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역사상 인류 태고의 주거공간은 동굴이었다. 비바람을 막고 음식을 저장하고 불을 피울 수 있는 동굴 속 공간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외부세계와 구분되는 정적인 공간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인류의 문명은 진화하였고 또한 문명의 발전에 상응하여 지하공간은 변화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땅속 바위를 파내는 일의 어려움이 해소된 뒤에도 한동안 지하공간은 소음이 큰 발전소나 기계 시설을 배치하는 장소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도시 생활의 다양한 복합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도시의 인구 집중에 따른 가용 토지 부족, 공기오염이나 자외선·방사능·전자파·지구온난화의 문제 등으로 인해 부각된 지하공간의 장점이 자리하고 있다. 지상에 비해 지하공간은 항온·항습성, 방음성, 내진성과 같은 에너지 절약 차원과 지상의 자연과 역사적 경관의 보존 등 여러 측면에서 이점이 있다. 또한 지하철, 버스터미널, 주변 건물 등과 바로 연결되는 이동성도 장점이다. 과밀화된 도시에서 지하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지상의 밀도 증가를 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핀란드의 경우 템펠리아우키오 지하교회(왼쪽 사진), 레트레티의 지하 콘서트홀(오른쪽)은 건축미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음향효과 면에서도 세계적 관광명소이다.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캐나다 토론토의 거대 지하 보행로 ‘패스’는 매년 할인 행사를 통해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모은다. 몬트리올의 ‘언더그라운드 시티’는 여의도 면적의 1.5배로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도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땅속에 지하공원이 만들어지고 있다. 뉴욕의 ‘로라인(Lowline)’이라는 이름의 이 공원은 축구장 두 배에 달하는 넓이로 기존 전차터미널 지하공간에 국내 업체의 자연 채광기술을 활용해 식물을 자라게 하는 실험적인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다양한 식물의 재배를 시험하고 그 농작물을 조리하여 파티를 하는 단계라고 하니, 지하도시의 새로운 가능성은 인류의 상상력과 기술적 발전의 조합으로 나날이 무궁무진하다.
서울도 영동대로, 세종로, 을지로 등 강남북 주요 거점에 대한 대규모 지하개발을 연이어 계획 중이다. 보행 중심의 인문도시에서 한양 도성길과 서울로, 세운상가의 입체보행로, 고가 하부 커뮤니티, 한강 접근로, 서울 둘레길에 도심 여기저기의 단절된 지하 연속보행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세계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적인 입체보행 도시의 가능성이 크다. 이제 도시건축 계획에서 지표면을 기준으로 한 지상과 지하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이며 도시의 새로운 미래는 지하의 가능성을 간과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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