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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설근체조, 2019. ⓒ 박해욱


혀의 움직임은 당신의 표정을 바꾸고, 턱선을 바꾸고, 얼굴형을 바꾼다. 몸짓을, 말투를, 음색을, 발음을, 어쩌면 마음의 위치를 바꾼다. 유연한 세치 혀라면, 당신 아닌 타인의 마음마저 능숙하게 움직인다. 혀가 제자리에 놓이지 않는다면, 운동성을 과시하면서 어설프게 움직인다면, 그 혀는 당신의 치열을 밀어내고, 구강구조를 망가뜨리고, 숨쉬기마저 방해할 것이다. 그런 혀일지라도 단맛, 짠맛, 쓴맛, 신맛을 보겠고, 말을 쏟아 내겠고, 타인의 마음을 유린할 테지만, 그런 혀는 마침내 당신의 턱관절을 비틀고, 얼굴의 윤곽을, 몸통을 뒤틀고 말 것이다.


어느 날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이윤정은 혀뿌리를 움직여보던 중, 혀근육이 턱근육, 심장근육, 전신으로 뻗어 있는 온갖 근육에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혀뿌리를 움직이자 내장기관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혀의 근육을 의식한 뒤로 그에게는 온몸의 근육운동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움직임이 이끌어내는 표현의 세계, 그 당위성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혀는 늘, 원래 하던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혀의 운동은 과거와 달라져 버렸다. 제12뇌신경이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혀근육으로는 미처 춤추지 않았던 무용수가 이제, 혀뿌리로부터 춤을 추기로 한다.


‘설근체조’라 명명한 퍼포먼스의 시간, 무용수의 입안에서 왼쪽 오른쪽 위아래, 다시 치열을 고르며 워밍업을 시작한 혀뿌리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발음하며 낯선 움직임을 훈련한다. 혀의 운동은 이제 목으로, 어깨로, 손으로, 몸통으로, 다리로 이어져 온몸의 근육으로 퍼진다. 내장기관이 꿈틀댄다. 매끈한 얼굴 아래, 목구멍 뒤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던 혀의 존재를 의식하니, 댄서의 움직임이 다르다. 목구멍 너머의 세계를 온전히 고려하면서 바라보는 시간이 만드는 긴장감에 혀뿌리의 침은 마를 새가 없다. 척추동물의 입속에서 꿈틀대는 30㎝짜리 근육다발이 끌고가는 춤 앞에서, 이유가 있는 움직임이 비로소 아름답다는 것을 알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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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019, 영상, 30분34초 ⓒ무진형제, 아트스페이스 풀


멕시코만 바다에서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마침내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청새치를 낚아 올렸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가 보다. 그는 청새치의 살점을 상어 떼에게 고스란히 뜯기고, 앙상한 뼈만 매단 채 돌아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성공의 기억을 뒤로하고 노인은 피로한 몸을 뉘었다.


‘길 위쪽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작가그룹 무진형제는 나이가 들면 남을 따분하게 만들지 않는 현명한 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으로 적은 것을, 낡은 집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시작한 작업의 제목으로 삼았다.


오래된 집, 오래된 땅, 오래된 삶, 오래된 기억의 안팎을 엮어 나가는 영상 설치 작업 안에는 시공간 안에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이 쌓인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의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치밀하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의 주름진 살결, 깊게 휘어진 손가락에 가 닿았다. 말 그대로 ‘고목껍질’ 같은 노인의 피부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다. 이제 그는 격정의 시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것이다. 노동의 세월을 새긴 듯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우편물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고요하고 담담한 것이, 그저 이렇게 멈추어 있어도 좋겠다.


사람은 늙고, 땅의 쓸모는 변하지만, 그저 이곳에 그대로 있고 싶은 자의 마음은 가만히 있다. 그를 지켜보는 젊은이들은 늙은 자의 그 마음을 만났을까. 노인이 꿈꾸었을 ‘사자’를 만났을까.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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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7획, 2018, 캔버스에 템페라, 120×100㎝ ⓒ 송현숙, Zeno X Gallery


캔버스 천 위를 스치는 화가의 붓질은 또 다른 결을 만든다. 한때, 송현숙의 붓질은 삼베나 모시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빛을 거의 굴절시키지 않아 유화보다 맑고 생생한 색을 낸다는 템페라 특유의 딱딱한 색조가 식물성의 담백한 질감에 닿아 있었다. 이제 그의 ‘획’은 식물의 뉘앙스를 넘어 실크 특유의 동물성 광택마저 담는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하나의 붓질은 농사를 지으며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는 항아리의 형태가 되었다. 


안료를 달걀, 송진, 물과 기름에 혼합하는 시간, 그는 생각을 채우거나 비우기를 반복할 것이다. 곧 마주할 빈 캔버스 위로 기록할 숨결에 의미를 부여하고 걷어내기를 반복할 것이다. 어떤 결정을 마치고 나면, 또 하나의 손처럼 호흡을 맞춰 왔을 크고 납작한 붓을 들고 한 호흡에 한 획을 긋는다. 수정하기 곤란한 그 순간의 움직임이 한 번 살아내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결정들처럼 캔버스를 덮는다. 


그의 작품은 별도의 제목을 취하기보다, 호흡과 획이 스쳤을 숫자가 된다. 태어나면 소멸하고 마는 목숨들의 운명처럼, 단순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담백한 선택이다. 


그의 작업 과정을 기꺼이 ‘수행’이라고 이름 붙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생사의 속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예술에 집중을 하되, 세상과 일상을 외면하지 않으며 분노할 줄 아는 작가의 현실감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입으로 허무하게 설명하는 수행이 아니라 ‘화면’이 포착한 그 수행의 숨결은 쉽게 외면할 수 없다. 유기물과 무기물이 순환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곧 소멸할 인생을 반복해서 그으며 역사를 만드는 생명의 몸짓처럼, 획 하나에 모든 것을 내거는 일은 무겁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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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쥔 화가의 손은 우윳빛으로 매끄럽게 비어 있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가늠하다,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어느 지점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가볍게 짧은 빗금을 치고 시작점을 잡은 뒤, 선을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설원기, 2019-34, 2019, 폴리에스터 필름에 혼합재료, 61×46㎝ ⓒ설원기 이유진갤러리 제공


작은 쌀알 모양으로 출발한 선이 형태를 감싸고, 삼박자의 왈츠를 지휘하듯 일그러진 나선형을 그리면서 돌아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을 순간, 그의 선은 나선의 회전 궤도를 벗어나 화면을 가로지르고, 가느다란 실처럼 떨어져 멈추었을 것이다.


이제 화가는 검은 물감을 찍어바른 붓을 들어 다음 리듬을 만든다. 먼저 그렸던 선의 흐름은 이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처음 필름 위를 살피던 그 시점 그 눈으로 화면을 본다. 이번에 그의 붓은 왼편 위로 갔을 테다. 물감을 흡수하지 않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미끄러지며 붓은 유유히 굽이쳐 화면 아래로 내려왔을 것이다. 더 흐르기에는 검은색이 너무 투명해지기 바로 전, 다시 검은 물감을 입은 붓은 화면을 오르내리다가, 시작하던 그 지점 즈음에 올라갔을 때 멈추었을 것이다.


다시, 앞의 시간을 지운 화가는 흰 물감을 찍은 붓을 빠르게 화면으로 내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마도 다섯 번, 어쩌면 여섯 번. 그는 기꺼이 앞선 연필의 리듬과 검은 붓의 물결을 지웠건만, 이미 축적한 시간의 흔적은 그의 마지막 움직임에 개입하고 말았다. 흰 붓은 미처 마르지 않은 검은 물감을 잡아당겼으며, 마침내 화가가 붓을 뗀 화면 안에서 그는 과거의 어떤 ‘행동’도 숨기지 못했다.


각 단계의 움직임 간에 의도적인 조화로움을 만들지 않고, 각자 존재감을 갖기를, 이 화면이 특정한 ‘콘셉트’에 복무하지 않기를, “사소함이나 일상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무엇”의 상태로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한 화가의 바람은 나누고, 채우고, 찍고, 긋는 일을 통해 펼쳐졌으나, 구성의 균형을 살피고, 행위의 의도를 추적하려는 보는 자의 태도는 회화의 운명이거나, 두 눈을 가진 인간의 숙명이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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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울프스, 채색된 조각-조울증/사랑/진실/사랑, 2016 ⓒ조던 울프스, 데이비드 즈비너, 사디콜


2m 남짓한 꼭두각시는 정수리, 왼손, 오른발을 굵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앙 다문 이빨을 드러낸 소년의 얼굴을 한 이 인형은 1950년대 미국 어린이들의 폭발적 사랑을 받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하우디 두디쇼>의 마리오네트를 닮았다. 트러스의 도르래에 매달린 쇠사슬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인형의 팔이며 다리, 머리가 그에 따라 휘청거린다. 그는 사슬을 밀고 당기는 이의 손길에 따라 일어서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어느 순간, 거꾸로 매달려 허공을 휘젓던 그의 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사슬은 쉬지 않고 그의 몸을 흔들어댄다. 간혹 마이클 볼턴의 노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가 흘러나오면, 마리오네트의 움직임은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이 툭 끊어지는 순간, 사랑의 이름으로 대상을 동여맨 자의 폭력성은 더 역하게 드러난다. 


그는 비록 ‘인형’에 불과하지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꺾이는 그의 몸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다. LCD 모니터로 만든 그의 푸른 눈동자 뒤편에 심어 놓은 센서가 전시장 안에 들어온 사람의 움직임을 추적하며 시선을 맞춘다. 인형의 몸에 가해지는 진짜 폭력 앞에 노출된 관객들은 스크린 눈동자가 쏟아내는 눈빛에 섬뜩하다. 허공에 매달려 관객을 내려다보는 그가 “둘째, 너를 죽이고, 셋째, 너를 붙잡고, 넷째 피를 흘리고…”라면서 열여덟가지의 폭력적인 행동을 시처럼 읊조릴 때, 관객은 그의 모습에서 사탄의 인형 ‘처키’가 불러일으킬 법한 공포를 본다. 부자연스럽게 꺾인 몸통, 페인트가 벗겨진 얼굴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조던 울프슨이 애니메트로닉스 인형으로 제작한 이 작품 ‘채색된 조각’이 제시하는 공포의 시간은, 너무 많은 유형의 고통이 존재하는 이 세상,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의 액면을 난폭하게 드러낸다. 그 앞에서의 불편함은 보는 자의 몫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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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넷 마이네케 한슨, 앤드-유즈드 시티, 2019


세상을 향해 열린 눈은, 매 순간, 보았다는 사실마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과 마주친다. 볼거리들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온·오프라인에 차고 넘치는 것들을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루틴 안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과 목적으로 정보를 선택하고, 행동하는가. 그 선택은 어떤 영향력을 갖는가. 기술산업이 인간의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특히 인간의 신체를 어떻게 통제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덴마크 출신 작가 시드넷 마이네케 한슨은 가상세계, 로봇, 포르노 등의 소재를 통해 이 질문을 이어간다.


그의 작품 ‘앤드-유즈드 시티’에서, 모니터 앞에 선 관객은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눈에 비친 상을 본다. 게임 컨트롤러를 사용하여 화면을 클릭하면, 관객은 비로소 이 캐릭터가 본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그의 눈은, 마치 도시를 감시하는 요원처럼 도시 안의 풍경을 면밀히 훑고 컴퓨터로 만든 가상의 세계를 바라본다. ‘감시자’는 감시망 안에 포착당하고 싶은 마음과 그 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세상의 풍경을 스캐닝하고, 정보화하는 중일 터이다.


나의 정보는 소중하다며 무작정 감시를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감시자의 기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감시자가 정보로 접수하지 않은 정보는 이제 정보가치를 얻지 못하고,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세상에서 삭제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감시사회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이들과 자기 정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이들 양쪽의 심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돈벌이가 된다. 그 누군가는 세련된 노출 방식을 개발하고 운영하면서 ‘자본’으로 그들을 독려하고, 가장 난도 높은 보안 장치를 개발하여 정보 보안에 힘쓰는 이들로부터 돈을 벌어들이니, 개인의 모든 데이터가 수익 창출의 기반으로 작동하는 경제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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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세스 스튜디오, AImoji(ai-generated emoji), 2019 ⓒprocess studio


인공지능이 인간 세계에 가져올 변화에 대해 다룬 전시 ‘언캐니 밸류’의 전체 그래픽 디자인을 맡은 ‘프로세스 스튜디오’는 전시의 아이덴티티를 시각화하고 홍보하는 과정 안에 ‘이모지’의 세계를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로봇처럼 인간 아닌 존재에서 인간과의 유사성을 느끼면 호감도가 높아지지만, 그 유사성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호감은 불쾌감과 거부감으로 변한다는 이론 ‘언캐니 밸리’에서 제목을 가져온 이 전시의 메시지에 호응하면서, 그들은 DCGAN(심층 돌림형 생성적 적대 신경망)을 활용했다.


정보 생성자가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그것과 매우 유사하지만 가짜인 정보를 만들고, 정보 감별자가 그것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실제와 매우 유사한 대체재를 생산하는 이 독립적인 학습법 DCGAN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3145개의 ‘이모지’를 공부한 끝에 ‘AImoji’를 만들었다. 국가별 언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서 등장한 유니코드로 생산하는 이모지는 1999년, 구리타 시게타카가 ‘모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176개를 디자인하여 발표한 이래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언어로서 이모지가 차지하는 위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측에서 201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할 만큼 견고해졌다.


하지만 DCGAN은 이 노란 동그라미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안의 ‘표정’이 무엇을 전달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작가의 미션을 부여받은 DCGAN은 그저 주어진 정보를 학습해 나가면서 행복,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담은 듯 보이는 표정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DCGAN이 표현하고 싶은 감정일 리 없었다. 어떤 표정은, 한두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 때로는 끔찍해 보이기까지 하는 감정을 전달했지만, 그 역시 ‘인간’이 그 이미지에 투사하여 정의내린 감정일 뿐 DCGAN의 감정과는 무관했으니, 인간은 이제 세상을 읽고 판단하는 습관을 재고하고 조정해야 할 시점에 도착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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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택, 루핑 Loop, 2019, 종이에 아크릴채색, 칼로 자르기, 455×273㎝(사진촬영 조영하)


“네에, 그럼 그렇게 하시죠.” 도널드 트럼프처럼 직설적인 ‘말버릇’과 거침없는 태도로 살기에는 손에 쥔 것이 너무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라는 갑옷이다. 힘 있는 자가 겸손한 언행마저 갖춘다면, 그의 화술은 상급 레벨의 처세술로 칭송받을 것이니, 보통사람이라면 이 당연한 태도 위에 세련미와 재치까지 겸비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생존용 교양화술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박관택이 종이에 써내려간 화술은, 청유하거나, 이중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흐리거나, 계속 호응하거나, 동의하고 동일시하는 식이다. 상대를 은근히 높여주는 이런 화술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이 실전에서 사용하면 좋을 법하다. 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멘털만 온전하게 유지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상실감, 분노를 일깨우는 망언과 폭언은 다른 의미에서 대중을 설득하는 화술이다. 그러나 이 역시 가진 자의 무기일 뿐. 보통의 내가 상대의 신뢰를 얻고 청탁에도 성공하고 싶다면, 내 위치에 맞는 화술을 갖추어야 한다. 폐쇄형 질문으로 상대의 확답을 유도하고, 감탄하고 반문하고 비유하고 동조하면서 상대방의 동의도 유도해야 한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거절법, 설득법, 청탁법 같은 대화 매뉴얼은 다 쓸데가 있다. 


“그렇군요. 역시 그랬구나.” 상대를 부드럽게 긍정하면서 대화를 시작할 때 그는 ‘이득’을 볼 수 있다. 긍정의 화술은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킨단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등으로 시작하는 말은 오해나 문제의 소지를 불러올 수 있는 손해 보는 말하기라고 하니, 보통의 사람들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누구나, 때로는 단호하고 싶다. 그래봐야 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문장은 이 정도가 최선이겠지만.


“그렇긴 한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요?”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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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아부 함단, 사드나야, 2018, 사운드 설치


2016년 국제앰네스티는 작가 로런스 아부 함단과 함께 시리아 인근 다마스쿠스 북부의 군사감옥 사드나야에서 풀려난 수감자들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관리하고 있는 이 군사감옥에서는, 2011년 민주화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을 계기로 내전이 발발한 시점부터 2015년 말까지 반정부성향의 수감자 1만3000여명이 사망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그들에게 사치였다. 폭행과 고문에 시달리며 늘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지내야 했던 그들에게는 어떤 시각 정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귀가 정보를 수집했다. 어떤 날에는 쇠파이프에 맞은 동료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들어야 했고, 어떤 날에는 신체 일부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발소리는 빠를 때도, 느릴 때도 있었고, 음성의 데시벨도 경우에 따라 달랐다. 감옥의 각 방은 벽으로 견고하게 나뉘어 있었지만, 모든 공간을 지나가는 통풍구와 수도관은 공간 전체를 연결했다. 소리는 벽을 타고, 관을 타고, 사드나야를 흘렀다. 소리는 환경을 탐색하는 핵심감각이 되었다.


아부 함단은 ‘에코프로파일링 기법’을 사용하여 서로 다른 잔향의 음을 연주한 뒤, 오로지 소리로만 사드나야를 기억하고 있는 생존자들에게 이 소리가 실제로 감옥에서 들었던 소리와 일치하도록 방, 계단, 복도 등의 공간 크기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소리에 대한 기억을 활용해 교도소의 내부를 디지털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그렇게 사드나야의 잔혹한 실상을 담은 보고서가 세상에 발표되었다.


그 후 작가는 사드나야에 대한 작업을 이어갔다. 2011년 시위 직후 감옥에서 들리는 속삭임의 크기가 과거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낮아졌으니, 감옥이었던 곳이 사형자 수용소로 변했다는 의미를 담은 라이트박스를 설치했고, 건축 설계에서 사용하는 레이 트레이싱 방식으로 사드나야의 음향 흐름을 매핑하여 공간을 상상했다. 눈은 가릴 수 있어도 소리는 통제할 수 없었던 사드나야의 진실은 감출 수 없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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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블록, 모리츠 리제비크, 검열자들, 2018, 88분 ⓒ 한스 블록, 모리츠 리제비크


어두운 방, 밝은 모니터 앞에 앉은 이들은 ‘삭제’ ‘무시’라는 명령어를 반복하는 중이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어떤 것은 지워지고, 어떤 것은 살아남는다.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우리의 사고와 신체를 장악한 현재, 끝없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정보와 주장이 넘쳐나는 이 플로어는 모든 정보에 열려 있는 ‘해방구’인가.


독재자와 정치인을 희화화시킨 나체 그림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인기를 얻던 일마 고어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를 묘사한 그림을 게시한 후 페이스북에서 퇴출당한다. 시리아 전쟁의 심각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시리아에서 전쟁 중 사망한 난민 어린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 작가 칼리드 바라케의 이미지 역시 페이스북에서 삭제되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어떤 정보들이 꾸준히 지워지고 있었다.


2013년 한 소녀를 학대하는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확산되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사건을 목격한 후, 그 배후의 추적에 나섰던 모리츠 리제비크와 한스 블록은 비밀스럽게 활약 중인 ‘검열자들’을 찾아내고 그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검열자들은 필리핀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실리콘밸리로부터 콘텐츠 모니터링의 권리를 위임받은 그들은 가치중립성, 객관성을 숭배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유튜브에 올라오는 이미지들을 살피고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발견하면 삭제한다. 아동 포르노, 자살 동영상, 인종혐오, 테러 관련 동영상이 주로 그 대상이 되지만, 그 외의 콘텐츠도 ‘검열자’의 판단에 따라 삭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의견, 가치, 정치의 기류마저 흔들 수 있는 소셜미디어상의 결정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원하는 무엇이든 쓸 수는 있지만, 누군가의 잣대로 완벽하게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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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 로텐버그, 노 노즈 노즈(No nose knows), 2015, 싱글채널 비디오, 설치


애니메이션 캐릭터 스펀지밥의 단짝 친구 패트릭 스타는 백수다. 게으르지만 그런대로 살아가고, 어리석다는 세간의 평을 배반하듯 가끔은 난제를 얼렁뚱땅 해결해 버린다. 어느 날, 불가사리를 닮은 자신의 몸에는 다른 친구들에게 당연하게 붙어 있는 코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 성형수술로 코를 얻었다. 이제 그의 코앞에서 새 세상이 열렸다. 향수와 꽃다발의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향기로운 기쁨도 잠시. 그의 코는 음식냄새, 땀냄새를 견딜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고통에 빠졌다. 코가 없을 때 몰랐던 그 세계는 달콤하고도 역겨웠다. 그는 이제 코가 알려주는 세계를 포기할지 말지 고민해야 했다.


미카 로텐버그가 양식 진주로 유명한 중국 저장성 주지시의 진주공장에서 마주한 장면은 고통스럽고 매스꺼우면서도 아름답고 놀라운 과정을 담고 있었다. 진주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손은 진주조개의 부드러운 속살에 불순물을 밀어넣는다. 조개가 이 조각을 밀어내지 않고 품는다면 몇 년 뒤에는 진주가 탄생할 거다. 또 다른 여성들의 손은 진주의 희뿌연 내장을 헤집어 진주알을 골라내고, 물에 씻어낸 진주알 더미를 능숙하게 가르며 상품을 분리한다. 


영롱한 진주의 뒷면 비릿한 풍경을 목격한 로텐버그는 진주양식의 과정에 초현실적 이야기를 결합시켜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그보다 더 사실적일 수 없는 세상을 직조했다. 기계보다 빠르고 섬세하게 움직이다 잠시 지친 여인은 진주더미에 발을 묻은 채 작업대에 기대어 잠들고, 그녀의 발은 공장 너머 다른 세계로 삐죽 빠져나가 여유를 즐긴다. 공장 뒤편 어딘가 작은 사무실 작업대 앞에 앉은 금발의 백인여인은 꽃다발에 코를 대고 숨을 쉬는 일을 하는 중이다. 꽃향기를 맡은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처럼 거칠게 재채기를 하고, 그의 재채기는 면요리로 탄생한다. 보이지 않는 손들은 그렇게 생산에 열중했고, 작가는 이 세계를 애니메이션 <스펀지밥> 에피소드 제목을 따와서 ‘노 노즈 노즈(No nose knows)’라 불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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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반 데이비스 & 데이비드 힌톤, 달리는 혀, 2015, 디지털비디오, 28분 ⓒ시오반 데이비스 & 데이비드 힌톤


살아 있는 자의 혀는 언제까지 질주할 것인가. 그의 혀는 세상에 나온 이래, 인간계의 몸짓을 배우고, 모국어를 배우며 세상과 교류해 왔다. 더 빠른 혀, 더 능숙한 혀를 만나며 더 성장했다. 그러나 이 혀는,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누구의 의지로 달려나가는지 알아차렸는가.


안무가 시오반 데이비스와 영화감독 데이비드 힌톤은 ‘달리는 혀’라는 이름으로 22명의 무용가와, 사운드 아티스트, 애니메이터를 초대했다. 무용가들은 끊임없이 달리기만 하는 여인 ‘헬카 카스키’의 이미지를 받았다. 이제 그들은 프레임 안에 헬카의 인생을 써내려가야 한다. 각자 10초의 시간을 책임졌다. 무용가들은 프레임 안에 다양한 이미지를 콜라주해 넣었고 데이비스와 힌톤은 그들이 제시한 헬카의 인생샷들을 편집했다. 각 무용가가 콜라주한 10초는 헬카 인생의 짧은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인생 전체일 수도 있었다.


헬카는 22명의 무용가들이 각자 만들어 준 인생의 장면들을 달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지하철역, 주택가, 카페, 공원 등 런던의 익숙한 풍경 사이를 달리다 보니, 그의 혀는 성장을 거듭한다. 이웃 사람들의 일상을 스쳐 달려나가는 그는 하늘에서 갑자기 석탄비가 쏟아지거나, 먼지가 뿌옇게 차오른 장면 안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별빛 찬란한 들판 위를 달리기도 한다. 모두 그의 의지는 아니다.


헬카가 달리는 프레임 안의 세상은 22명의 무용가들이 각자 자기 선택을 담아 콜라주한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쉼없이 달리는 헬카는 덕분에 지나간 삶을 배우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겪는다. 고요함이 움직임보다 강한 순간을 만난다. 아주 작은 행동이 큰 무게와 변화의 핵심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번 선택이 다음 선택을 이끌어내며, 우리의 ‘비전’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헬카는 체험하고 있다. 비록 ‘일루전’의 세상 안에서 달리고 있을지라도.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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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고든, 24시간 사이코, 1993,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24시간. ⓒ더글러스 고든


하루하루 별일 없이 사는 것이 기적에 가까워 보일 만큼, 세상은 상상 이상의 사건 사고가 넘친다.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들, 잔혹한 결정들, 자기모순이 선명하지만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자비로운 비열하고 뻔뻔한 존재들에 둘러싸인 채 24시간 생활하다보니 어느 새, 윤리라든가, 상식, 사회질서가 견인하는 ‘올바른’ 가치는 나약한 개인을 통제하고자 강한 자들이 늘어놓은 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 도착한다.


이제 비일상은 일상이, 비정상은 정상이, 사악함은 선함이 되었다. 비상한 속도와 현란한 편집으로 전개되는 세상의 격랑에 휩쓸린 채, 보라는 것을 보고, 들으라는 것을 듣고,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면서 ‘나’를 방치한다. 나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기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거리가 필요할 텐데, 과연 그 의지를 세울 수 있을까. 속도를 놓친 뒤 차라리 포기하고 방치하는 나른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더글러스 고든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를 러닝타임 109분에서 24시간으로 늘어뜨려 선보였을 때, 관객은 영화사를 바꾼 명장면으로 칭송받는 샤워실 살인사건 앞에 1시간가량 노출되었다. 개인의 욕망을 따라 공금을 횡령해 피신한 마리온이, 낯선 모텔에서 머물던 하룻밤 사이 맞닥뜨린 비극 앞에서 관객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선과 악, 상식과 논리, 사회 통념을 떠올렸다. 공포에 휩싸였다.


히치콕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곁에 서 있는 인간적인 괴물을 제시하고자, 숏을 잘게 나누어 충돌시키고, 날카로운 음향효과를 사용하는 등, 온갖 영화적 장치를 사용하여 기획한 장면의 의도는 더글러스 고든의 손 안에서 뒤틀렸다. 초당 24프레임으로 흐르던 장면이 초당 2프레임으로 늘어지면서, 긴장감을 연출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리듬감은 무너졌고, 이미지가 한 컷 한 컷 드러나면서 공포를 조성하는 전략은 노출되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다. 히치콕이 통제하는 감정의 흐름에서 해방된 관객은 이제 더글러스 고든이 통제하는 시간 속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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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로, 무너진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2019, 1000×667㎜, 오프셋 리소그래피, 팬톤 실버 877U_, 큐리어스 매터 데지레 레드, 270g/m2


무너져내린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에 실패해서, 경쟁에 밀려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져서 무너진다. 믿었던 사람들과 세상이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비난해서 무너지고,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신념을 배반당해서 부서진다. 그 자신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망가진 상황에 내려앉기도 한다. 오류와 모순을 헤치고 나서려 해봐야 출구를 찾을 수 없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친구들은, 차라리 지금 여기 있는 내 존재의 명분을 설득하기 위해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늘이 무너지고 마음도 몸도 부서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나면, 서로의 어깨가 쓸모 있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도 무너진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삶의 바닥에 도달한 친구들이 보내는 신호와 징후를 알아차리고 위로할 수 있을까. 우리의 우정이 친구들의 마음을 끌어올려줄 수 있을까. 


크리스 로는 강력하고도 의미심장한 ‘편지’의 힘에 기대보기로 한다. 1년 동안 마치 일기를 쓰듯 자기 자신에게 팩스를 보내고, 그 팩스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한 작가는, 팩시밀리에서 통신수단 이상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전화기보다 더 먼저 세상에 등장한 이 기계 장치가 디지털화하기 번거로운 이미지와 텍스트를 전달할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시공간으로 감정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팩시밀리를 통해 친구와 감정을 교감하는 상황을 시각적인 시퀀스로 담았다. 기계를 통과한 손편지는 전기신호로 전환되어 친구의 팩시밀리에 도착한다. 우리의 감정도 팩시밀리 안에서 접히고 펼쳐지며 친구의 손에 닿는다. 이제 우리는, 친구가 편지에 담아 보내올 마음을 기다리며 팩시밀리를 지켜볼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 우리들에게 아직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팩시밀리 앞을 지키고 싶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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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희, 무제, 2014, 캔버스에 유채, 200×150㎝


어둠이 필요하다. 찬란한 빛이 쏟아내는 정보를 처리하며 세상과의 만남을 앞장서 주선해 온 두 눈의 수고로운 세월은 잠시 뒤로하자. 너무 밝은 빛은 오히려 눈을 가리는 법. 지금은 차라리 이 부지런하고 영민한 시각이 그간 축적해 온 경험을 내세워 판단하고 타협하고 수용할 여지를 줄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필요하다. 빛에 취한 망막에 기대고 싶은 그 어떤 가능성마저 온전히 차단당한 어둠 앞에 섰을 때, 동공은 더 크게 열릴 것이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나, 빛 없이 어둠을 말할 수 없다.” 빛에 제대로 닿고 싶다면 어둠을 파헤칠 일이다.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차라리 그 반대를 살핀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일은 종종 당혹스럽지만, 극과 극은 동전의 앞뒤처럼 닿아 있다. 극에서 극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면 집요해질 필요가 있다. 적당히 가다가는 그 사이에 갇히고 만다. 빛이 은폐한 ‘광명’에 닿지 못한다.


태양빛 아래에서 화가 도윤희는 반짝이는 대기 속에 부유하는 빛의 검은 잔상을 보았다. 대낮의 광선은 그를 표피 너머의 세계로 인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세계를 외면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무력감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의지’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다. 화가는 연필과 붓을 내려놓은 채 맨손을 캔버스 위에 올렸다. 예술가 자신이 예술작품이 되고 마는 ‘춤추는 몸’처럼 캔버스와 몸 사이의 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글을 쓰듯’, 손의 감각으로 색을 펼치며 빛의 장막을 파헤쳤다. 어둠은 경계를 지우고 자유를 주는 대신 두려움을 선사했다. 화가는 불안을 안은 채, 어둠이 독려한 감각에 기대 한 겹, 두 겹 빛의 장막을 들춘다. 반짝임이 튕겨내는 표피들을 걷어내는 데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끝에 화가가 도달한 세계는, 그림 안에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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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즐라 카메리치 & 안리 살라, 1395일의 흑백, 2011, 각 65분, 43분 46초 ⓒ밀로미르 코바체비츠 스트라슈니


색깔 있는 옷은 입지 말 것. 화려한 색은 건물 꼭대기 곳곳에 몸을 숨긴 채 거리로 총구를 겨눈 저격수에게 손쉬운 타깃이다. 일상을 사는 시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를 걷는다. 어느 날은 3777발의 포탄이 시내로 떨어졌다. 건물 아래 골목길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다가 한 사람씩 거리를 가로지르며 목적지로 달려간다. 그렇게 그들,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시민들은 매 순간 죽음을 각오하는, 길 위에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1395일을 살았다.


이슬람교인 보스니아계, 세르비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보스니아가 갈등에 휩싸인 것은 서로가 다른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세르비아계는 그들과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다른 민족을 ‘청소’하기로 한다. 그들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한 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유엔에 따르면 사라예보에서는 1992년 4월5일부터 1996년 2월29일 사이, 시민이 43만5000명에서 30만명으로 줄어들었고, 1만명이 살해되고, 5만6000명 이상이 다쳤다. 학교, 도서관 같은 도시의 공공건물, 기반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집들도 한없이 파괴되었다.


참담한 시절은 어떻게든 마무리되었으나 거리는, 도시는 그 참혹함을 기억했다. 예술이 상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떤 태도에서 출발해야 할까. 


보스니아 출신의 작가 세즐라 카메리치와 알바니아 출신 작가 안리 살라는 이 역사를 각자의 관점으로 카메라에 담아 두 편의 영상을 제작했다. 골목에 몸을 숨긴 채, 거리로 달려 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은 어쩐지 담담하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이니까. 다음 골목에 안전히 도착한 그들은 가쁜 숨을 내쉰다. 오늘도 살았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언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계속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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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거스턴, 스튜디오, 1969, 캔버스에 오일, 180.3×186.1㎝



“필립 거스턴은 너무 감동적이에요. 그의 작품을 보면서 계속 작업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받았어요.” 


좋은 그림을 만났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미술계 지인들이 필립 거스턴(1913~1980)에 대한 무한 애정을 고백했다. 화가로서 그가 보여준 집념, 선택을 보면서 예술가는 누구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유대인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름 ‘골드스타인’ 대신 ‘거스턴’을 사용하면서, 잭슨 폴록 등과 함께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화가로 활동하던 그는, 화면의 순수함과 평평함을 추앙하던 당시 주류 미술 담론 안에 온전히 있었다. “순수함에는 이제 염증이 난다. 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시 화단의 분위기상 추상화라는 대세에서 비켜나와 화면 안으로 형상을 돌려놓은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순결함을 요구하던 세상에서 벗어나, 신비화를 지워버리고 만화 같은 형상 안에 유머, 폭력, 그로테스크한 우화를 담아갔다. 그의 그림은 스캔들을 낳았다. 촉망받던 예술가는 추상미술의 배신자가 되었고, 불쾌감의 대상이 되었다.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못 그리는 척한다는 비아냥 섞인 평도 들어야 했다. 


그의 예술세계가 극단적으로 변한 것을 두고 세상은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어린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자살, 형의 사망 같은 개인적 비극이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모든 것을 바꿔놓은 한 해’로 평가받는 1968년 전후, 정치·사회·문화적으로 격변하는 세상 안에서, 특정한 대상을 향하지 않고 메시지를 삭제하는 ‘순결한’ 캔버스를 부여잡고 살아가는 일 자체로부터 느꼈을 화가의 무기력함도 이야기한다. 


의심과 두려움, 갈등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았던 화가는 그림 안에서 끊임없이 예술가 자신을 분석하고 이야기를 건넸다. 세상의 눈과 세간의 평가는 내 몫이 아니니, 그런 것은 뒤로한 채 그저 그렸다. 


그의 선택이 세상과 제대로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많은 예술이 그렇듯이 그의 시도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한발짝 늦게 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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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미, 이승/저승, 2019, 서울시립미술관 안은미래 전시장면 ⓒ복코


관계는 상대적이다. 너는 그가 세상에 다시없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가 있다면,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가 만드는 관계는 달라질 수 있겠다. 다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옷이 너에게 찰싹 달라붙는 걸 보며, 내가 멀리하는 음식이 너에게는 보약이 되는 걸 보며, 나에게 추억을 소환해주던 물건이 네 손에 들어가서는 주저 없이 쓰레기가 되는 걸 보며 세상은 온통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전시장에 빼곡한 비치볼은 내 발목 근처에서 오종종 굴러다녔다. 네댓 살쯤으로 보이는 꼬마가 들어 올리자, 가슴팍으로 한아름 안겨든다. 비치볼이 더 이상, 내 무릎 아래에서 보았던 것처럼 작지 않다. 오히려 제법 크다. 비치볼은 아이의 품 안에서 상대적으로 아름다운 비례미를 과시했다. 기준은 내가 아니었다. 안은미래의 전시장 한가운데 넓게 펼쳐진 하얀 플로어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받아줄 기세였다. 훈련된 전문가의 몸은 이곳을 무대로 만들었다. 조명을 입은 몸짓이 흥겹다. 다른 날 그 몸이 프로덕션 리허설을 진행하자, 이제 무대는 연습실이 된다. 플로어는 훈련되지 않은 몸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들은 플로어 위에서 ‘춤을 공유하고 배우고 놀아’보는 중이다. 음악이 그들 움직임의 빈 곳을 스르르 채워준다. 물리학자가, 평론가가, 건축가가, 미술가가 올라서니, 청중은 앉아서 그의 말을 경청한다. 플로어는 무리 없이 강연장이 되었다.


고요하게 텅 비는 어느 날이면, 누구라도 플로어 위에 올라가, 무엇이라도 하거나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 조명이 돌고 음악이 흐르고 몸이 진동하는 플로어는 ‘전시장’이 늘 ‘전시장’이어야 할 이유가 그다지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과정’이 ‘결과’가 아닐 이유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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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 마스크, 1960년대, 18×18×11㎝, 테라코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년 전 것이 있지요.”


권진규(1922~1973)는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기대할 수 있고, 결정적인 순간에 딴 사람에게 마무리 손질을 맞길 일이 없는” 테라코타를 사랑했다.


미술품 복원가 김겸이 확대경을 끼고 권진규의 테라코타 내부를 들여다보았던 경험을 남긴 칼럼을 보니,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초상이 보인다. 대개의 점토작업이 수제비를 뜨는 정도의 밀가루 덩어리 크기로 점토를 떼어내 매만지는 데 반해 권진규는 작은 콩알만 한 크기의 점토를 붙여가며 형상을 빚고 있었단다. 이 전문가는 작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살아 움직일 듯한 생명의 긴장감이 “고집스럽게 심어 넣은 작은 생명체의 떨림”에서 오는 것인 아닌가 경탄한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건만, 한국조각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며,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개탄하던 이 조각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전국의 사찰을 돌며 한국조각에 결여되어 있는 그 구조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서구의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조형이념은 그들의 골수에 뿌리박은 사상, 생활감정을 집약하여, 그 전통을 바탕으로 나온 것임을 상기하며, 그들이 지향하는 예술 흐름 속에 우리 창작의 초점을 맞춘다면 영원히 그들의 뒤만 좇는 자기상실자가 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작가가 하회탈, 병산탈과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의 부조작품을 탐구하며 찾아낸 형태를 녹여낸 테라코타 마스크와 눈을 맞춰 본다. 사람의 눈을 피해 변장하고, 가장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발언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마스크를 만들며 작가는 숨어들거나, 뛰쳐나가기를 반복했겠지. 


그의 유작을 두고 유족과 미술관 사이 갈등이 불거지고, 송사가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새삼스럽게,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가 꿈꾸었을 비전에 접속해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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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빈, 분수의 꼭짓점, 하늘 그리고 기타 등등, 2019, 스티로폼, 레진, 핸디코트, 안료, 유화, 90×45×210㎝ 두산갤러리 제공


‘분수’는 물의 판타지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숙명으로 알았던 물이 모처럼 하늘로 솟아오른다. 분수의 힘에 의지해 시원하게 하늘을 가르지만, 중력과 속도의 영향을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정점에 다다르면 이내 땅으로 쏟아져 내린다. 하늘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는 물줄기를 보며 권현빈은 물방울이 가장 높이 치솟아 ‘하늘을 톡톡 치는’ 순간에 시선을 멈췄다. 물방울이 분수의 꼭짓점에 닿는 순간은 너무 짧다.


정점은 한계점의 다른 말이다. 정점에 도달하면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물줄기는 세상을 움직이는 커다란 법칙을 전한다. 간혹 어떤 물방울은 변수를 만나 정해진 동선에서 벗어나거나, 조금 더 높은 하늘을 찍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물방울도 결국은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분수의 포물선 위로 서로 다른 물방울이 쉼없이 교체되고 있으니, 모든 물줄기는 다 다르다. 물줄기들을 지켜보며 작가는 거의 비슷해 차이를 읽어낼 수 없는 장면들, 그 사이에서 우리가 놓치는 감각들을 떠올려 보았다. 유사함을 같음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감각은 세상의 미묘한 차이가 가져오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다. 집중해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는 체적의 98%가 공기고 단지 2%만이 수지로 이루어진 스티로폼에 분수가 포물선을 그리던 어느 날의 풍경을 담았다. 하얀 스티로폼 위로 포물선이 지나가고, 하늘이 비치고, 구름이 파고들었다. 높이 솟구쳤다 떨어져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물방울이, 거품으로 부풀려 물보다 가벼운 스티로폼에 흔적을 남겼다. 좀처럼 썩지 않아 자연의 생리를 거스르는 스티로폼이 물과, 하늘과, 바람의 흔적을 기억하니, 사라지는 것과 남아 있는 것은 기억 가능한 세상, 예측 가능한 세상 밖으로 천천히 뻗어나간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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