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벨리니, ‘성모자상’, 목판에 유화, 1487년
서구 미술관에 가면 성모자상이 넘쳐난다. 그래서인지 모자관계의 가장 이상적인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이 도상은 더 이상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다. 성스러운 모자관계,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헌신적인 사랑 등등의 레토릭이 일종의 클리셰(Cliche·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데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자상에 흥미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이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겐 엄마가 불안한 존재이고, 알 수 없는 여자이며, 자식을 돌보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최성기의 화가 조반니 벨리니는 성모자상을 많이 그린 화가 중 하나다. 그는 왜 그렇게 성모자상에 집착했던 것일까?
먼저 벨리니의 성모자상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딱딱한 형태감과는 달리 베네치아화파만이 가진 빛에 대한 부드럽고 섬세한 색채 감각이 돋보인다. 마돈나는 더욱 유려하고 아름다워진 느낌인데, 그게 다가 아니다. 어딘지 베일에 가려진 듯 훨씬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분위기다.
벨리니의 전기를 보면,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냈으며 어머니의 유언에도 자기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정신분석학자들로 하여금 벨리니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닌 계모였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그래서 벨리니가 그린 성모자상에서는 아기 중심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주이상스(Jouissance·열락)를 즐기는 어머니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 이 그림 속 예수는 처연한 표정으로 자기에게 관심 없는 마리아에게 간청하고 있다. 자기를 좀 봐달라고, 사랑해달라고.
어쩌면 벨리니를 포함해 끊임없이 이런 그림을 그리는 ‘아기로서의 화가’들은 때로는 실존적인 어머니를 보여주고 때론 이상적인 어머니를 보여준다. 미술관에 그토록 수많은 성모자상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근원적 노스탤지어에 인간이 얼마나 목을 매는지 알게 된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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