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설이라도 다가오는 모양이다. 닭 한 마리씩을 챙긴 장 보따리가 꽤 묵직하다. 아낙의 치마 무늬마저 지울 기세로 눈발은 더 굵어진다. 밤새 쌓이고 나면 봄이 올 때까지 쉬 녹지 않을지도 모른다. 1983년 겨울. 지금 봐도 그 시절 옷차림은 꽤 시리다. 여름 빼고는 철을 가리지 않고 쓰던 나일론 스카프에 장날이라 챙겨 입었을 면빌로드 치마로 겨울을 나던 때였다. 장갑을 끼는 둥 마는 둥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도 머리에 인 보따리는 흔들림이 없다. 눈이 와서 해가 더 빨리 지는 오후, 불현듯 마중 나온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운 듯 웃는 표정은 코끝 찡하게 춥던 그 시절을 그립게 만든다. 더불어 인적 없는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사진 속에 담기지 못한 사진가까지도.
이 사진은 고 권태균 선생의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눈빛출판사에서 내놓은 사진집 <노마드>의 첫 장에 실렸다. 제목처럼 1980년대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유랑하듯 쏘다니며 기록한 사진들인데, 특히나 이 장면은 그의 고향 의령에서 찍었다. 환갑을 맞이하던 지난해 정초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권태균 선생의 이력은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다. ‘마당’이며 ‘샘이깊은물’처럼 값진 잡지가 전성기를 누리던 1980년대를 포함해 가장 오랜 기간 현역에 머문 사진기자이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발품을 팔아 80년대 이후 사람과 풍경을 기록해온 다큐멘터리 사진가이기도 하다. 지나온 시간들은 모두 애틋하지만, 그가 사진으로 붙들어 둔 과거는 그 애틋함을 넘어서는 운치와 따듯함마저 담겨 있다. 풍모는 선비처럼 점잖은데 말투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였던 선생이 찍은 덕분일 것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