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쥔 화가의 손은 우윳빛으로 매끄럽게 비어 있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가늠하다,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어느 지점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가볍게 짧은 빗금을 치고 시작점을 잡은 뒤, 선을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설원기, 2019-34, 2019, 폴리에스터 필름에 혼합재료, 61×46㎝ ⓒ설원기 이유진갤러리 제공
작은 쌀알 모양으로 출발한 선이 형태를 감싸고, 삼박자의 왈츠를 지휘하듯 일그러진 나선형을 그리면서 돌아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을 순간, 그의 선은 나선의 회전 궤도를 벗어나 화면을 가로지르고, 가느다란 실처럼 떨어져 멈추었을 것이다.
이제 화가는 검은 물감을 찍어바른 붓을 들어 다음 리듬을 만든다. 먼저 그렸던 선의 흐름은 이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처음 필름 위를 살피던 그 시점 그 눈으로 화면을 본다. 이번에 그의 붓은 왼편 위로 갔을 테다. 물감을 흡수하지 않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미끄러지며 붓은 유유히 굽이쳐 화면 아래로 내려왔을 것이다. 더 흐르기에는 검은색이 너무 투명해지기 바로 전, 다시 검은 물감을 입은 붓은 화면을 오르내리다가, 시작하던 그 지점 즈음에 올라갔을 때 멈추었을 것이다.
다시, 앞의 시간을 지운 화가는 흰 물감을 찍은 붓을 빠르게 화면으로 내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마도 다섯 번, 어쩌면 여섯 번. 그는 기꺼이 앞선 연필의 리듬과 검은 붓의 물결을 지웠건만, 이미 축적한 시간의 흔적은 그의 마지막 움직임에 개입하고 말았다. 흰 붓은 미처 마르지 않은 검은 물감을 잡아당겼으며, 마침내 화가가 붓을 뗀 화면 안에서 그는 과거의 어떤 ‘행동’도 숨기지 못했다.
각 단계의 움직임 간에 의도적인 조화로움을 만들지 않고, 각자 존재감을 갖기를, 이 화면이 특정한 ‘콘셉트’에 복무하지 않기를, “사소함이나 일상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무엇”의 상태로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한 화가의 바람은 나누고, 채우고, 찍고, 긋는 일을 통해 펼쳐졌으나, 구성의 균형을 살피고, 행위의 의도를 추적하려는 보는 자의 태도는 회화의 운명이거나, 두 눈을 가진 인간의 숙명이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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