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고흐가 파리로 나왔을 무렵, 파리는 온통 일본문화(Japonism)에 열광하던 시기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일본문화를 접한 유럽인들에게는 경이의 그것이었다. 전에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과 입체적인 화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회화, 단순한 면과 밝고 맑고 그러면서도 화려한 채색 등은 1870년대 파리의 문화계와 사교계를 강타했다.
하지만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 취향 그리고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화가들은 이미 한 둘이 아니었다.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Pierre Bonnard, 1867~ 1947)등의 화가뿐만 아니라 귀족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포니즘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일본열풍을 뒤늦게 접한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문화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감각은 정신적 환희를 느낄 만큼 즐겁고 기쁜 것이었다.
특히 당시 인상주의자들이 발전시켰던 과학적인 색채론을 공부하고 있었던 고흐는 동생 테오 덕에 알게 된 화방 주인 탕기 아저씨에게서 건네받은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고향 네덜란드의 준데르트(Zundert)나 런던과 헤이그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그림이었다. 캔버스나 서양의 두툼한 화지(Carton)와는 다른 얇은 일본종이(和紙)에 인쇄된 다색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대담한 구도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는 어둡고 칙칙한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그리고 있던 고흐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고흐의 그림은 밝고 격정적인 색채로, 필촉은 더욱더 감각적으로 움직였고 전체적인 느낌은 경쾌해졌다.
그 중에서도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1797~1858)의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고목이 된 매화나무가지에 봄바람이 불어오자 성기게 매화가 피어난 그 사이로 사람들이 봄나들이를 나와 매화 향에 취해 있는 모습이다.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파리에서도 기후 때문에 볼 수 없는 이런 풍경은 그를 매료시켰고 그래서 그는 이 우키요에를 당장 그려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전 다른 종이에 가로 17줄 세로 27줄의 모눈종이를 만들어 그 안에 원화를 조금도 틀리지 않게 옮겨 그려본 다음 이를 다시 캔버스에 옮겼다. 그런데 캔버스의 비례와 원화의 비례가 맞지 않아 좌우측에 여백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좌우 여백을 주황으로 칠하고 그 위에 한자로 된, 뜻도 모르는, 심지어 틀린 글자지만 정성껏 써 넣은 것이 아니라 그려 넣었다. 이것이 <꽃 핀 자두나무>(The Flowering Plumtree, 1887, 유화, 73X54cm, 반 고흐미술관)이다.
고흐의 우키요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지나칠 정도였다. 그는 자신에게 유키요에의 남다른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알려준 탕기아저씨의 초상화 3점 중 2점의 배경에는 우키요예로 가득 채웠다.
고흐가 그린 <탕기아저씨의 초상>(Le Pére Tanguy, 유화, 92×75㎝, 1887, 니아르코스 컬렉션, 로댕미술관, 파리)에는 밀짚모자를 쓴 탕기아저씨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림의 배경은 후지산과 벚꽃나무와 일본 기녀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우키요에 4점이 배경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그려진 우키요에는 당대 최대의 문중을 이끌었던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가 그린 <후지36경 사가미강,富士三十六景さがみ川>, <53차명소회석약사,五十三次名所会石薬師>,<삼포옥의 다카오, 三浦屋の高尾> 등 3점과 케이사이 에이센(渓斉英泉, 1790~1848)이 그린 <기녀,花魁>이다.
이 초상화에는 고흐가 관심을 보인 비대칭의 테두리, 그림자나 원근법을 무시하고 양식화한 인물, 단색의 배경은 일본 판화의 특징과 일치한다. 그리고 배경의 노랑, 초록, 빨강과 탕기의 푸른색 재킷은 원색을 강하게 대비시키며 강한 화면의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고흐는 이 작품에서 자연 그대로의 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함으로서 대상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색을 선호하는 표현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화려한 우키요에를 뒤로 하고 있는 탕기아저씨의 모습은 소박하고 선량한 인품과 사람 됨됨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 보다 조금 크기가 작은 다른 한 점의 <탕기아저씨 초상>(Portrait of Pere Tanguy, 1887~88, 유화, 65x51 cm. 개인소장, L.A. 미국)에도 거의 같은 우키요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탕기아저씨네 화랑에서 판매를 위해 걸려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또 하나의 탕기아저씨는 <탕기아저씨의 초상>(Portrait of Père Tanguy, 유화, 47x38.5cm, 1886~87 겨울, 니 칼스베르크 미술관, 코펜하겐) 2점의 초상화와는 다른 형식인 정통적인 초상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역시 이해심 많고 인정 있는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한 점의 드로잉이 있는데 이 초상의 배경에도 역시 <후지36경 사가미강>이 자리하고 있다.
테오와 함께 지내던 고흐는 탕기아저씨의 소개로 새로 문을 연 카페 탕부랭(Café du Tambourin)을 알 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네 번째 연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카페의 주인이자 화가 코로(Jean 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 마네(Manet),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모델이기도 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이다. 독특하고 이국적인 옷차림과 미모를 지녔던 그녀는 단숨에 고흐의 넋을 뺏고 만다. 여기에 그녀 또한 고흐의 정물화를 갖고 싶다고 하며 관심을 보이자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887년 초 파리에 온 지 불과 1년 남짓 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의 책과 에도시대(江戸時代) 우키요에 최대문중이었던 우타가와파(歌川派)의 작품 등 우키요에를 수집했다. 그는 이 우키요에 소장품을 가지고 그녀의 카페 탕부랭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곳에서 전시되었던 우키요에들은 암스텔담의 국립고흐미술관에 소장된 430여점의 판화 중 대부분 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전시기간동안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화>(Agostina Segatori Sitting in the Café du Tambourin, 1887, 유화, 55.5x46.5cm)에도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원탁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후에도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꾸준히 나타나는 우키요에를 발견할 수 있는데 1888년 12월 23일 아를에서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고갱과의 공동생활을 하다 끝내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자학적인 행동이후 그린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유화, 60.5x50cm, 코털드 인스티튜드, 런던)에도 화면의 배경 오른 편에 후지산을 배경으로 기모노 입은 여인을 그린 우끼요에가 걸려있는 모습을 그렸다.
고 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98
고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의 세부. 뒷편에 우키요에 이미지가 보인다.
이렇게 고흐의 화가로서 인간으로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탕기아저씨는 고흐가 세상을 떠난 4년 후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화방에는 오늘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된 고흐는 물론 세잔, 베르나르, 고갱, 피사로 등등의 그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탕기아저씨의 화방에서 발견된 세잔, 베르나르, 로트렉 등의 작품. 이들은 서양근대미술사를 다시 썼다.
결국 그가 사랑하고 후원했던 화가들이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듯 그 또한 그림을 가졌을 뿐 팔지 못하는 비록 상재 면에서는 부족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눈이 밝은’화상이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미르보의 소개로 그를 이어 인상파 화가들의 또 다른 후원자가 된 볼라르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근대미술의 여명을 여는 중요한 화상으로 등극한다.
사실 오늘날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하찮게 여기고 외면했던 시절 그들의 그림을 일찍이 밝은 눈과 애정으로 바라보고 이들을 지원하며 작품을 보관했던 탕기아저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탕기아저씨는 당시의 화가들에게도 ‘아저씨’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감동적인 그림들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저씨’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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