛난다. 그 옆에는 90㎜ 주포를 장착한 M48A2C형 패튼 탱크가 어둠의 물결에서 차갑고 육중한 몸체를 뒤척인다. 프레임 끝과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탱크와 병사가 그려낸 평행선이 기묘한 긴장감을 불러온다. 그 안에서 어깨를 맞댄 어둠과 밝음의 선명한 대비가 눅눅한 불길함을 자아낸다.

 

1979년 10월27일 오전 4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중앙청에 배치된 계엄군과 탱크(경향신문사).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1979년 10월27일 새벽에 찍힌 장면이다. 오전 4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의 계엄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몰고 중앙청을 점거했다. 뚜렷하게 보이는 탱크와 그 뒤로 어렴풋한 중앙청 건물 그리고 승용차들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유신체제를 통해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획책했던 시절에 그가 지워진 세상은 그야말로 비현실과 다름없다. 또한 일국의 대통령이 술자리의 여가수와 여대생 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사건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모두 알다시피 전날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15년 10개월 16일간 청와대에 거주하면서 죽어서야 청와대를 떠나는 그의 운명은,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였던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그의 최후는 꽤나 을씨년스럽다. 그렇게 기나긴 1인 독재정권과 유신체제는 드디어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을씨년스러운 시대의 비극은 광주를 거쳐 한동안 이어지고 말았다. 그 슬픔은 사진 속의 음산한 어둠처럼, 스산한 섬광처럼 우리 곁을 아직도 맴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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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관음증을 소재로 다룬 영화 <이창>(1954)의 주인공 제프리.


스크롤 스크롤, 클릭 클릭 그리고 핀치투줌(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는 것). 눈과 연동된 손가락은 스마트폰 위에서 분주하지만 유연하게 움직인다. 때로 손가락이 눈보다 더 빨리 반응하기도 한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수많은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어떤 사진에서 나도 모르게 두 손가락을 벌린다. 그리고 ‘아차!’ 아찔함을 느낀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얼굴 같지 않은 얼굴, 몸뚱이 같지 않은 몸뚱이가 드러났다. 그건 사람이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시커먼 형체처럼 보였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시신이었다. 그 사진은 세월호 청문회 때 참고인으로 출석한 희생자 정동수 학생의 아버지 정성욱씨가 공개한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집요하게 헤집으며, 나는 과연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도대체 무엇을 더 봐야 했던 걸까. “더, 더, 더”를 외쳐대는 눈과 손가락은 기어코 어디까지 봐야만 그 탐욕스러운 놀림을 멈출 것인가?

 

며칠 전, 미국프로농구(NBA) 개막전에서 보스턴 셀틱스 소속의 고든 헤이워드가 왼쪽 발목이 완전히 뒤로 꺾이는 끔찍한 부상을 당했다. 당시 코트 위에 있던 양팀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헤이워드의 고통을 구경하지 않았다. 어떤 선수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 광경을 보며 두 손가락으로 고통을 벌려 구경한 기억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다리가 부러져 휠체어를 탄 채 망원 렌즈로 이웃집을 훔쳐보던 영화 속 주인공이 떠올라 한없이 부끄러웠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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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기륭전자 옛 사옥 앞, 2010년 ⓒ조재무


어지러운 전깃줄에 걸린 현수막 구호가 더없이 어지럽다. 검은 실루엣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없어 어지럽다. 어지러운 구호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어지러운 사내는 송경동 시인이다.

 

포클레인 위에서 어지러운 구호를 외치던 시인은 땅으로 어지럽게 곤두박질친다. 그는 기륭전자 옛 사옥 앞에서 해고노동자의 단식농성장을 부수려 했던 포클레인을 막고 12일 동안 밤샘 농성을 했다. 2010년의 일이다. 그해 11월,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됐던 기륭의 노동자들은 1895일간의 복직투쟁 끝에 사측과 정규직 고용에 합의했다. 그에 따라 노동자 10명은 2013년 5월부터 출근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고, 같은 해 12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무실을 옮겼다. 야반도주나 다름없었고, 당연히 임금이 지불되지 않았다. 이후, 노동자 10명의 임금 2억여원을 체불한 혐의로 기소된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2005년부터 2017년까지 기륭의 해고노동자들은 고공농성 3회, 국회 점거투쟁 2회, 집단 단식 94일, 오체투지 등 그들의 표현대로 ‘죽는 것 빼고는 다해 본 투쟁’을 거쳐 왔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세월과 최 회장의 1년을 견주니 현기증이 난다. 사람이 사람답게 일할 수 없는 현실에 공모하는 세상은 뒤엉킨 전깃줄과 읽을 수 없는 구호, 알 수 없는 사내보다 더없이 어지럽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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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와 서리 15, 2011 ⓒ강홍구


흔적만 남은 중앙선 그리고 굵은 금이 간 아스팔트. 그 허름한 2차선 도로에는 사람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깃줄에 몸이 뚫린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피처럼 뚝뚝 떨군다.

 

강홍구의 개인전 <안개와 서리-10년>(원앤제이갤러리, 9월7~30일)에는 희미한 안개와 함께 사라진 살풍경이 적막하게 펼쳐진다. 10년 전부터 경기 고양시 오금동과 신원리 일대에서 찍은 재개발 풍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재개발 현실을 눈앞에 둔 작가가 그 풍경을 가장 현실적으로 담을 수 있는 카메라를 들고도 이미지를 비현실적으로 다룬 점이다. 색과 구도를 뒤틀고, 사진과 사진을 이어 붙이며,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한다. 그의 말처럼 ‘사진을 현실에서 최대한 멀리 떼어 놓는’ 셈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주목한 안개는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소설 <무진기행>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안개는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그렇게 현실에서 떼어 놓은 사진을 바라보며 작가는 스스로 묻는다. ‘십년 동안 나는 뭘 했나?’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애를 나아 키웠고, 이사를 다녔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처럼 현실에서 멀어진 사진을 바라보며 오히려 자신의 현실과 가까워지는 10년의 지난한 여정은 섬뜩하게 쓸쓸하다.

 

그러나 10년 동안 함께 안개와 서리를 맞았던 풍경은 사라졌지만, 자신은 견뎠다는 작가의 자각이 묘한 울림으로 남는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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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선을 진료하는 국립의료원 김 박사, 이름을 알 수 없는 간호사로 추정되는 인물, photograph, 50×62.5㎝, 2017


볼이 파일 정도로 여윈 남자가 침상에 누워 있다. 환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만큼 의사와 간호사의 경직된 포즈가 눈길을 끈다. 가운데를 가리지 않으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환자가 사진의 주인공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이 걸린 전시장에는 어떤 캡션도 없기에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김익현의 개인전 <Looming Shade>에는 ‘기념비’, ‘동굴’ 등 작가의 전작과 연결된 아카이브 사진을 재촬영한 작품들로 구성된다. 보통 아카이브 사진에 담긴 텍스트를 지시·암시하는 캡션이 명시되지만, 이 전시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물론 작업 노트에서 아카이브 사진의 단서를 찾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전시장의 구성은 의도적으로 사진과 정보의 링크를 깨뜨린다. 텍스트가 소거된 전시장은 정보 대신 시선의 위치와 동선에 집중한다는 인상을 준다.

 

전시장에 조성된 20㎝ 높이의 발판은 사진을 조망하는 일종의 트랙 같다. 작은 차이지만, 눈높이가 변하면서 바라보는 방식과 태도마저 달라진다. 트랙과 비트랙을 따라가는 몸은 멈추기보다 계속 움직이며, 고정되지 않고 낙차를 익히게 된다. 그리고 이와 연동된 시선은 트랙(원심력)과 비트랙(구심력) 사이에서 20㎝만큼 기울어진 자전 궤적을 그려낸다. 이는 그동안 액자 앞에 멈춰 고정된 시점에서 정보를 탐색하던 것과 무척 다르다. 이 전시장에선 결국, 사진을 바라보는 대신 ‘사진을 바라보는 나’를 인지한다. 그동안 무언가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눈의 궤적을 좇아보게 된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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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sible Vision, 2016-17 ⓒ한경은


한동안 토마토를 먹지 못했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토마토의 살을 베려던 부엌칼은 미끄러져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토마토보다 붉은 액체가 하얀 도마를 흥건히 적셨다. 신발 끈으로 동여매도 멈추지 않던 피는 기억에도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몸에 새겨진 고통보다 기억력이 강한 것은 드물다. 의식적으로 망각하려고 해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토마토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시리고 아렸다. 고백하자면 토마토가 무서웠다. K와 M이 서로의 벗은 몸을 촬영한 한경은의 ‘비가시적인 전망(Invisible Vision)’을 바라보면서 토마토와 아린 손가락이 떠올랐다. K와 M은 고통이 새겨진 몸을 서로 바라보며 아렸을까. 또 무서웠을까.

 

K와 M은 버디무비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행을 떠났다. 둘은 얘기하며 울고 웃다가 말하기를 멈추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아리고 무서운 기억을 마주하며 더욱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땀이 나고 숨이 차고 심장이 요동치는 몸을 통해 시린 기억을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서로의 몸을 통해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토마토를 똑바로 쳐다보려 노력하면서 뒤늦게 알게 된 건, 그 칼이 결국 내 손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행복한 기억보다 고통을 더 많이 지니고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 몸의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몸인 저주, 그 고통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일은 아린 손 맞은편에 칼을 쥔 손마저도 ‘나’라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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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과 팽창, <허니 앤 팁> 전시 전경(아카이브봄).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는 자신의 감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화가 난 교도소장 노튼은 손에 잡힌 돌멩이 하나를 벽에 던진다. 그 돌멩이는 여배우 리타 헤이워스가 나온 핀업걸 포스터를 향해 날아가다가, ‘툭’ 종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노튼 소장이 포스터를 걷어내자 앤디가 교도소 탈출을 위해 오랜 시간 팠던 구멍이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리타 헤이워스의 사진은 의미심장하다. 얇은 종이로 감춰진 어떤 구멍의 깊이감이 묘하고, 어두운 현실(감방)과 밝은 이상(탈출)의 간극에 사진 한 장만 존재하는 것이 흥미롭다. 모두를 속이기 위해 얇은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한 것이다. 얼마 전 ‘압축과 팽창’(안초롱과 김주원)의 사진전 <허니 앤 팁>을 보면서 영화 속의 장면이 떠올랐다.

 

전시장 2층에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거나 한 대상에 천착한 작품들이 있다. 주제나 형식 등 기존에 중요시되는 사진 문법을 따른 것이다. 반대로 3층에는 기존의 형식에서 이탈한 사진들이 있다. 다채롭게 출력되고, 설치된 사진들은 모두 이미지 라이브러리에서 구매한 것이다. 이 사진들이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벽과 바닥에 마감재처럼 덧씌워진 3층 전시장은 이케아 쇼룸을 연상시킨다. 어떤 집에 살든 당신에게 맞는 인테리어 팁을 제시하는 이케아처럼, <허니 앤 팁>은 그동안 전시장에선 경험할 수 없던 사진의 모양새를 제공한다. 이처럼 다양한 사진적 확장은 익숙했던 사진의 얇은 깊이감에 구멍을 낸다. 노튼 소장이 던진 돌처럼.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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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승무원들. NASA 아카이브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에는 은은한 자신감이 스며 있다. 부드러운 미소에는 단단한 자부심이 머문다. 7명 모두 완벽한 표정이 나올 때까지 공을 들여 수차례 촬영했을 것이다. 우주를 탐사하는 막중한 임무와 우주비행사라는 영광스러운 명예에 걸맞게 말이다. 곧 다가올 성공을 대비해 촬영됐을 이 사진이 훗날 비극적인 실패를 상징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2003년 2월3일, 사진 속의 그들을 태운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는 폭발해 산산조각이 된다. 이 사건은 최악의 참사로도 꼽힌다. 비행사들의 죽음이 예견됐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NASA의 발사책임자들은 컬럼비아호의 발사장면을 찍은 비디오를 관찰하다가 우주왕복선 방열판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구 대기권으로 재진입할 때 무사히 귀환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정작 당사자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비행책임자 존 하폴드는 말한다. “공기가 떨어질 때까지 비행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승무원들이 즐겁게 비행하다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죽는 것이 낫지 않겠어?”

 

도대체 뭐가 더 낫다는 걸까. 다만 성공에서 비극의 상징으로 곤두박질친 이 사진처럼 우리의 삶과 죽음도 순식간에 교차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증명사진이 영정이 되는 걸 상상하지 못하듯이 눈앞에 놓인 죽음을 몰랐던 비행사의 운명 앞에서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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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 시청 앞에서의 키스: 로베르 두아노>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파리 시청 앞 거리에서 젊은 남녀가 키스를 나눈다.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에서 절묘하게 포착된 순간은 파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전 세계에 수십만 장의 포스터와 엽서로 팔려나간 ‘시청 앞의 키스’는 모델을 구해 연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난을 산다.

 

최근 이 사진을 찍은 프랑스 사진가 로베르 두아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됐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며 그 비난은 온당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물론 이 사진의 감동은 상당 부분 ‘실제 연인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연출됐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실망과 배신감은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진이 촬영된 때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떠올리면 복잡한 심사가 된다. 1950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상흔이 완연한 시절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유태인 학살과 드레스덴 폭격 그리고 나치 부역자를 처단하기 위한 길거리에서의 조리돌림 등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확인시켜준다. 젊은 연인의 낭만적인 키스로 기억되기에는 석연치 않은 시절인 것이다. 그러니 이 사진에서 배신감을 느낄 부분은 ‘키스의 연출’이 아니라 키스로 가려진 현실이 아닐까?

 

“내가 볼 때 현실은 없다. 삶에서 내가 좋아하는 면만 보여줄 뿐.” 영화 속에서 두아노는 말한다. 연출 논란 이후에도 여전히 이 사진이 인기를 끄는 건, 두아노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진에서 ‘좋아하는 면만’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닐는지.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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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Series, 2015 ⓒ양동민


환자복을 입은 중년 여인의 몸 위에 사진들이 올려져 있다. 오른쪽 어깨 위의 사진에서 여인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린다. 가슴 위의 사진에선 딸과 함께 장난을 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산소 호스를 연결한 채 힘겹게 눈감은 여인의 얼굴에서 더 이상 사진 속의 눈웃음을 볼 수는 없다. 힘겨운 여인의 얼굴과 한때 즐거웠던 순간의 사진들 사이에 놓인 산소 호스는 가느다랗게 삶과 죽음의 간격을 잇는다.

 

사진가 양동민은 악성 뇌종양을 진단받은 엄마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려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들은 날에는 엄마의 몸에 사진을 올려놓고 편지를 읽었다고 한다. 병실에 종일 누워 있는 엄마가 행여 외로울까 봐 곁을 지키며 사진과 편지로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려는 요량이었다. 작가는 그로부터 2주를 더 버텨낸 어머니를 지켜보았고,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삶과 죽음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훔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이 아니었을까. 이제 사진은 너무 흔하디흔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담긴다는 점은 여전히 특별한 것이다. 사진이 귀했던 시절, 시골집 대청마루에는 결혼·출산·성장·졸업 등 가족의 대소사가 알뜰하게 모인 사진 액자를 걸곤 했다. 엄마의 몸에 모여 있는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시골집 대청마루의 사진 액자가 떠올랐다. 부디, 엄마의 명복을 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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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으로 겹친, 85명 열사의 영정들 #01, 2011 ⓒ홍진훤 강경대 강상철 고정자 권미경 김경숙 김기설 김동윤 김병구 김상진 김성애 김성윤 김수배 김순조 김영균 김용갑 김윤기 김의기 김종수 김종하 김진수 김철수 김태환 김학수 남태현 노수석 도예종 류재을 민병일 박래전 박봉규 박상윤 박성호 박승희 박일수 박종철 박태순 배달호 서도원 석광수 송광영 송석창 신건수 신연숙 심광보 안동근 양용찬 여정남 오원택 오한섭 원태조 유재관 윤창녕 이경환 이길상 이덕인 이병렬 이상남 이석구 이성도 이영일 이원기 이정순 이한열 이현중 임종호 장이기 장현구 전응재 정경식 정상국 정상순 정태수 조경천 조정식 천덕명 최대림 최동 최성묵 최윤범 최태욱 하재완 한상근 허세욱 홍덕표 황보영국


한 명씩 호명하며, 각자의 얼굴을 더듬기 위해 눈에 힘준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다. 85명의 열사를 한 장에 합쳤다는 사진가의 속내가, 또 영정이 될 줄 몰랐을 사진의 운명이 얄궂다.

 

2011년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은 한진중공업의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보다 8년 전 같은 크레인에 올랐던 김주익 노조위원장은 농성 129일째 되는 날, 스스로 목을 맸다.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의 죽음이 겹쳐질지 모른다는 절망이 김진숙과 연대하려는 ‘희망버스’의 연료가 되었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 숫자 ‘85’와 연관된 작품을 모으는 ‘85프로젝트’에서 사진가 홍진훤은 85명 열사의 영정으로 사진을 만들었다.

 

작가는 대학생 시절, 학회방에서 김주익의 추도사를 영상으로 보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 추도사를 읽은 김진숙이 김주익을 이어 85호 크레인에 올랐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용산에서 허공에 매달린 망루가 불타며 사람이 죽는 걸 목격했던 사진가가 바라본 85호 크레인은 아득한 높이의 절망은 아니었을까.

 

모니터 창에 85개의 죽음을, 그렇게 85번의 절망을 불어오는 클릭 소리를 상상하면 아득한 기분이 된다. 하지만 85개의 죽음이, 85번의 절망이 쌓인 이미지는 묘하게도 ‘살아달라’ 온몸으로 외친다. 이제, 아무도 그들처럼 죽지 말라고.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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