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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무리 쓰레기로 작업하기. 영국 사진가 맨디 바커를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녀는 태평양의 일명 거대 쓰레기지대에서 끌어올린 쓰레기를 하나하나 촬영한 뒤 포토샵으로 재배치해 전혀 다른 모양으로 조합해 낸다. 이 쓰레기들은 대개가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다. 그녀의 작업은 얼핏 보면 몹시 아름답고 신기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바닷가에 버려진 우리 삶의 찌꺼기와 마주하는 모순된 시각 체험을 선사한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어디서 왔는지에 따라 이 버려진 사물에 대한 단상 또한 느낌을 달리한다. 예를 들면 북위 33.15도와 동경 151.15라는 태평양 바닷가 한가운데서 건져진 쓰레기 더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일본과 하와이 사이에 있는 그곳은 쓰나미를 겪은 후쿠시마의 해안가 쓰레기들.. 더보기
본다는 것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디 노토는 ‘본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의심하는 젊은 사진가다.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목격 혹은 기록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더 크게는 본 것을 기억하고 본 것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적인 태도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사건을 기록하는 사진가들이 이 말에 유독 민감하고 괴로워하며 끊임없이 그 의미를 되새김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가는 것과 보는 것의 연관성은 어떻게 될까. 반드시 현장에 가서 본 것만이 진정성을 지니는 것일까. 가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혹시 습관처럼 사건을 ‘채집’하려고 가는 것은 아닐까. 조르지오는 ‘아랍의 봄’ 때 그곳에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혁명의 열기와 상처, 절박한 외침을 인.. 더보기
코트디부아르 미장원 머리 모양이 첫인상의 70%를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정확한 수치는 아니더라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아버지가 아프리카 태생인 에밀리에 레그니에의 무용담을 듣다 보면 흑인 여성이 곱슬머리에 대해 가지는 애증이야말로 남다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빗지 않아도 찰랑거리는 금발이었는데, 캐나다 학교에서 유일한 흑인 아이였던 에밀리에의 곱슬머리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어서 그녀는 늘 번개처럼 뻗친 머리를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촬영차 코트디부아르에 갔다가 미장원에서 반가운 풍경을 목격했다. 탈색으로 머리칼 색깔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모양의 가발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비욘세 같은 외모를 .. 더보기
아직 여기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육체적으로 소멸해 가고 있다. 아무런 기력도 없이 그러나 또렷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숨이 거두어질 그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그가 머무는 방 안으로는 여전히 햇살이 일렁이고 마당의 나무는 싱그러우며 거실 안으로는 간간이 벌들이 찾아들어온다. 그는 아마도 이 시들지 않는 자연들 품으로 곧 돌아갈 것이다. 그의 감긴 눈과 파인 주름, 성긴 머리칼은 지켜보기에 고통스럽지만 희미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가 느리게 내뱉는 숨은 예순에 얻은 딸과 스물네 살 연하의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하다. 그는 가족들에게 시간과 자연의 엄숙함에 대해 온몸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의 딸, 리디아 골드블라트는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조용히 목격한다... 더보기
짧은 행복 영국자연사박물관은 매년 ‘올해의 생태사진가’ 상을 제정해 수상작을 전시한다. 지난 화요일 이 상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상식과 함께 전시도 막을 올렸다.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수여하는 대상은 생태사진가 마이클 닉 니콜스에게 돌아갔다. 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위해 세렝게티국립공원의 사자 무리를 2년 동안 추적 관찰했다. 사진 속 풍경은 자신들의 왕국에서 편안히 잠든 사자 떼처럼 보인다. 사자들이 널브러진 바위 둔덕 옆으로는 물 웅덩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 뒤편 저 멀리 신의 축복처럼 늦은 햇살이 쏟아진다. 궁금한 것은 마치 거실 소파 위 고양이들처럼 사자 떼가 코앞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점이다. 닉과 촬영팀은 트럭에 몸을 숨긴 채 사자가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발치까지 .. 더보기
창세기 세바스티앙 살가두는 움직임이 굵직한 사진가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극한의 노동을 감행하는 ‘노동자’와 전쟁과 기아로 터전을 등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민’ 연작으로 인류에 관한 대서사시를 사진으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웅장한 구도를 지닌 흑백 사진은 슬픔과 고통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시각적으로 빨려들게 하는 힘이 있다. 이로 인해 비극마저도 너무 아름답게 묘사하는 사진가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런 그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기사를 10년 전쯤 처음 봤다. 당시 그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넘어 이제는 자연의 위대함을 다루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삐딱한 마음 탓일까. 인간의 고통에서 시작해 자연의 숭고함으로 끝나는 것은 너무 기독교적인 발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필 새 .. 더보기
필름 속 사건 그는 어둠이 내리자 후미진 골목 식당가를 거닐었다. 프랑스에서 온 그에게 네온사인이 화려한 간판들은 낯설고 이국적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다음에 유리문이 젖혀진 어느 건물의 실내에 눈길을 빼앗겼다. 다만 식당가를 찍은 직후였는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동선과 관심사를 정확히 알고 있는 필름이 말해주는 단서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필름을 현상하자 분명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빛은 새어 들어왔고, 마지막에 찍은 실내는 절반만 남아 있던 필름 속에서 잘린 채로 존재하고 있다. 네거티브 필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의도치 않았기에 분명 ‘네거티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필름이 사진기라는 기계 속에서 스스로 일으킨 화학적 사건의 결과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두 겹의 시간과 공간이 .. 더보기
마감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1829년 창간했다.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는 신문 중 미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되었다. 퓰리처 언론상을 17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자부심도 대단하다. 1925년에 세워진 이 언론사의 사옥 또한 필라델피아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 정론지도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언론인 20%가 매체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또한 2011년 새로운 사주를 맞이했고, 그해 11월 사옥 매각이 결정됐다. 사진가 윌 스테이시는 이 언론사가 급변하던 2009년부터 신문사가 이전을 한 이후까지 신문사를 내밀하게 기록해 왔다. 아버지가 평생 동안 근무하던 회사였기에 섭외가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마감’이라는 제목의 이 작업은 18.. 더보기
삼분의 일 지구 위 9억명이 넘는 인구가 굶주림에 위협받고 있다. 반면 1년 동안 전 세계 식량의 3분의 1이 버려지거나 손실된다. 유엔 농업식량기구의 2011년 연구에 따르면 대략 13억t이 이렇게 사라진다. 잘사는 나라는 음식물 쓰레기를 걱정하고, 못사는 나라는 기술 부족으로 인해 생산 과정에서 손실되는 식량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유럽과 북미에서는 소비자 한 명당 1년에 평균 100㎏의 식량을 버린다. 그들의 반대편 나라보다 최대 20배 많은 양이다. 부의 불균형은 이렇게 밥상에서부터 일어난다. 클라우스 피클러는 이 음식물 쓰레기에 관한 작업을 하는 작가다. 현실 참여적이지만 방법은 선언적이지 않다. 그는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와 본래 식탁에 있었을 법한 모습대로 혹은 최대한 먹음직스럽게 꾸며 놓는다. 헝가리산.. 더보기
팬톤표 얼굴색 미국 팬톤사가 만든 팬톤 컬러 가이드는 가장 과학적인 색채집이다. 색마다 알파벳과 숫자로 고유 번호를 붙인 이 색표들은 인쇄, 페인트, 패션 등 정교한 색의 구분이 필요한 모든 산업 영역의 표준으로 통할 정도다. 유광과 무광으로 나뉜 이 색채들은 각각 1000가지가 넘는다. 팬톤 컬러는 언어에서의 흰색이 시각적으로는 결코 같은 색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올해 대구사진비엔날레 주제전에 참여하는 브라질계 사진가 안젤리카 다스는 이 과학적 색채표를 사람에게 적용했다. 작가는 우선 각 인물을 찍은 뒤 그 주인공의 얼굴에서 추출한 11×11픽셀의 견본과 정확히 일치하는 팬톤의 색을 골라낸다. 그 다음 사진의 배경색을 포토샵을 통해 이 팬톤 색으로 바꿔 넣는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 더보기
강박적 트로피 출근길. 노아의 방주를 방불케 하는 지하철 안의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져서 어떤 일을 하는 걸까. 커피나 휴지 같은 회사 비품을 마련하기 위해 결재를 받으러 쫓아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하루 종일 환자의 입속을 들여다보며 충치를 치료해 주고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저마다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전쟁의 성격과 주인공들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 식별할 수 있을 것인가. 사진가 최현진의 ‘트로피’는 이 전쟁 속 전리품과도 같은 사물들에 관한 작업이다. 그것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서랍이나 바구니 같은 사각의 틀 안에 담겨 있다. 네모난 사무실의 네모난 서류철처럼 틀에 박힌 형식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전리품이 보관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 안에 담긴 내.. 더보기
먼 곳 그가 우리 나이 스무 살 즈음에 길을 떠날 때, 자신도 그 여행이 어떻게 끝을 맺을지 몰랐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앙투안 브뤼는 이웃 나라들을 더 알고 싶다는 심정으로 프랑스부터 모로코까지의 히치하이킹을 택했다. 얻어 탄 차가 데려다 줄 수 있는 만큼의 이동은 그에게 커다란 상점도 없고 전화도 터지지 않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선물했다. 그때의 만남은 다시 수년이 흐른 뒤 앙투안에게 더 외진 곳에서 더 절제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 나서게 했다. 문명을 등진 채 살아가는 이들은 유럽 땅에서만도 꽤 많아서 그는 지난 3년 동안 유럽 전역을 떠돌며 15곳 이상을 방문했다. 전기도 없고, 아무런 편의 시설도 없는 고립된 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집을 짓고 식량을 구한다. 텃밭을 일구고 .. 더보기
째르빼니 그것은 죽이기를 작정한 이주였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8만명에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들은 세간을 꾸릴 시간도 없이 가기 싫다고 우겨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화물칸 기차에 실려 1만5000리의 이주 길에 오른다. 춥고 배고프고 힘든 길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 할당된 7만7000명 중에서 1만명 가까이가 넉 달의 이주 기간에 사망했다. 산 사람을 지키려면 기차 안에서 숨을 거둔 자식을, 부모를 기차 밖으로 떠밀어 바람 찬 허공에 장사를 지내야만 했다. 도착해서는 헛간이나 땅 웅덩이를 집 삼아 모질게 살아난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김씨, 허씨, 유씨 등의 성을 쓴다. 대구의 인문사회연구소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기록 작업에 참여한 사진가 한금선이 그.. 더보기
소년 여자 애들이 좋아하는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소년이 있다. 드레스를 입고 립스틱도 바르고, 심지어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 때조차도 총구에 분홍색 헤어 롤러를 꽂아 장식을 한다. 아이는 소녀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다만 계집아이다운 것들을 즐기고 수집한다. 사진가인 엄마의 눈에 소년은 지금 자신의 세상을 훨씬 폭넓게 열어둔 채 즐기고 있다. 그녀가 보기에 ‘소녀는 분홍색, 소년은 파란색’이라는 이분법은 천성이 아니라 어른들이 학습시킨 취향일 뿐이다. 지난 7월 작지만 의미심장한 재단이 이 소년에 관한 작업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이 재단의 이름은 ‘프라이드 사진상’. 세상에는 남성과 여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성적소수자들이 있음을 사진으로 알리기 위해 생겨난 모임이다. .. 더보기
역사적 현재 사진가 안성석의 ‘역사적 현재’는 과거를 현재 속에 옴니버스식으로 불러오는 작업이다. 촬영은 순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뤄진다.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 그 앞에 스크린을 설치한 뒤 같은 장소의 옛날 사진을 투사한다. 이렇게 해서 첨성대도 남대문도 그의 작업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한 몸으로 존재한다. 마치 영매가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듯, 안성석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과거를 현재 속으로 끄집어낸다. 아니면 현재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의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간이 만난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흡사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첨성대 아래로는 답사를 나온 조선시대의 청년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 더보기
앨범 그는 브라질의 가난한 간판장이였다. 난생처음 양복을 빼 입고 행사에 가던 길에 패싸움을 목격했는데 말리려다가 그만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는 가해자가 제시한 합의금을 들고 덜컥 뉴욕행을 택했다. 마침 키치의 제왕 제프 쿤스가 미국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던 1980년대 초였다. 무엇으로든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대라면, 자신도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문제적 인간 빅 뮤니츠는 그렇게 해서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 사진가라는 수식을 다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뮤니츠의 특징은 초콜릿, 실, 설탕, 쓰레기 등 일상의 흔한 재료를 사용해 명화나 인물들을 자기 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몇 년 전에는 브라질 쓰레기장에서 사들인 폐기물들로 운동장만한 작품들을 만들어 화제가 되기.. 더보기
플랜테이션 백인들을 위한 식민지풍의 저택. 그 주변으로는 광활한 농장이 펼쳐져 있다. 역시나 햇볕은 따갑다. 식민지 시절, 그 뜨거움 아래서 자라나는 농작물들에 대한 욕망과 그 뜨거움에 익숙한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열기는 아마 더 강렬했으리라. 작품 속에서 시대와 장소를 짐작할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 켄터키인지, 쿠바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탕수수 농장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곳이 어디이건 플랜테이션 개발에 혈안이 됐던 백인 지배 아래의 원주민들의 상황은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은 직설적으로 이 모든 것을 얘기하는 대신 궁금증 가득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흑인, 태양열 아래서 무심하게 자라는 식물들 혹은 그 위로 피워 오르는 화염처럼 뭔가 사.. 더보기
애송이의 여행 이 사진을 처음 보면 두 번 놀란다. 우선 작가가 직접 접은 사진 속 종이들이 너무 작아서 놀라고, 그렇게 작은데도 기관을 갖춘 생명체처럼 정교해서 또 한 번 놀란다. 하물며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품 크기도 작다. 큼지막하고 화려한 작품들이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전시장에 걸린 모노톤의 자그마한 사진들은 애초 벽과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잔잔한 존재감만을 발한다. 그래서 오히려 액자 가까이 고개를 바짝 디밀어야 하고, 숨은 그림 찾듯 작은 대상들 앞에서 더 긴 시간을 머물러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의 둔한 감각이 깨어나는 사이, 책장의 펄럭임을 타고 활자 속에서 튀어나온 종이비행기들은 사진 밖으로 가벼운 비상을 시도한다. 순간 종이비행기가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까지를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사진가 권도.. 더보기
점들 정교하고 화려하게 정렬한 이 점들의 정체는 과연 뭘까. 눈이나 볼에 바르는 색조 화장품 내지는 디자이너를 위한 컬러 차트, 아니면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한 픽셀들? 답은 조금 더 시시하다. 바로 문구점에서 파는 땡땡이 스티커. 사진가 황규태는 이 스티커를 근접 촬영한 뒤 컴퓨터로 색을 조작했다. 그러나 3m 크기의 프린트로 보는 그의 점들은 손바닥만한 스티커와는 달리 도발적이다. 가볍지만 싼 티 나지 않고,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칠순을 넘긴 황규태는 여전히 파격적인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는 사진계의 이단아다. 그는 미국에서 생활하던 1960년대, 팝아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진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디지털이 나오기 훨씬 전인 그때부터 필름의 어느 부분만을 확대해서 재촬영하거나 필름을.. 더보기
코피노 흙먼지가 날리는 버스 창가에 앉은 여자도, 소녀도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이 아이는 코피노다. 코피노는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 아이들의 대부분은 유학이나 여행, 사업차 필리핀에 머물던 남성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뒤, 아빠에게서 버려진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는 낙태가 불법이다. 소녀가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아빠는 도망쳐 버린 상태였다. 엄마는 뒷감당이 두려워 다양한 방법으로 사산을 시도했다. 계단을 심하게 오르내리거나 배를 심하게 치는 것은 물론이고 독한 술을 마셨다. 그 충격은 아이의 생명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으나 뇌 기능의 상당 부분을 마비시켰다. 심지어 친엄마마저 혼자서는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못하는 이 아이를 떠나버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