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고 낡은 목욕탕 안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물함과 텔레비전, 냉장고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손님이 줄었거나 혹은 자판기라도 들여와서 퇴역했을 냉장고는 본연의 임무 대신 텔레비전 받침대로 사용된다. 플러그가 꽂혔던 왕년에는, 목욕을 마친 꼬마들이 저 냉장고에 뽀얀 얼굴을 들이밀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바나나 우유와 딸기 우유 사이에서.
서울의 목욕탕, 산호탕 ⓒ박현성
사진책 <서울의 목욕탕>(6699프레스, 2018)에 담긴 장면 중의 하나다. 책은 서울에 위치한 30년 이상 된 목욕탕 10곳의 일상적인 풍경과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집해 전달한다. 시간의 무게에 부서지고 허물어지는 목욕탕의 외관에서, 대야와 앉은뱅이 의자 등 더 이상 새것으로 바뀌지 않을 목욕탕 기물에 묻은 손때까지 모두 사진에 살뜰하게 담겼다. 그 이미지들은 이곳이 내일 사라질 것이다, 현실을 일러주는 동시에 이곳이 어제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 같다, 환상을 부풀린다.
그러나 내일의 현실이든 어제의 환상이든, 개의치 않을 서울의 목욕탕은 오늘도 ‘목욕합니다’와 ‘매주 수요일 정기휴무’ 사이에서 변함없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러한 목욕탕의 일상을 가만히 멈춰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사진책에는 특별한 일화도 없고,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바람 잘 날 없는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홀가분하게 들어서는 목욕탕의 미덕처럼.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