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은 외향성을 나타내는 빨강과 그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파랑이 혼합된 색이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이질성이 절묘하게 공존해 조화를 이끌어내는 만큼, 보라색은 혼재하는 감정에 대한 심리를 담는다. 심신이 피로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보라색을 찾는다는데 균형을 추구하는 성질이 우리를 치유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균형을 찾는다는 말에는 그것이 결여돼 있다는 고백이 담겨 있으니, 현재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래서 보라색은 우울함, 불행, 죽음, 억압된 감정, 깊은 상처를 뜻한다. 한편 과거에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특정 신분의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에 고귀함과 우아함,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박영균, 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130×325㎝,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5
박영균은 제주 4·3항쟁 때 최후의 인민유격대가 주둔했고, 유격대장 이덕구가 사살된 이덕구산전 가는 길에서 만난 사려니 숲길에 귀하면서도 애매모호한 보라색을 입혔다. 사려니 숲은 2002년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면서 이와 조화를 이루는 발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생물권보전지역에 포함되었는데,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는 청정 숲길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다. 동료 작가들과 제주 답사길에 올랐던 박영균은 이 숲길을 걸으며 좌익과 우익의 갈등, 대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떠올렸다.
그는 숲에 울려퍼지는 메아리처럼, 혹은 반공포스터의 문구처럼, 숲의 풍경 안에 고은의 시 ‘추억 하나’에서 발췌한 구절 ‘허공에 날아간 총알은 어디로 갔을까’를 그렸다. 좌우가 서로를 향해 겨냥한 총구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화가는 노시인의 시를 들여다보며 생각해보고 싶었다. 제주도에 스며들어 있는 광복 이후의 혼란상은 여전히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채 잊혀지고 있다. 화가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숲을 치유의 색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여전히 갈등에 휩싸인 채 불안하지만 균형과 조화를 소망하는 우리를 위로한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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