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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뿌리 혹은 먼지


줄리엣 콘로이(Juliette Conroy), 디스인티그레이션(Disintegration)(출처 :경향DB)


이것은 실뿌리다. 땅속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가능한 한 기다랗게 자라던 중이었다. 찰지지 않고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땅은 살아남기 위해 실뿌리로 하여금 악착같이 잔가지를 치도록 부추겼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뿌리째 뽑혀 나와 끝을 맞이한다. 이제 땅 위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이 시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나마 서서히 썩어들어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다.

아니다, 이것은 먼지다. 마른 땅에서 피어난 흙이며 살갗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이며 온갖 쓸모없는 것들이 뒤엉켜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세포처럼 자그맣더니 점점 자라나 주변의 모든 잉여물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창틀에서 악착같이 한데 뭉쳐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실뿌리처럼 자라날 것이다.

마이크로 렌즈로 최대한 근접해 촬영한 사진은 쉽게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줄리엣 콘로이의 ‘디스인티그레이션’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것들을 상징한다. ‘풍화’와 ‘분해’라는 의미를 같이 갖는 제목부터가 이런 착각과 혼란을 노린다. 어쩌면 이것은 뿌리가 될 먼지, 먼지가 될 뿌리일 수도 있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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