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체 바리니, 네 개의 푸른 동그라미, 2017, 오스나브뤼크 마르크플라자, 독일, ⓒ펠리체 바리니
펠리체 바리니가 도시 곳곳, 그러니까 건물 바깥의 길, 벽, 지붕, 유리창, 아니면 쇼핑몰이나 사무실 내벽과 천장, 복도에 기하학적인 패턴을 그려넣은 것은, 사람들을 모두 어떤 단 하나의 자리에 세우고, 단 하나의 장면을 목격하게 만들어서 그들의 감탄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물론 작가가 설정해 둔 어떤 위치를 찾아 그곳에 선 자는, 공간 곳곳에 흩어져 있던 페인트 자국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완성하는 꽤 스펙터클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별 의미 없이 조각난 듯 보이던 색면이 마법처럼 하나의 형태로 모이는 지점을 발견하는 순간, 관객은 3차원 공간이 그 패턴으로 인해 입체감을 상실하고 평평해 보이는 경험을 한다. 작가는 그렇게 관객들이 건축과 도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단다.
그러나, 작가는 관객 모두가 이 하나의 자리에 서서 바로 그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동서고금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갖는 의미로 자주 언급하는 바로 그 의미, ‘일상을 새롭게,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만나는 경험은 조각난 페인트 자국이 흩어져 있는 공간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전에 없던 선들을 툭툭 마주치는 관객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과 다른 느낌으로 공간을 경험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그가 ‘큰 그림’을 그린 건 맞지만, 여기에는 관객의 동선과 관점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없으니, 어떤 위치에 서고, 어떤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느냐는 오롯이 관객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거다. 그래서 관객들은 늘 그랬듯 무심하게 공간을 배회해도 좋다.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내 위치에 따라 자꾸 변하는 풍경 속 패턴의 향연을 만끽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작품을 즐기든 말든 그의 설계 안에 갇혀 통제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눈을 굴려보지만, 그 답은 외면하고만 싶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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