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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 지방이라는 말 앞에서는 괜히 목울대가 촉촉해진다. 이 표현 자체가 서울을 기준으로 한 분류일 터이므로 어쩔 수 없이 중앙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비운의 느낌을 풍기는 탓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 대도시보다는 낙후된 이곳은 주5일제 이후로 화려한 아웃도어 복장으로 치장한 도회지 사람들이 다녀가는 펜션이나 캠핑장의 주 무대라는 뜻으로도 통한다. 그 지방이 한때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힘을 쏟은 것이 캐릭터 사업이다. 금산에서는 인삼이, 안흥에서는 찐빵이, 단양에서는 온달과 평강 등이 지역을 대표하는 식이다. 자신들만의 특산물이나 전통을 전국에 널리 알려 더 이상 서울의 변방이 아님을 선언하기 위함이니 이 캐릭터가 가지는 역할은 꽤 묵직하다. 그렇다고 이 무게감이 물리적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닐 텐.. 더보기
웃음 축구 골대에 휘장처럼 커다란 천을 두른다. 2.5m 정도의 골대 높이를 넘길 수 있는 천은 그 자체로도 꽤 무겁고 크다. 한쪽 골대에는 검은색, 맞은편에는 흰색 천이 둘러진다. 천에는 구멍들이 여러 개 나있다. 이제 당신은 이 무대에 초대받은 손님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원하는 색깔의 천으로 가서 원하는 구멍에 손과 얼굴을 내밀면 된다. 그리고 웃는다. 다만 진심으로 웃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요구다. 도대체 나는 언제 어떤 이유로 웃었던가. 해는 중천에 떠서 스포트라이트처럼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마치 소설 의 뫼르소에게 쏟아지는 태양처럼. 원치 않아도 선택한 무대에 서면 눈부신 태양과 마주하게 되어 있다. 그 태양 아래에서 내 웃음의 기억 혹은 웃음이라는 행위 자체와 마주한다. 태양.. 더보기
밀양 부끄럽게도 그곳에 한번도 다녀오지 못했다. 다녀온 이들의 말과 사진을 통해 풍문처럼 듣고 보았을 뿐이다. 처음부터 가장 생경했던 건 풍문의 주인공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자식 다 키워 타지로 떠나보내고, 밭에서 나고 자란 것들만으로도 살림이 충분한 어르신들이 아쉬울 게 뭐가 있을까. 그저 사는 날까지 자식들 병수발이나 시키지 않게 건강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 말고는. 그렇게 더 바랄 게 없는 분들이 겨울철 아랫목을 마다하고, 봄날 파종도 미루고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뭔가를 반대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몸이 쑤시는 날조차도 습관처럼 그냥 아까워서 100W짜리 전기장판도 두어 번은 망설이다 켰을 이분들한테 765㎸짜리 송전탑을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까무러칠 일이다. 단순히 누군가의.. 더보기
두아노의 아이들 조례시간이라는데 선생님은 아직 본격적인 ‘잔소리’를 시작하지 않은 걸까.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녀석이 하나도 없는 이 교실은 그야말로 개성이 넘친다. 저기 맨 끝줄 명당자리를 차지한 놈은 익숙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그 앞줄로는 빠져서는 안되는 교실 풍경을 완성하듯 뒤를 향해 아예 몸을 젖힌 녀석도 있다. 물론 압권은 사진 속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소년이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미간까지 찌푸린 채 눈은 천장을 뚫을 기세다. 사진 찍는 이방인을 의식하고 있는 건, 그 대각선 뒤편으로 앉은 아이가 유일하다. 이 아이는 나중에라도 카메라를 든 아저씨가 로베르 두아노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는 외젠 아제, 카르티에 브레송, 윌리 호니스 등 파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기억하게 만든 사진가들의 계보에.. 더보기
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곳과 이 장면이 왠지 익숙하다. 사진 속 그는 길을 잃어버린 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누구인 것 같기도 하다. 정확하게 어딘지, 누구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은 답답하고 불안하면서도 음울하다. 들여다볼수록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궁금해서 자꾸만 기억을 더듬게 만드는 이 묘한 끌림은 마치 꿈속 같다. 수잔 번스타인(Susan Burnstine)은 사진으로 꿈의 세계를 묘사하는 사진가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카메라도 손수 제작한다. 잡동사니 플라스틱 상자에 중고 카메라 부속품을 고무로 연결한 이 수동 카메라는 너무 단순해,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무려 스물한 대의 카메라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렌즈의 초점은 잘 맞지 않.. 더보기
사물의 죽음 기계의 속살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 몸처럼 기계 속에도 전원이 타고 흐르는 혈관이 있고 오작동을 막아주는 뇌가 있고, 미세한 움직임을 위한 손발이 있겠으나 그 원리를 하나하나 따져 보는 이는 드물다. 스마트폰이 점점 똑똑해지기 위해 그 몸속에 어떤 장기를 달아야 하는지는 사실 관심 밖이다. 빠르고 쉽고 섹시하게 진화하면 그뿐. 기계는 이렇게 쓸모에 따라 유행처럼 찾아왔다가 진화된 경쟁자에게 밀려 고물로 취급 받기 일쑤다. 올해 갤러리 나우의 작가상을 받은 사진가 막스 데 에스테반은 이 기계의 운명에 주목한다. ‘명제1: 수명이 다한 사물들’이라는 제목처럼 기계는 그가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여러 명제 중 단연 첫 번째에 해당한다. 그에게 기계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시대에 소외된 생명체다. 그것.. 더보기
진달래 봄날이 가고 있다. 스러진 진달래 꽃잎처럼. 연하디 연한, 흔하디 흔한 이 꽃은 우리 정서의 밑바닥에서 꽃을 피운 지 오래다. 한때는 철이와 순이부터 빨치산까지 모두가 지천에 널린 이 꽃잎을 따먹었으며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경기장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부르며 뜨거운 마음을 터뜨렸다. 함경도가 고향인 시인 김규동은 그의 시에서 이 꽃을 사뿐히 즈려 밟기에는 차마 사치스러워 심장으로 들어가게 했다고까지 고백한다. 시 제목이 ‘육체로 들어간 꽃잎’인 까닭이다.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김규동의 이 시가 사진가 고정남의 ‘진달래’ 작업에도 영감을 던졌다. 그의 고향 전남 장흥에도 늘 진달래는 흐드러졌다. 무심하게 그리고 수수하게. 전혀 화려하지 않아서, 호기심과 의아함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가고 .. 더보기
달빛 아래에서 처음에는 달을 찍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막 소말리아에서 옆의 나라 지부티로 국경을 넘어온 이들은 지금 달빛보다 귀한 단말기 신호를 찾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동과 가장 가까이에 붙어있는 지부티는 인근에서 유럽이나 중동으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간 거점이다. 말이 이민이지, 바다의 폭이 최대한 좁은 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은 허락받지 않은 탈출을 감행한다는 뜻이다.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나선 불법이민자들에게는 단말기의 전파 또한 허공을 몇 번 헤맨 끝에서야 잡힐 만큼 가늘게 포착될 뿐이다. 고국 소말리아 국경 지대에서 보내오는 전파를 잡아야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과 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나마 가족들과 안부를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는 위태로운 .. 더보기
슈퍼맨의 꿈 소화기 통을 메고 하늘로 오르려는 이 남자 예사롭지 않다. 의자를 발사대 삼아 소화기 분말을 열심히 뿜어보지만 얼굴만이 하늘을 향할 뿐 비상할 기미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복장은 꼭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는 실험맨 같다. 우스꽝스러운 실험을 진지하게 펼치면서 결국 보는 이로 하여금 피식 웃게 만드는 상황도 방송과 비슷하지만, 배경 선정이며 구도에 정말 많은 공을 들인 나머지 진짜 웃어도 되는 건가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보자기를 두른 채 책상 위에서 뛰어내려봤자 슈퍼맨이 되기는커녕 엄마의 잔소리 위를 날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우리의 모험시대는 끝이 난다. 그렇게 철이 들었던 작가 류현민은 어느 날 소주잔을 얼굴에 붙이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서 일탈의 쾌감을 느꼈다. 결국 떨.. 더보기
죄인 작가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작업이 안된다며 친구 만나 푸념도 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전시장을 기웃거리며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자유로운가.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러나 내 자식이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수입은 불규칙적이고 몸은 고되며 작업을 알리기 위해 부산을 떨어야 하는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직업일 뿐이다. 어떤 연유로 작가의 길로 들어섰건 둘 다 틀린 이야기는 아닐 터, 그 괴리 사이에서 작가의 괴로움이 싹튼다. 다음주부터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소개하는 권지현의 ‘죄인’ 연작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부모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신처럼, 사람들이 늘 짊어지고 다니는 죄책감은 무엇일까. 작업의 진정성을 위해 길.. 더보기
불편한 유령 대개 사진에서는 초점이 맞은 대상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은 보통은 사진 한가운데에 놓인다. 그렇게 주목받고 있는 대상에 주목하도록 우리의 눈은 길들여져 왔다. 그 ‘쨍한’ 사진에서 우리는 강박처럼 그가 왜 주인공인지를 읽어내려고 애쓴다. 대상의 표정, 피부색, 복장, 나이 등등 우리가 사진 속에서 찾아 헤매는 기호들이 정말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한번쯤 사진 속의 내 모습과 전혀 동화되지 못하는 경험을 해봤다면, 그것은 단지 사진이 실물보다 못 나와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 모습이 나를 전혀 설명해 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질 사진가 칼레는 이 고민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인물들은 모두 초점이 빗나가 있다. 유령처럼 흐릿한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생략.. 더보기
판잣집에서의 하룻밤 판잣집이 한 채 있다. 오래된 기념사진처럼 빛도 바래 보인다. 새하얀 구름과 적당히 짙은 나무 그림자는 가난을 축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런 의심없이 본다면 영락없이 과거의, 추억할 법한 누군가의 앨범 사진이다. 그러나 저 멀리 비행기가 자꾸만 눈에 걸린다. 아무리 날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행기가 가난한 동네의 장식품처럼 서 있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는 쓰레기 한 점 없고, 양철벽에는 옹색한 방에서 쫓겨나온 살림살이 하나도 걸려있지를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난해 문을 연 이곳은 호텔이다. 호텔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수백만명이 판자촌에 살고 있는 진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체험해 보라는 유혹이 가득하다. 대신 뜨거운 물과 인터넷, 온돌이 제공되는 특별한 공간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 더보기
뿌리 혹은 먼지 이것은 실뿌리다. 땅속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가능한 한 기다랗게 자라던 중이었다. 찰지지 않고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땅은 살아남기 위해 실뿌리로 하여금 악착같이 잔가지를 치도록 부추겼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뿌리째 뽑혀 나와 끝을 맞이한다. 이제 땅 위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이 시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나마 서서히 썩어들어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다. 아니다, 이것은 먼지다. 마른 땅에서 피어난 흙이며 살갗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이며 온갖 쓸모없는 것들이 뒤엉켜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세포처럼 자그맣더니 점점 자라나 주변의 모든 잉여물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창틀에서 악착같이 한데 뭉쳐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것.. 더보기
그래비티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떠다니는 것처럼 텅 빈 복도에 사과가 부유하고 있다. 아니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낙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기다란 복도는 사과가 천장에서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도 앞에서 복도 끝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마저 준다. 아담을 유혹하고, 신데렐라를 잠들게 했으며, 뉴턴에게 추락하는 것은 무게가 있다는 것을 일러준 빨간 사과가 그렇게 허공에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강하고 있는 사과는 분명 낯설다. 사진가 안준의 ‘그래비티’ 연작은 우리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시각적 실험이다. 실험이므로 조작된 사진이 아니다. 작가는 만족할 만한 이미지를 얻을 때까지 카메라 앞에서 사과 던지기를 쉼 없이 반복한다. 그.. 더보기
당신의 필요와 요구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고딕 양식의 집들은 생뚱맞다. 개성 없이 복제된 일련의 집들은 한껏 멋을 주려다가 실패한 공간처럼 보인다. 시골에 있어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촌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의 속물스러움은 ‘나는 절대 저런 끔찍한 건물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저런 풍경 속에서 살고 싶다’고 꿈꾼다. 이쯤 되면 우리의 욕망이 정체불명의 공간을 낳는 것인지, 아니면 공간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인지도 혼돈스럽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당신의 필요와 요구’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여는 신은경은 이런 식으로 공간의 안과 밖을 다룬다. 처음에는 앤티크 의자와 조야한 벽화가 뒤죽박죽된 결혼식장이나 스튜디오의 키치적인 모습에 주목하더니 이제는 아예 공간 밖으로 .. 더보기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 권순관, An Interview, 2009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 사진가 권순관이 경희대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면서 붙인 제목이다. 꽤 복잡한 말이다.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모순과 대립을 통해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간다는 뜻일 텐데 이게 미완성이니 몹시 회의적이다. 게다가 이 말이 극장을 수식한다. 변증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극장이라는 게 존재할까. 작가에게 그것은 현실 세계의 또 다른 은유다. 그에게 현실은 극장처럼 환상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모든 가치 체계, 불변의 진리를 지닌 사건 등은 그에게 변증법적으로 변해갈 순간적인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하물며 사진 한 장이 역사적 사건을 압축한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은 연출이 되었든, 인물 .. 더보기
소치 프로젝트 압하스의 총을 든 형제, 2009 ⓒRob Hornstra/Flatland Gallery 지난겨울 네덜란드 사진가 롭 온스트라의 러시아 전시가 돌연 취소되었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입국조차 불가능한 처지다. 그가 ‘소치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작업으로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러시아에 관한 작업을 해오던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올림픽이 열릴 소치에만 4년 넘게 드나들었다. 그동안 러시아의 따듯한 휴양지가 어떻게 동계스포츠의 중심지로 거듭나기 위해 화려하게 변모하는지를 추적한 것은 물론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대부분의 도시들이 그랬듯 가난한 마을들은 부서지거나 감춰졌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황금시대를 맞이한 도시의 호텔, 유흥업소에 기생하며 꿈을 키운다. 이런 기회에서.. 더보기
도시의 깊이 금혜원, Urban Depth D0003, 2010 축축한 붉은색 바닥 위로 바퀴 자국이 산만한 얼룩을 남긴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네 개의 불빛은 마치 주인공에게 쏟아지는 스튜디오의 조명처럼 이 공간에 강한 존재감을 만들어 준다. 정갈해 보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콘크리트 공간은 사진 속에서 묘하게 도시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이 시설물이 도시에 있으리라는 아무런 단서도 없는데, 작가의 중립적이고도 차가운 시선은 이 공간을 현대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도대체 이 낯익으면서도 낯선 익명의 장소는 어디란 말인가. 금혜원의 은 도시 지하에 숨겨놓은 쓰레기 처리장에 관한 연작이다. 화려하고 말쑥한 것들로 치장한 도시는 이 처리 시설에 기생하면서도 결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간판도 없이 지하 .. 더보기
白, 응축된 시간의 색 1970년대 젊은 사진가가 영화를 보다 문득 영화 한 편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관객으로 가장한 채 극장에 들어가 대형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1920~1930년대에 지어진 미국 극장의 아르데코풍 장식은 화려했고, 관객 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물었다. 그곳에서 그는 영화가 시작할 때 카메라 셔터를 열어뒀다가 영화가 막을 내릴 때 셔터를 닫았다. 무수히 많은 필름들이 돌아가며 스크린 위에 재현시켜 놓은 두 시간 동안의 사건과 사고는 그렇게 그의 필름 한 장에 응축되었다. 사진 속에서 장시간 빛을 쪼인 스크린은 온통 하얀색이 되었다. 대신 어두워서 한눈에 알아볼 수 없던 극장 내부는 구석구석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히로시 스기모토의 대표작 ‘극장’ 시리즈는 이.. 더보기
삼팔선 사진은 유령을 찍을 수 없다. 우리의 망막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사진기에도 상을 맺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실재하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삼팔선처럼. 미국과 소련이 군사작전상의 업무 분담을 위해 설정한 이 군사분계선은 지도상의 좌표로만 존재한다. 다만 이런 곳에는 으레 어떤 식으로든 의미심장한 표시가 있다. 38도선이라는 표지석이나 탱크 저지선이 늘어서 있기도 하다. 사진가 지영철은 이 삼팔선을 가지고 고민하는 작가다. 엄밀히 말해 그는 삼팔선을 매개로 이념, 역사 등의 거대한 말들이 시각화되는 방식을 고민한다. 부피도 무게도 갖지 못한 선 하나가 탄생시키는 이념의 공간을 탐구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삼팔선의 복합적인 풍경들은 삼팔선을 기념하거나 이 선이 여전히 현실에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