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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코피노


신동훈, 코피노, 2010



흙먼지가 날리는 버스 창가에 앉은 여자도, 소녀도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이 아이는 코피노다. 코피노는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 아이들의 대부분은 유학이나 여행, 사업차 필리핀에 머물던 남성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뒤, 아빠에게서 버려진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는 낙태가 불법이다.

소녀가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아빠는 도망쳐 버린 상태였다. 엄마는 뒷감당이 두려워 다양한 방법으로 사산을 시도했다. 계단을 심하게 오르내리거나 배를 심하게 치는 것은 물론이고 독한 술을 마셨다. 그 충격은 아이의 생명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으나 뇌 기능의 상당 부분을 마비시켰다. 심지어 친엄마마저 혼자서는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못하는 이 아이를 떠나버렸으나 다행히도 이웃집 부부가 이 아이를 가족으로 맞이했다. 지금 아이는 양엄마의 품에 안겨 그동안 자신을 외면해 왔던 새로운 외갓집에 비로소 첫나들이를 가는 길이다.

이들의 고향은 우리에게 이국적인 휴양지로 유명한 세부. 현재 필리핀에는 몇 명의 코피노가 있는지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지만, 그 수는 결코 적지 않다. 코피노를 혼자 키우는 여성들의 직업은 술집 종업원부터 사무직까지 다양하지만 한국으로 도망쳐온 아빠들에게 필리핀의 가족은 잊고 싶은 ‘불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젊은 사진가 성동훈은 이 작업에 4년 이상을 매달려왔다. 관광 산업과 성적 욕망의 끔찍한 이면을 담는 일은 사진가에게도 힘든 일이다. 자비를 털어야 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카메라를 들고 다가가려면 친해져야 하는데 친해지고 나면 더 이상 사진가로서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충분히 따듯하면서도 신파로 치닫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좋은 사진들이 대개 그렇듯이.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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