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 캔버스에 오일, 90×68.5㎝, 1894~1895년
서울 인사동에서 우연히 유명가수 C씨의 그림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다. 평소 유명인의 전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탓에 그저 그런 아마추어의 전시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가수의 작품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분명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바로 ‘감정’이었다. 좀 진부한 방식이긴 해도 그는 페이소스가 있는 자신의 대중가요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줄 알았다. 사실, 감정을 잘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예술작품은 꽤 근사해진다. 화가들조차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미숙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미술사에서 뭉크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적극적으로 노출한 화가는 없다. 뭉크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과 절망과 우울을 고스란히 작업에 투사했다. 사실 뭉크만큼 가족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한 화가도 드물다. 유년시절부터 폐결핵으로 엄마와 누이를 잃고, 이어 정신병에 걸린 여동생, 아버지, 남동생의 죽음까지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죽음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평생 불안과 공포로 떨게 했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솔직히 표현하는 방법으로 죽음의 공포와 맞섰다.
특별히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여성에 대한 혐오로 드러난다. 여자를 매료시킬 만한 출중한 외모를 가졌던 그는 만나는 여자마다 자주 싫증을 내고, 먼저 결별을 선언했다. 뭉크에게는 “내가 사랑하면 죽는다”라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이 작동했던 것. 더불어 그는 여자는 두 종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 혹은 살로메 같은 팜므파탈! 그리고 이 두 여성상이 한 이미지에 투영된 작품이 ‘마돈나’ 삼부작이다. 이 작품은 뭉크를 배신한 고향 친구 다그니 유을을 모델로 했지만, 그의 곁을 스쳐 간 어머니, 누이, 첫사랑, 다그니 등 뭉크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은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버무려져 있는 듯하다. 뭉크에게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그림이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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