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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현기증

기륭전자 옛 사옥 앞, 2010년 ⓒ조재무


어지러운 전깃줄에 걸린 현수막 구호가 더없이 어지럽다. 검은 실루엣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없어 어지럽다. 어지러운 구호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어지러운 사내는 송경동 시인이다.

 

포클레인 위에서 어지러운 구호를 외치던 시인은 땅으로 어지럽게 곤두박질친다. 그는 기륭전자 옛 사옥 앞에서 해고노동자의 단식농성장을 부수려 했던 포클레인을 막고 12일 동안 밤샘 농성을 했다. 2010년의 일이다. 그해 11월,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됐던 기륭의 노동자들은 1895일간의 복직투쟁 끝에 사측과 정규직 고용에 합의했다. 그에 따라 노동자 10명은 2013년 5월부터 출근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고, 같은 해 12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무실을 옮겼다. 야반도주나 다름없었고, 당연히 임금이 지불되지 않았다. 이후, 노동자 10명의 임금 2억여원을 체불한 혐의로 기소된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2005년부터 2017년까지 기륭의 해고노동자들은 고공농성 3회, 국회 점거투쟁 2회, 집단 단식 94일, 오체투지 등 그들의 표현대로 ‘죽는 것 빼고는 다해 본 투쟁’을 거쳐 왔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세월과 최 회장의 1년을 견주니 현기증이 난다. 사람이 사람답게 일할 수 없는 현실에 공모하는 세상은 뒤엉킨 전깃줄과 읽을 수 없는 구호, 알 수 없는 사내보다 더없이 어지럽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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