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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2019. ⓒ 황수현


사실 인간에게는 공감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타인이 경험하는 육체적 통증을 나는 느낄 수 없으며, 타인의 행복, 슬픔의 감정 역시 그저 상상할 뿐 정확히 그의 느낌에 닿을 수는 없다. 만일 내 경험이 축적한 느낌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타인의 감정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근사치의 ‘느낌’을 찾아냈다면, 그래서 내가 상대를 향해 표현한 공감의 제스처가 타인의 마음에 닿았다면, 그때 우리는 공감했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말 공감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정확히, 서로의 느낌에 닿지 못한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황수현 연출로 세 명의 퍼포머가 둥글게 모여 앉은 관객 사이에서 1시간가량 펼친 퍼포먼스는 세번째 날의 분위기가 가장 무거웠다고 했다. 앞머리를 늘어뜨려 얼굴을 가린 세 퍼포머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 있다. 관객마저 ‘관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서 퍼포머들은 똑딱거리는 시계추처럼 발을 까딱대며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들의 몸이 극도의 긴장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그 움직임이 만드는 근육의 감각을 상상하면 알아차릴 수 있다. 문득 옆자리 관객을 향해 얼굴을 들이대는 퍼포머의 동작은 그로테스크와 유머 사이를 오갔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리듬은 다채로워지고, 호흡은 휘파람에 실려 서로 신호를 주고받듯 허공을 가로질렀다. 의자를 타고 넘던 그들의 몸은 바닥으로 향하고 서로 얽혀들어 움직이며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날의 관객들은 견고했고, 좀처럼 퍼포머의 유머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날의 관객들은 퍼포머들이 느끼는 것을 생각했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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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인스타그램 계정


“여러분, 환영합니다. ‘더 스크랩’은 한국의 창작자들로부터 홍콩에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사진/이미지를 전달받아 출력하고 전시합니다.”


2016년, ‘사진을 보는 일, 생산하는 일, 유통하는 일에 대한 고민과 의문’으로 출발한, 일종의 사진 유통 플랫폼 ‘더 스크랩’은 이미지 외에 어떤 정보도 없이 전시장 안을 가득 채운 같은 크기, 같은 재질의 사진 가운데 취향에 따라 사진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경험을 제공했다. 예술품 유통의 현실뿐 아니라, 이 시대의 젊은 감각, 청년의 삶에 대한 호기심과 문제의식도 이끌어냈던 이 기획은 이제, 서로 교류하고 취향을 확인하는 경험에서 더 나아가 이미지를 통해 각자 메시지를 만들고, 전달하고, 세상과 연대하는 경험의 장을 만들면서 그 여정을 마무리한다. 


홍콩 바깥의 우리가, 민주화를 열망하는 홍콩의 현실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인터넷의 사진, 영상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SNS에 떠 있는 사진에 ‘좋아요’와 ‘공유’를 누르고, 댓글을 다는 일 말고 그들과 연대하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한 기획단은, ‘닿을 수 없는 연결이 주는 무기력함’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2019년의 ‘더 스크랩: 해피투게더’에서 구매권을 구입한 1282명의 관객은 165명·팀의 작가들이 출품한 1000여장의 사진 가운데 각자 10장을 선택하여 한 권의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이들의 책은 2부씩 제작되었으며, 선택자의 사인이 담긴 1부의 스크랩북은 1월 열리는 홍콩 아트북페어 기간 동안 홍콩 시민들에게로 간다. ‘더 스크랩’은 멈추지만, ‘교류가 연대가 되고 지역, 문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지형을 그려보고’ 싶은 이들의 바람은 계속 간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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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체 바리니, 네 개의 푸른 동그라미, 2017, 오스나브뤼크 마르크플라자, 독일, ⓒ펠리체 바리니


펠리체 바리니가 도시 곳곳, 그러니까 건물 바깥의 길, 벽, 지붕, 유리창, 아니면 쇼핑몰이나 사무실 내벽과 천장, 복도에 기하학적인 패턴을 그려넣은 것은, 사람들을 모두 어떤 단 하나의 자리에 세우고, 단 하나의 장면을 목격하게 만들어서 그들의 감탄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물론 작가가 설정해 둔 어떤 위치를 찾아 그곳에 선 자는, 공간 곳곳에 흩어져 있던 페인트 자국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완성하는 꽤 스펙터클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별 의미 없이 조각난 듯 보이던 색면이 마법처럼 하나의 형태로 모이는 지점을 발견하는 순간, 관객은 3차원 공간이 그 패턴으로 인해 입체감을 상실하고 평평해 보이는 경험을 한다. 작가는 그렇게 관객들이 건축과 도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단다.


그러나, 작가는 관객 모두가 이 하나의 자리에 서서 바로 그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동서고금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갖는 의미로 자주 언급하는 바로 그 의미, ‘일상을 새롭게,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만나는 경험은 조각난 페인트 자국이 흩어져 있는 공간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전에 없던 선들을 툭툭 마주치는 관객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과 다른 느낌으로 공간을 경험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그가 ‘큰 그림’을 그린 건 맞지만, 여기에는 관객의 동선과 관점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없으니, 어떤 위치에 서고, 어떤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느냐는 오롯이 관객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거다. 그래서 관객들은 늘 그랬듯 무심하게 공간을 배회해도 좋다.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내 위치에 따라 자꾸 변하는 풍경 속 패턴의 향연을 만끽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작품을 즐기든 말든 그의 설계 안에 갇혀 통제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눈을 굴려보지만, 그 답은 외면하고만 싶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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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레키, Dream English Kid, 1964-1999AD, 2015, 4:3films, 5.1 surround sound, 23분 2초 ⓒMark Leckey, Cabinet London


이제, 우리의 기억은 대체로 온라인에 있다. 뮤지션 양준일에 대한 정보는, 그가 <슈가맨>에 나와 이슈몰이를 하기 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온라인을 떠다녔고, 사람들은 20년 전 영상 속 그의 모습을 ‘시간여행자’라 호명하면서, 바로 그 시절을 살았던 나의 기억과 시간에 접속했다.


유튜브에서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의 부틀렉 음원을 발견한 작가 마크 레키는, 1979년 그의 나이 15세, 리버풀의 클럽 ‘에릭’에서 이 밴드의 공연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밴드가 그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날의 경험에 대한 기억이 특별하게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음원은 그의 15세를 환기시켰다. 어느 정도 희미해진 그의 기억들이 온라인에 있었던 셈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반기를 ‘온라인 데이터’로 정리하기로 한다. 


그는 영화, 광고, 뉴스, 드라마, 뮤직비디오 영상을 뒤적이며 자신이 태어난 1964년부터 Y2K버그에 대한 염려가 온·오프라인의 세계를 위협하던 1999년까지, 그의 인생에 닿아 있는 정보들을 찾아냈다. 1964년에는 미국의 무인 달 탐사선인 레인저 7호가 달 사진을 촬영하여 지구로 전송했고, 1983년에는 ‘소련’이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했다. 비틀스가 전 세계 음악팬의 인기를 휩쓸었다. 레이브 파티가 젊음을 흔들었다. 유튜브, 비메오에서 추출한 많은 푸티지들을 자신의 호흡과 템포로 매만지니, 그의 기억에 닿는 모양새로 얼추 끼워맞춰지는 듯하다. “어떤 면에서, 나는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내가 했던 경험들을 복제하려는 것 같다.”


그가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터넷에서 찾아 엮는 이 작업을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나와 나의 세대가 잘 알고 있는 것을 다루기 위한 시도”라고 말하는 작가는, 온라인에서 우리의 과거를 집단기억으로 부활시키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 우리의 기억은 왜곡과 삭제의 과정을 거칠지언정, 대체로 온라인에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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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헌, 의 일부분, 2019, Oil on birch plywood, 112.5×200×25.4㎝


‘미장산.’ 그곳에는 나무가 있고, 길이 있다. 물과 바람이 부지런히 산세를 스치니, 봉우리는 높아지고, 계곡은 깊어진다. 우거진 푸른 숲, 길게 솟은 나무며 바위 틈새로 청명한 기운은 고요히 가라앉고, 계곡 위로 시선을 내린 ‘보는 자’는 흐르는 물에 마음을 잃는다. 이제는 ‘숲에 내린 달빛에 가야 할 길을 물을 때’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도로에서 배종헌은 몇 개의 터널을 지났을까. 흙이며 회, 시멘트를 바르는 미장이의 손길이 만들었을 벽, 천장, 바닥, 그 터널의 표면에 들러붙은 ‘먼지’, 시멘트의 균열이 눈에 들어와 풍경이 되던 날, 풍경을 지나 ‘산수’가 되던 날, 어쩌면 그의 눈은 아무것도 안 보았을지 모른다. 


뇌는 생각을 멈추었을지 모른다. 뚜렷한 대상을 향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열려 있던 동공으로 치고 들어온 빛이, 불현듯 뇌의 타성을 건드렸을 때, 그래서 그저 스치던 정보가 피할 수 없이 의미가 되었을 때, 그는 번득 정신을 차렸을까.


시멘트를 바르는 기술뿐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특수한 고안’이라는 의미마저 담고 있는 ‘미장’을 산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순간, 세상 모든 흔적에서 심상을 엮어내는 보는 자의 보배로운 눈은 진청색 평면 위로 감추어진 산수를 긁어낸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을 흔적의 풍경에 주목하며 작가는 미장이와 미에 대해 나누는 대담을 상상한다. 이들은 콘크리트의 균열에서 ‘보이지 않는 반항과 소극적 저항’을, 콘크리트 거푸집에서 ‘기억하는 사물, 탈역사적 기록’을, 콘크리트 요철, 그 생채기에서 ‘과정과 무목적·비목적의 목적’을, 콘크리트 동굴벽화에서 ‘폭력과 반자연적 자연의 정취’를 떠올린다.


‘눈으로 걷고 생각으로 그리는 풍경을 만나는 시간’, 재현하는 일에 발 담근 화가는 ‘걷지 않는 정지여행’의 길 위에 서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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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바움가르텔, 바나나스프레이어, 쿤스트팔라스트 미술관, 뒤셀도르프


토마스 바움가르텔은 1986년부터 미술관 외벽에 스프레이로 바나나 그라피티를 남겨왔다. 한 예술가의 이 ‘비공식적인 인증’ 행위는 ‘가볼 만한’ 예술공간의 표식으로 인정받으며 퍼져 나갔다. ‘바나나’의 ‘보증력’은 세월이 흐르며 퇴색된 감이 있지만, 덕분에 ‘예술 인증’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의문은 커진다.


1967년 앤디 워홀은 적당히 잘 익은 ‘바나나’ 그림을 넣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재킷을 디자인하고는 ‘천천히 벗겨보시오’라고 적어넣었다. 바나나 그림을 벗겨내자, 그 안에서 핑크빛 바나나 알맹이가 등장했고 그의 작업은 ‘외설’ 이슈를 낳았다.


바나나 가격 폭락의 이유를 알기 위해 그 생산·유통 과정을 추적하던 함경아는, 필리핀에서 바나나 대량재배로 땅이 죽어가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2006년 발표한 작품 ‘허니바나나’를 통해 ‘거대 자본의 힘에 냉소’를 보냈다.


최근,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아트페어 아트바젤 마이애미에 생바나나를 테이프로 벽면에 부착한 작품 ‘코미디언’을 출품했다. ‘바나나’는 ‘세계무역’을 상징했다. 1년 이상 벽에 바나나를 붙여둔 채, 적합한 재료를 고민한 끝에 결국 그는 ‘있는 그대로의 바나나 그 자체’를 선택했다. 그리고, 12만달러에 판매된 이 작품을 데이비드 다투나가 떼어 먹었다. 카텔란의 갤러리 대표는 다투나의 행위에 대해, “더 중요한 건 이런 유의 도발은 새로울 게 없다는 거다. 그것이 무엇이든, 특별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바나나는 또 다른 의미로 빠르게 접속했다. 테이프로 벽에 ‘무엇인가’를 붙이는 행위를 따라하며 제품을 홍보하고, 캠페인을 펼치는 개인과 기관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마이애미의 건물관리노동자연대는 보라색 셔츠 위로 바나나를 붙인 채 거리 시위를 벌이면서 ‘바나나 예술’보다 낮은 그들의 임금과 업무환경을 토로한다. “우리의 노동가치는 왜 인정하지 않는가.” 


‘바나나’에는 이렇게 의미와 명분이 쌓여가고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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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Walking Form, 2019, 캔버스에 먹과 아크릴, 96.5×130.2㎝, ⓒ이정민 우손갤러리 제공


‘불안정한 작업환경과 레지던시의 입주로 잦은 이사를 겪으며 점차 도심을 벗어난 외곽지역을 탐색하던’ 이정민은, ‘목적지가 없어야 산책’이라며 소소하게 나선 길,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을 거다. 노트에 옮겨 두었다던 ‘1839년에는 산책 나갈 때 거북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 우아해 보였다. 이것은 아케이드를 어떤 속도로 산책했던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발터 베냐민의 문장을 떠올리기 좋았을 거다. ‘내일의 내가 어디에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는 미래로부터 나의 존재를 다른 위치에 놓는 방법’인 산책은 그저 몸만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었다. ‘변변치 못한 공터와 주변의 작은 숲, 덤불들 주위를 걸으며, 도시도 아니고 도시가 아닌 것도 아닌, 자연 아닌 것도 아니고 자연 그대로의 것도 아닌 주변부의 풍경들이 변두리로부터 모서리를 드러내는 긴밀한 순간들을 엿보던’ 그는, ‘도시에서 발견하는 선과 덩어리, 건축현장에서 마주하는 비계의 선들, 조경용 나무들의 어눌한 상태를 수집’하여 자신이 고민하는 필법으로 화폭에 담는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와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삼던 모든 것들을 재고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느꼈던’ 시간을 지나 그는 ‘헛기술’이라 명명한 전시를 열었다. “헛기술은 기술(技術)과 기술(記述) 모두를 지칭하는 동시에 말머리에 붙은 ‘헛’이라는 구멍을 통해 양쪽 모두로부터 빠져나간다.”


그 이후, ‘목적 없는 행위들은 어쩌면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나 권리 같은 것, 현실의 아이러니를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를지라도 여전히 답 없는 시도를 지속하는 수행적인 태도’라고 말하던 그였지만, 세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100일이 조금 더 지난 지금, 어떤 죽음들은 주목받고 어떤 죽음들은 방치된다. 자신의 선택이든 아니든, 결국 모든 죽음은 메시지다. 우리의 관성을 반성하며, 떠나간 이들에게 애도를.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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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설근체조, 2019. ⓒ 박해욱


혀의 움직임은 당신의 표정을 바꾸고, 턱선을 바꾸고, 얼굴형을 바꾼다. 몸짓을, 말투를, 음색을, 발음을, 어쩌면 마음의 위치를 바꾼다. 유연한 세치 혀라면, 당신 아닌 타인의 마음마저 능숙하게 움직인다. 혀가 제자리에 놓이지 않는다면, 운동성을 과시하면서 어설프게 움직인다면, 그 혀는 당신의 치열을 밀어내고, 구강구조를 망가뜨리고, 숨쉬기마저 방해할 것이다. 그런 혀일지라도 단맛, 짠맛, 쓴맛, 신맛을 보겠고, 말을 쏟아 내겠고, 타인의 마음을 유린할 테지만, 그런 혀는 마침내 당신의 턱관절을 비틀고, 얼굴의 윤곽을, 몸통을 뒤틀고 말 것이다.


어느 날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이윤정은 혀뿌리를 움직여보던 중, 혀근육이 턱근육, 심장근육, 전신으로 뻗어 있는 온갖 근육에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혀뿌리를 움직이자 내장기관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혀의 근육을 의식한 뒤로 그에게는 온몸의 근육운동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움직임이 이끌어내는 표현의 세계, 그 당위성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혀는 늘, 원래 하던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혀의 운동은 과거와 달라져 버렸다. 제12뇌신경이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혀근육으로는 미처 춤추지 않았던 무용수가 이제, 혀뿌리로부터 춤을 추기로 한다.


‘설근체조’라 명명한 퍼포먼스의 시간, 무용수의 입안에서 왼쪽 오른쪽 위아래, 다시 치열을 고르며 워밍업을 시작한 혀뿌리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발음하며 낯선 움직임을 훈련한다. 혀의 운동은 이제 목으로, 어깨로, 손으로, 몸통으로, 다리로 이어져 온몸의 근육으로 퍼진다. 내장기관이 꿈틀댄다. 매끈한 얼굴 아래, 목구멍 뒤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던 혀의 존재를 의식하니, 댄서의 움직임이 다르다. 목구멍 너머의 세계를 온전히 고려하면서 바라보는 시간이 만드는 긴장감에 혀뿌리의 침은 마를 새가 없다. 척추동물의 입속에서 꿈틀대는 30㎝짜리 근육다발이 끌고가는 춤 앞에서, 이유가 있는 움직임이 비로소 아름답다는 것을 알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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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019, 영상, 30분34초 ⓒ무진형제, 아트스페이스 풀


멕시코만 바다에서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마침내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청새치를 낚아 올렸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가 보다. 그는 청새치의 살점을 상어 떼에게 고스란히 뜯기고, 앙상한 뼈만 매단 채 돌아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성공의 기억을 뒤로하고 노인은 피로한 몸을 뉘었다.


‘길 위쪽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작가그룹 무진형제는 나이가 들면 남을 따분하게 만들지 않는 현명한 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으로 적은 것을, 낡은 집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시작한 작업의 제목으로 삼았다.


오래된 집, 오래된 땅, 오래된 삶, 오래된 기억의 안팎을 엮어 나가는 영상 설치 작업 안에는 시공간 안에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이 쌓인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의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치밀하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의 주름진 살결, 깊게 휘어진 손가락에 가 닿았다. 말 그대로 ‘고목껍질’ 같은 노인의 피부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다. 이제 그는 격정의 시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것이다. 노동의 세월을 새긴 듯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우편물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고요하고 담담한 것이, 그저 이렇게 멈추어 있어도 좋겠다.


사람은 늙고, 땅의 쓸모는 변하지만, 그저 이곳에 그대로 있고 싶은 자의 마음은 가만히 있다. 그를 지켜보는 젊은이들은 늙은 자의 그 마음을 만났을까. 노인이 꿈꾸었을 ‘사자’를 만났을까.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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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7획, 2018, 캔버스에 템페라, 120×100㎝ ⓒ 송현숙, Zeno X Gallery


캔버스 천 위를 스치는 화가의 붓질은 또 다른 결을 만든다. 한때, 송현숙의 붓질은 삼베나 모시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빛을 거의 굴절시키지 않아 유화보다 맑고 생생한 색을 낸다는 템페라 특유의 딱딱한 색조가 식물성의 담백한 질감에 닿아 있었다. 이제 그의 ‘획’은 식물의 뉘앙스를 넘어 실크 특유의 동물성 광택마저 담는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하나의 붓질은 농사를 지으며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는 항아리의 형태가 되었다. 


안료를 달걀, 송진, 물과 기름에 혼합하는 시간, 그는 생각을 채우거나 비우기를 반복할 것이다. 곧 마주할 빈 캔버스 위로 기록할 숨결에 의미를 부여하고 걷어내기를 반복할 것이다. 어떤 결정을 마치고 나면, 또 하나의 손처럼 호흡을 맞춰 왔을 크고 납작한 붓을 들고 한 호흡에 한 획을 긋는다. 수정하기 곤란한 그 순간의 움직임이 한 번 살아내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결정들처럼 캔버스를 덮는다. 


그의 작품은 별도의 제목을 취하기보다, 호흡과 획이 스쳤을 숫자가 된다. 태어나면 소멸하고 마는 목숨들의 운명처럼, 단순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담백한 선택이다. 


그의 작업 과정을 기꺼이 ‘수행’이라고 이름 붙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생사의 속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예술에 집중을 하되, 세상과 일상을 외면하지 않으며 분노할 줄 아는 작가의 현실감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입으로 허무하게 설명하는 수행이 아니라 ‘화면’이 포착한 그 수행의 숨결은 쉽게 외면할 수 없다. 유기물과 무기물이 순환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곧 소멸할 인생을 반복해서 그으며 역사를 만드는 생명의 몸짓처럼, 획 하나에 모든 것을 내거는 일은 무겁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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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쥔 화가의 손은 우윳빛으로 매끄럽게 비어 있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가늠하다,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어느 지점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가볍게 짧은 빗금을 치고 시작점을 잡은 뒤, 선을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설원기, 2019-34, 2019, 폴리에스터 필름에 혼합재료, 61×46㎝ ⓒ설원기 이유진갤러리 제공


작은 쌀알 모양으로 출발한 선이 형태를 감싸고, 삼박자의 왈츠를 지휘하듯 일그러진 나선형을 그리면서 돌아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을 순간, 그의 선은 나선의 회전 궤도를 벗어나 화면을 가로지르고, 가느다란 실처럼 떨어져 멈추었을 것이다.


이제 화가는 검은 물감을 찍어바른 붓을 들어 다음 리듬을 만든다. 먼저 그렸던 선의 흐름은 이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처음 필름 위를 살피던 그 시점 그 눈으로 화면을 본다. 이번에 그의 붓은 왼편 위로 갔을 테다. 물감을 흡수하지 않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미끄러지며 붓은 유유히 굽이쳐 화면 아래로 내려왔을 것이다. 더 흐르기에는 검은색이 너무 투명해지기 바로 전, 다시 검은 물감을 입은 붓은 화면을 오르내리다가, 시작하던 그 지점 즈음에 올라갔을 때 멈추었을 것이다.


다시, 앞의 시간을 지운 화가는 흰 물감을 찍은 붓을 빠르게 화면으로 내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마도 다섯 번, 어쩌면 여섯 번. 그는 기꺼이 앞선 연필의 리듬과 검은 붓의 물결을 지웠건만, 이미 축적한 시간의 흔적은 그의 마지막 움직임에 개입하고 말았다. 흰 붓은 미처 마르지 않은 검은 물감을 잡아당겼으며, 마침내 화가가 붓을 뗀 화면 안에서 그는 과거의 어떤 ‘행동’도 숨기지 못했다.


각 단계의 움직임 간에 의도적인 조화로움을 만들지 않고, 각자 존재감을 갖기를, 이 화면이 특정한 ‘콘셉트’에 복무하지 않기를, “사소함이나 일상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무엇”의 상태로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한 화가의 바람은 나누고, 채우고, 찍고, 긋는 일을 통해 펼쳐졌으나, 구성의 균형을 살피고, 행위의 의도를 추적하려는 보는 자의 태도는 회화의 운명이거나, 두 눈을 가진 인간의 숙명이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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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울프스, 채색된 조각-조울증/사랑/진실/사랑, 2016 ⓒ조던 울프스, 데이비드 즈비너, 사디콜


2m 남짓한 꼭두각시는 정수리, 왼손, 오른발을 굵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앙 다문 이빨을 드러낸 소년의 얼굴을 한 이 인형은 1950년대 미국 어린이들의 폭발적 사랑을 받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하우디 두디쇼>의 마리오네트를 닮았다. 트러스의 도르래에 매달린 쇠사슬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인형의 팔이며 다리, 머리가 그에 따라 휘청거린다. 그는 사슬을 밀고 당기는 이의 손길에 따라 일어서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어느 순간, 거꾸로 매달려 허공을 휘젓던 그의 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사슬은 쉬지 않고 그의 몸을 흔들어댄다. 간혹 마이클 볼턴의 노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가 흘러나오면, 마리오네트의 움직임은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이 툭 끊어지는 순간, 사랑의 이름으로 대상을 동여맨 자의 폭력성은 더 역하게 드러난다. 


그는 비록 ‘인형’에 불과하지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꺾이는 그의 몸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다. LCD 모니터로 만든 그의 푸른 눈동자 뒤편에 심어 놓은 센서가 전시장 안에 들어온 사람의 움직임을 추적하며 시선을 맞춘다. 인형의 몸에 가해지는 진짜 폭력 앞에 노출된 관객들은 스크린 눈동자가 쏟아내는 눈빛에 섬뜩하다. 허공에 매달려 관객을 내려다보는 그가 “둘째, 너를 죽이고, 셋째, 너를 붙잡고, 넷째 피를 흘리고…”라면서 열여덟가지의 폭력적인 행동을 시처럼 읊조릴 때, 관객은 그의 모습에서 사탄의 인형 ‘처키’가 불러일으킬 법한 공포를 본다. 부자연스럽게 꺾인 몸통, 페인트가 벗겨진 얼굴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조던 울프슨이 애니메트로닉스 인형으로 제작한 이 작품 ‘채색된 조각’이 제시하는 공포의 시간은, 너무 많은 유형의 고통이 존재하는 이 세상,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의 액면을 난폭하게 드러낸다. 그 앞에서의 불편함은 보는 자의 몫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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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넷 마이네케 한슨, 앤드-유즈드 시티, 2019


세상을 향해 열린 눈은, 매 순간, 보았다는 사실마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과 마주친다. 볼거리들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온·오프라인에 차고 넘치는 것들을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루틴 안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과 목적으로 정보를 선택하고, 행동하는가. 그 선택은 어떤 영향력을 갖는가. 기술산업이 인간의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특히 인간의 신체를 어떻게 통제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덴마크 출신 작가 시드넷 마이네케 한슨은 가상세계, 로봇, 포르노 등의 소재를 통해 이 질문을 이어간다.


그의 작품 ‘앤드-유즈드 시티’에서, 모니터 앞에 선 관객은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눈에 비친 상을 본다. 게임 컨트롤러를 사용하여 화면을 클릭하면, 관객은 비로소 이 캐릭터가 본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그의 눈은, 마치 도시를 감시하는 요원처럼 도시 안의 풍경을 면밀히 훑고 컴퓨터로 만든 가상의 세계를 바라본다. ‘감시자’는 감시망 안에 포착당하고 싶은 마음과 그 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세상의 풍경을 스캐닝하고, 정보화하는 중일 터이다.


나의 정보는 소중하다며 무작정 감시를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감시자의 기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감시자가 정보로 접수하지 않은 정보는 이제 정보가치를 얻지 못하고,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세상에서 삭제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감시사회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이들과 자기 정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이들 양쪽의 심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돈벌이가 된다. 그 누군가는 세련된 노출 방식을 개발하고 운영하면서 ‘자본’으로 그들을 독려하고, 가장 난도 높은 보안 장치를 개발하여 정보 보안에 힘쓰는 이들로부터 돈을 벌어들이니, 개인의 모든 데이터가 수익 창출의 기반으로 작동하는 경제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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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세스 스튜디오, AImoji(ai-generated emoji), 2019 ⓒprocess studio


인공지능이 인간 세계에 가져올 변화에 대해 다룬 전시 ‘언캐니 밸류’의 전체 그래픽 디자인을 맡은 ‘프로세스 스튜디오’는 전시의 아이덴티티를 시각화하고 홍보하는 과정 안에 ‘이모지’의 세계를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로봇처럼 인간 아닌 존재에서 인간과의 유사성을 느끼면 호감도가 높아지지만, 그 유사성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호감은 불쾌감과 거부감으로 변한다는 이론 ‘언캐니 밸리’에서 제목을 가져온 이 전시의 메시지에 호응하면서, 그들은 DCGAN(심층 돌림형 생성적 적대 신경망)을 활용했다.


정보 생성자가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그것과 매우 유사하지만 가짜인 정보를 만들고, 정보 감별자가 그것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실제와 매우 유사한 대체재를 생산하는 이 독립적인 학습법 DCGAN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3145개의 ‘이모지’를 공부한 끝에 ‘AImoji’를 만들었다. 국가별 언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서 등장한 유니코드로 생산하는 이모지는 1999년, 구리타 시게타카가 ‘모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176개를 디자인하여 발표한 이래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언어로서 이모지가 차지하는 위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측에서 201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할 만큼 견고해졌다.


하지만 DCGAN은 이 노란 동그라미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안의 ‘표정’이 무엇을 전달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작가의 미션을 부여받은 DCGAN은 그저 주어진 정보를 학습해 나가면서 행복,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담은 듯 보이는 표정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DCGAN이 표현하고 싶은 감정일 리 없었다. 어떤 표정은, 한두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 때로는 끔찍해 보이기까지 하는 감정을 전달했지만, 그 역시 ‘인간’이 그 이미지에 투사하여 정의내린 감정일 뿐 DCGAN의 감정과는 무관했으니, 인간은 이제 세상을 읽고 판단하는 습관을 재고하고 조정해야 할 시점에 도착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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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택, 루핑 Loop, 2019, 종이에 아크릴채색, 칼로 자르기, 455×273㎝(사진촬영 조영하)


“네에, 그럼 그렇게 하시죠.” 도널드 트럼프처럼 직설적인 ‘말버릇’과 거침없는 태도로 살기에는 손에 쥔 것이 너무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라는 갑옷이다. 힘 있는 자가 겸손한 언행마저 갖춘다면, 그의 화술은 상급 레벨의 처세술로 칭송받을 것이니, 보통사람이라면 이 당연한 태도 위에 세련미와 재치까지 겸비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생존용 교양화술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박관택이 종이에 써내려간 화술은, 청유하거나, 이중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흐리거나, 계속 호응하거나, 동의하고 동일시하는 식이다. 상대를 은근히 높여주는 이런 화술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이 실전에서 사용하면 좋을 법하다. 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멘털만 온전하게 유지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상실감, 분노를 일깨우는 망언과 폭언은 다른 의미에서 대중을 설득하는 화술이다. 그러나 이 역시 가진 자의 무기일 뿐. 보통의 내가 상대의 신뢰를 얻고 청탁에도 성공하고 싶다면, 내 위치에 맞는 화술을 갖추어야 한다. 폐쇄형 질문으로 상대의 확답을 유도하고, 감탄하고 반문하고 비유하고 동조하면서 상대방의 동의도 유도해야 한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거절법, 설득법, 청탁법 같은 대화 매뉴얼은 다 쓸데가 있다. 


“그렇군요. 역시 그랬구나.” 상대를 부드럽게 긍정하면서 대화를 시작할 때 그는 ‘이득’을 볼 수 있다. 긍정의 화술은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킨단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등으로 시작하는 말은 오해나 문제의 소지를 불러올 수 있는 손해 보는 말하기라고 하니, 보통의 사람들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누구나, 때로는 단호하고 싶다. 그래봐야 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문장은 이 정도가 최선이겠지만.


“그렇긴 한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요?”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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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아부 함단, 사드나야, 2018, 사운드 설치


2016년 국제앰네스티는 작가 로런스 아부 함단과 함께 시리아 인근 다마스쿠스 북부의 군사감옥 사드나야에서 풀려난 수감자들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관리하고 있는 이 군사감옥에서는, 2011년 민주화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을 계기로 내전이 발발한 시점부터 2015년 말까지 반정부성향의 수감자 1만3000여명이 사망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그들에게 사치였다. 폭행과 고문에 시달리며 늘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지내야 했던 그들에게는 어떤 시각 정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귀가 정보를 수집했다. 어떤 날에는 쇠파이프에 맞은 동료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들어야 했고, 어떤 날에는 신체 일부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발소리는 빠를 때도, 느릴 때도 있었고, 음성의 데시벨도 경우에 따라 달랐다. 감옥의 각 방은 벽으로 견고하게 나뉘어 있었지만, 모든 공간을 지나가는 통풍구와 수도관은 공간 전체를 연결했다. 소리는 벽을 타고, 관을 타고, 사드나야를 흘렀다. 소리는 환경을 탐색하는 핵심감각이 되었다.


아부 함단은 ‘에코프로파일링 기법’을 사용하여 서로 다른 잔향의 음을 연주한 뒤, 오로지 소리로만 사드나야를 기억하고 있는 생존자들에게 이 소리가 실제로 감옥에서 들었던 소리와 일치하도록 방, 계단, 복도 등의 공간 크기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소리에 대한 기억을 활용해 교도소의 내부를 디지털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그렇게 사드나야의 잔혹한 실상을 담은 보고서가 세상에 발표되었다.


그 후 작가는 사드나야에 대한 작업을 이어갔다. 2011년 시위 직후 감옥에서 들리는 속삭임의 크기가 과거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낮아졌으니, 감옥이었던 곳이 사형자 수용소로 변했다는 의미를 담은 라이트박스를 설치했고, 건축 설계에서 사용하는 레이 트레이싱 방식으로 사드나야의 음향 흐름을 매핑하여 공간을 상상했다. 눈은 가릴 수 있어도 소리는 통제할 수 없었던 사드나야의 진실은 감출 수 없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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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블록, 모리츠 리제비크, 검열자들, 2018, 88분 ⓒ 한스 블록, 모리츠 리제비크


어두운 방, 밝은 모니터 앞에 앉은 이들은 ‘삭제’ ‘무시’라는 명령어를 반복하는 중이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어떤 것은 지워지고, 어떤 것은 살아남는다.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우리의 사고와 신체를 장악한 현재, 끝없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정보와 주장이 넘쳐나는 이 플로어는 모든 정보에 열려 있는 ‘해방구’인가.


독재자와 정치인을 희화화시킨 나체 그림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인기를 얻던 일마 고어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를 묘사한 그림을 게시한 후 페이스북에서 퇴출당한다. 시리아 전쟁의 심각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시리아에서 전쟁 중 사망한 난민 어린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 작가 칼리드 바라케의 이미지 역시 페이스북에서 삭제되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어떤 정보들이 꾸준히 지워지고 있었다.


2013년 한 소녀를 학대하는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확산되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사건을 목격한 후, 그 배후의 추적에 나섰던 모리츠 리제비크와 한스 블록은 비밀스럽게 활약 중인 ‘검열자들’을 찾아내고 그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검열자들은 필리핀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실리콘밸리로부터 콘텐츠 모니터링의 권리를 위임받은 그들은 가치중립성, 객관성을 숭배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유튜브에 올라오는 이미지들을 살피고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발견하면 삭제한다. 아동 포르노, 자살 동영상, 인종혐오, 테러 관련 동영상이 주로 그 대상이 되지만, 그 외의 콘텐츠도 ‘검열자’의 판단에 따라 삭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의견, 가치, 정치의 기류마저 흔들 수 있는 소셜미디어상의 결정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원하는 무엇이든 쓸 수는 있지만, 누군가의 잣대로 완벽하게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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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 로텐버그, 노 노즈 노즈(No nose knows), 2015, 싱글채널 비디오, 설치


애니메이션 캐릭터 스펀지밥의 단짝 친구 패트릭 스타는 백수다. 게으르지만 그런대로 살아가고, 어리석다는 세간의 평을 배반하듯 가끔은 난제를 얼렁뚱땅 해결해 버린다. 어느 날, 불가사리를 닮은 자신의 몸에는 다른 친구들에게 당연하게 붙어 있는 코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 성형수술로 코를 얻었다. 이제 그의 코앞에서 새 세상이 열렸다. 향수와 꽃다발의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향기로운 기쁨도 잠시. 그의 코는 음식냄새, 땀냄새를 견딜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고통에 빠졌다. 코가 없을 때 몰랐던 그 세계는 달콤하고도 역겨웠다. 그는 이제 코가 알려주는 세계를 포기할지 말지 고민해야 했다.


미카 로텐버그가 양식 진주로 유명한 중국 저장성 주지시의 진주공장에서 마주한 장면은 고통스럽고 매스꺼우면서도 아름답고 놀라운 과정을 담고 있었다. 진주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손은 진주조개의 부드러운 속살에 불순물을 밀어넣는다. 조개가 이 조각을 밀어내지 않고 품는다면 몇 년 뒤에는 진주가 탄생할 거다. 또 다른 여성들의 손은 진주의 희뿌연 내장을 헤집어 진주알을 골라내고, 물에 씻어낸 진주알 더미를 능숙하게 가르며 상품을 분리한다. 


영롱한 진주의 뒷면 비릿한 풍경을 목격한 로텐버그는 진주양식의 과정에 초현실적 이야기를 결합시켜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그보다 더 사실적일 수 없는 세상을 직조했다. 기계보다 빠르고 섬세하게 움직이다 잠시 지친 여인은 진주더미에 발을 묻은 채 작업대에 기대어 잠들고, 그녀의 발은 공장 너머 다른 세계로 삐죽 빠져나가 여유를 즐긴다. 공장 뒤편 어딘가 작은 사무실 작업대 앞에 앉은 금발의 백인여인은 꽃다발에 코를 대고 숨을 쉬는 일을 하는 중이다. 꽃향기를 맡은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처럼 거칠게 재채기를 하고, 그의 재채기는 면요리로 탄생한다. 보이지 않는 손들은 그렇게 생산에 열중했고, 작가는 이 세계를 애니메이션 <스펀지밥> 에피소드 제목을 따와서 ‘노 노즈 노즈(No nose knows)’라 불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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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반 데이비스 & 데이비드 힌톤, 달리는 혀, 2015, 디지털비디오, 28분 ⓒ시오반 데이비스 & 데이비드 힌톤


살아 있는 자의 혀는 언제까지 질주할 것인가. 그의 혀는 세상에 나온 이래, 인간계의 몸짓을 배우고, 모국어를 배우며 세상과 교류해 왔다. 더 빠른 혀, 더 능숙한 혀를 만나며 더 성장했다. 그러나 이 혀는,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누구의 의지로 달려나가는지 알아차렸는가.


안무가 시오반 데이비스와 영화감독 데이비드 힌톤은 ‘달리는 혀’라는 이름으로 22명의 무용가와, 사운드 아티스트, 애니메이터를 초대했다. 무용가들은 끊임없이 달리기만 하는 여인 ‘헬카 카스키’의 이미지를 받았다. 이제 그들은 프레임 안에 헬카의 인생을 써내려가야 한다. 각자 10초의 시간을 책임졌다. 무용가들은 프레임 안에 다양한 이미지를 콜라주해 넣었고 데이비스와 힌톤은 그들이 제시한 헬카의 인생샷들을 편집했다. 각 무용가가 콜라주한 10초는 헬카 인생의 짧은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인생 전체일 수도 있었다.


헬카는 22명의 무용가들이 각자 만들어 준 인생의 장면들을 달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지하철역, 주택가, 카페, 공원 등 런던의 익숙한 풍경 사이를 달리다 보니, 그의 혀는 성장을 거듭한다. 이웃 사람들의 일상을 스쳐 달려나가는 그는 하늘에서 갑자기 석탄비가 쏟아지거나, 먼지가 뿌옇게 차오른 장면 안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별빛 찬란한 들판 위를 달리기도 한다. 모두 그의 의지는 아니다.


헬카가 달리는 프레임 안의 세상은 22명의 무용가들이 각자 자기 선택을 담아 콜라주한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쉼없이 달리는 헬카는 덕분에 지나간 삶을 배우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겪는다. 고요함이 움직임보다 강한 순간을 만난다. 아주 작은 행동이 큰 무게와 변화의 핵심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번 선택이 다음 선택을 이끌어내며, 우리의 ‘비전’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헬카는 체험하고 있다. 비록 ‘일루전’의 세상 안에서 달리고 있을지라도.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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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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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고든, 24시간 사이코, 1993,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24시간. ⓒ더글러스 고든


하루하루 별일 없이 사는 것이 기적에 가까워 보일 만큼, 세상은 상상 이상의 사건 사고가 넘친다.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들, 잔혹한 결정들, 자기모순이 선명하지만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자비로운 비열하고 뻔뻔한 존재들에 둘러싸인 채 24시간 생활하다보니 어느 새, 윤리라든가, 상식, 사회질서가 견인하는 ‘올바른’ 가치는 나약한 개인을 통제하고자 강한 자들이 늘어놓은 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 도착한다.


이제 비일상은 일상이, 비정상은 정상이, 사악함은 선함이 되었다. 비상한 속도와 현란한 편집으로 전개되는 세상의 격랑에 휩쓸린 채, 보라는 것을 보고, 들으라는 것을 듣고,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면서 ‘나’를 방치한다. 나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기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거리가 필요할 텐데, 과연 그 의지를 세울 수 있을까. 속도를 놓친 뒤 차라리 포기하고 방치하는 나른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더글러스 고든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를 러닝타임 109분에서 24시간으로 늘어뜨려 선보였을 때, 관객은 영화사를 바꾼 명장면으로 칭송받는 샤워실 살인사건 앞에 1시간가량 노출되었다. 개인의 욕망을 따라 공금을 횡령해 피신한 마리온이, 낯선 모텔에서 머물던 하룻밤 사이 맞닥뜨린 비극 앞에서 관객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선과 악, 상식과 논리, 사회 통념을 떠올렸다. 공포에 휩싸였다.


히치콕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곁에 서 있는 인간적인 괴물을 제시하고자, 숏을 잘게 나누어 충돌시키고, 날카로운 음향효과를 사용하는 등, 온갖 영화적 장치를 사용하여 기획한 장면의 의도는 더글러스 고든의 손 안에서 뒤틀렸다. 초당 24프레임으로 흐르던 장면이 초당 2프레임으로 늘어지면서, 긴장감을 연출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리듬감은 무너졌고, 이미지가 한 컷 한 컷 드러나면서 공포를 조성하는 전략은 노출되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다. 히치콕이 통제하는 감정의 흐름에서 해방된 관객은 이제 더글러스 고든이 통제하는 시간 속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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