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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미장제색

배종헌, 의 일부분, 2019, Oil on birch plywood, 112.5×200×25.4㎝


‘미장산.’ 그곳에는 나무가 있고, 길이 있다. 물과 바람이 부지런히 산세를 스치니, 봉우리는 높아지고, 계곡은 깊어진다. 우거진 푸른 숲, 길게 솟은 나무며 바위 틈새로 청명한 기운은 고요히 가라앉고, 계곡 위로 시선을 내린 ‘보는 자’는 흐르는 물에 마음을 잃는다. 이제는 ‘숲에 내린 달빛에 가야 할 길을 물을 때’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도로에서 배종헌은 몇 개의 터널을 지났을까. 흙이며 회, 시멘트를 바르는 미장이의 손길이 만들었을 벽, 천장, 바닥, 그 터널의 표면에 들러붙은 ‘먼지’, 시멘트의 균열이 눈에 들어와 풍경이 되던 날, 풍경을 지나 ‘산수’가 되던 날, 어쩌면 그의 눈은 아무것도 안 보았을지 모른다. 


뇌는 생각을 멈추었을지 모른다. 뚜렷한 대상을 향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열려 있던 동공으로 치고 들어온 빛이, 불현듯 뇌의 타성을 건드렸을 때, 그래서 그저 스치던 정보가 피할 수 없이 의미가 되었을 때, 그는 번득 정신을 차렸을까.


시멘트를 바르는 기술뿐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특수한 고안’이라는 의미마저 담고 있는 ‘미장’을 산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순간, 세상 모든 흔적에서 심상을 엮어내는 보는 자의 보배로운 눈은 진청색 평면 위로 감추어진 산수를 긁어낸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을 흔적의 풍경에 주목하며 작가는 미장이와 미에 대해 나누는 대담을 상상한다. 이들은 콘크리트의 균열에서 ‘보이지 않는 반항과 소극적 저항’을, 콘크리트 거푸집에서 ‘기억하는 사물, 탈역사적 기록’을, 콘크리트 요철, 그 생채기에서 ‘과정과 무목적·비목적의 목적’을, 콘크리트 동굴벽화에서 ‘폭력과 반자연적 자연의 정취’를 떠올린다.


‘눈으로 걷고 생각으로 그리는 풍경을 만나는 시간’, 재현하는 일에 발 담근 화가는 ‘걷지 않는 정지여행’의 길 위에 서 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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