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무엇 연필을 쥔 화가의 손은 우윳빛으로 매끄럽게 비어 있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가늠하다,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어느 지점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가볍게 짧은 빗금을 치고 시작점을 잡은 뒤, 선을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작은 쌀알 모양으로 출발한 선이 형태를 감싸고, 삼박자의 왈츠를 지휘하듯 일그러진 나선형을 그리면서 돌아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을 순간, 그의 선은 나선의 회전 궤도를 벗어나 화면을 가로지르고, 가느다란 실처럼 떨어져 멈추었을 것이다. 이제 화가는 검은 물감을 찍어바른 붓을 들어 다음 리듬을 만든다. 먼저 그렸던 선의 흐름은 이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처음 필름 위를 살피던 그 시점 그 눈으로 화면을 본다. 이번에 그의 붓은 왼편 위로 갔을 테다. 물감을 흡수하지 않.. 더보기 이전 1 ··· 125 126 127 128 129 130 131 ··· 104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