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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옥수동 고가 하부 틈 속 놀이터. 도시 속 다양한 여백의 공간에서 어린이는 자신만의 틈을 찾아 노는 체험을 통해 누구도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을 배운다. 만아츠만액츠


엇비슷한 아파트들로 도시가 빼곡히 채워지기 이전 주택들로 이루어진 나의 동네는 모든 집들이 각기 다른 놀이터였다. 담장과 집의 틈, 계단 아래 틈, 다락, 벽장 안의 틈, 지하창고. 자신만의 놀이로 채울 수 있는 실로 다양하고 풍성한 틈들이 있었다. 주변 곳곳에 규정되지 않은 틈을 나만의 개성적인 놀이터로 활용한 것이, 돌이켜보면 오늘날 건축가로서 창의적인 발상을 하게 만든 중요한 밑거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서의 ‘틈’이란 한자로 ‘사이 간(間)’에 해당한다. 건축은 인간(人間)이 앞으로 보낼 시간(時間)을 위한 공간(空間)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들 사이의 틈’, 시간은 ‘순간순간 사이의 틈’, 공간이란 ‘관계 짓기를 위한 틈’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이 중요한 ‘틈’들을 얼마나 의미 있게 채우며 살아갈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늘 건축가로서 고민하는 것이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다. 어린이도 대부분 시설의 중요한 이용자이므로 어떻게든 나는 항상 호기심이 가득 넘치는 이들을 위해 아무리 딱딱한 건축이라도 재미있는 ‘틈’을 담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가 무색하게 매번 현실에서 틈새는 잠재적 사고의 요인으로서 철저히 배척당한다. 관리자에 의해 갑자기 답답한 난간 벽이 들어서거나, 커다란 화분으로 생뚱맞게 채워지고 만다. 우리 사회와 교육은 늘 어린이의 창의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개성과 창의성을 키우도록 하는 발상과 위험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철저하게 관리된 환경에서 마음껏 뛰어놀라는 것은 모순이다. 올라가다 넘어지면 위험하다는 것도 모르고 자라는 아이가 자기관리 능력을 스스로 체득할 수 있을까. 과잉보호 속에서 아이가 살아 있는 긴장감을 느끼고, 스스로 뭔가를 궁리하고 타개하는 창조력을 키울 수 있을까.


<비밀기지 만들기>의 저자 오가타 다카히로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은 실제 위험에 둔감하다.” 창의적인 놀이터란 크고 작은 다양한 위험들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어린이들의 가장 큰 불행은 일상 속에서 마음껏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공간적 틈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여기저기 틈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또 산과 들로 확장되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어른이 정해준 규칙이나 틀이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스스로 궁리해서 놀이를 만들고 또 다소의 상처를 입으며 건강하게 성장했다. 자연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고 위험한 행동을 하면 아픔이 뒤따른다는 것도 배웠다.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어린이를 과보호의 테두리 속에 억압하는 부모와 사회 시스템이 아이들의 창의성과 자립성을 방해하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진만 건축가 jojinm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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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935년 제안한, 중심 없이 철저히 흩어지고 무한 확산되는 공동체 ‘브로드에이커 시티’. 프랭크로이드라이트재단


일견 복잡하게 보이는 도시계획의 단순 명쾌한 핵심은 ‘과밀의 질서를 얼마만큼 쾌적한 상태로 조직하는가’에 다름 아니다. 지금껏 많은 건축가들은 보다 크고 많은 건물들을 기반시설이 제공된 한정된 영역의 ‘도시’ 속에 최대로 넣기 위해 애써왔다. 기능이라는 이름하에 곳곳을 용도지구로 구분하고 위계에 따라 ‘○○중심’ 같은 인위적 질서를 부여하였다. 밀도가 답답해지면 광장이나 공원을 삽입하여 숨통을 틔운다. 이러한 집중과 과밀에 대한 숭배는 오늘날 환경 및 사회적 차원에서 다양한 도시문제를 야기하며 점차 그 유효성에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게 한다.


이러한 방식과 대조적으로 현대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그의 말년인 1935년 제안한 이상도시 ‘브로드에이커 시티(Broadacre City): 새로운 공동체 계획안’은 눈여겨볼 만하다. 도무지 어디까지 도시이고 어디가 농촌인지 구분 없이 ‘분산되어’ 펼쳐진 풍경이다.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극단적인 저밀도시이다. 광장이나 도시를 지배하는 중심이 없으며, 자연이 인간에 의해 밀려나는 곳이 없이 조화스럽다. 철저히 분산되고 무한으로 확산되는 공동체 실현의 배경에 라이트가 생각한 새로운 기술들이 있다. 이 신세계에서는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교통수단(드론), 시민 상호 간의 완벽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전자통신(광통신), 또한 화폐 중심의 경제체제를 대신한 사회적 신용에 근거한 새로운 교환수단(신용 및 가상통화), 소유보다는 사용과 공적 개발에 초점을 둔 토지 개념(공적 토지),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의 사유화가 아닌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모두가 누리는 공유경제가 있다. 무려 85년 전 그가 예측한 이러한 신기술들은 오늘날 이미 구현되었거나 실현을 목전에 둔 것이다. 라이트는 이러한 기술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구상 대부분이 건축가로서의 직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다. 그는 대학교를 포함한 그 어떤 정식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독자적인 자신의 건축세계를 창조한 건축가이다.


한편 현재 지구촌을 휩쓴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1918년 스페인 독감 이후 100년 만에 돌아온 문명사적 전염병이자 세기적 전환점이다. 어쩌면 4차 산업혁명이 이 전염병 때문에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과밀의 도시가 이점을 지니지 않게 될 때, 비대면 문화와 거리 두기, 인공지능, 스마트모빌리티의 비약적 발전은 우리 도시를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 라이트가 오래전 그린 사라지는 도시의 모습은 오늘날 지구촌을 휩쓴 바이러스 대재난에 대응하는 다가올 시대를 예측하고 있다.


<조진만 건축가 jojinm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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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탑(Torre David). 무허가 수직형 공동체의 독특한 건축적 구조로 되어 있다. 위키피디아(CC BY-SA4.0)


1972년 7월15일 오후 3시32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멀쩡한 대형 아파트단지 프루이트 아이고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음과 함께 한순간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지어진 지 17년밖에 안 된 이 건축은 뉴욕 무역센터를 설계한 당시 최고의 건축가 미노루 야마사키에 의해 공모로 선출되었다. 다양한 인문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모든 질서가 치밀하게 계획된 최첨단 시설로 공동주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호평과 함께 각종 건축상을 휩쓸었다. 


약 7만평의 땅에 총 33개동 2762가구를 질서 정연하게 배열하고 단지 내부를 기능과 효율에 따라 세밀하게 구획하였다. 그러나 칼로 자른 듯 과도한 질서는 거주민을 은연중 억압하고 분절시켜 갈등을 유발하였고 결국 단지 전체가 인종차별과 각종 범죄의 소굴이 되고 만다. 자연스레 빈집이 늘어가고, 유리창은 깨진 채로 방치되었으며 엘리베이터는 운행을 멈추었다. 보다 못한 당국은 마침내 단지를 폭파시키고 공원화해버렸다.


한편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다비드의 탑’이라는 짓다만 45층 고층건물이 있다. 1993년 개발자가 사망하고 지역경제도 붕괴되면서 이 건물은 뼈대만 완성된 시점에 영구히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지속된 불황으로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둘 10여년간 방치된 다비드의 탑에 모여드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곳은 현재 750가구 이상이 불법거주하며 세계 최고층의 “수직형 빈민가”라 불린다. 


초기에 임시거처로 텐트를 치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점차 건물을 변형시킨다. 비바람을 막고 옆집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각자 공수한 각종 자재들로 외벽과 방을 만들며 뼈대뿐인 사무실 건물을 공동주택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이들이 채운 것은 비단 미완성 건물의 외관이 아닌 유기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였다. 그들은 게시판을 통해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정해진 일정에 맞춰 공용 공간을 청소한다. 즉흥적이고 자발적으로 운동장, 교회, 상점 같은 공간을 만들며 건물이 마치 하나의 도시처럼 작동한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모두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계단은 45층까지 쉬엄쉬엄 오르내리며 이웃과의 유대감을 쌓는 소통의 핵심공간이다. 이 미완의 탑은 거주자의 최소한의 느슨한 질서와 자율성에 의해 공간의 형태나 그 공동체의 관계성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열린 건축이다. 


오늘날 모든 도시와 단지는 풍족하고 효율적이며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질서 있게 규칙적으로 설계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간이 유대감을 형성하고 행복을 보장할까? 아니라고 본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무질서의 효용>에서 말했듯 결핍과 무질서는 오히려 성숙하고 건전한 도시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임이 분명하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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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패놉티콘. 중앙에 좁은 관리자 공간과 주위로 빙 둘러진 감방은 최소 인원의 최대 감시가 가능하다. 감옥뿐 아니라 신생아실, 학교, 아파트, 회사, 양로원에 이르는 폭넓은 건축 유형에 응용되고 있다.


우리 주변 다양한 건축 시설물들의 기원은 대부분 근대사회의 제도 속에서 만들어졌다. 오늘날의 학교는 균질한 수준의 노동자 육성을 목표로 한 근대 공교육 제도에서 출발하였고, 심신이 건강한 시민을 재생산하기 위해 종합병원이 생겨났다. 신체 체벌형에서 교화를 위한 감금형으로 근대적 형집행의 사상전환에 의하여 오늘날의 감옥 시설이 나타났다. 박물관은 분류학의 등장으로부터, 철도역은 새로운 이동수단의 발명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장치이기도 하다. 건축공간과 제도는 서로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요소이며 건축의 즉물적인 힘을 통해 비로소 제도는 완성된다. 영어단어 institution은 ‘제도’란 뜻과 동시에 ‘시설’이란 의미도 있다. 시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지하는 제도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역으로 제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시설 속 그 제도를 표방하는 공통된 공간적 특성이 필요하였다. 그것을 우리는 건축에 있어서 유형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패놉티콘(Panopticon)의 설계도이다. 중앙에 작은 관리자 공간과 그 주위로 빙 두른 수많은 방들의 배열은 최소 인원의 최대 감시가 가능하다. 패놉티콘의 유형은 감옥뿐만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치는 신생아실, 학교, 아파트, 회사, 양로원을 아우르는 다양한 건축 시설들의 유형이다. 이러한 공간적 유형은 알게 모르게 그 안에서 생활하는 우리 삶을 조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외관이 가진 스타일이나 양식에 주목하여 건축을 평가하곤 한다. 이제까지 건축사 또한 미술사의 일부로서 양식에 치중해왔다.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고딕, 모더니즘, 미니멀리즘 등의 유행 순서대로 양식을 나열해 나가면 그럴듯한 건축사의 체계가 정리된다.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예술이 표현의 문제인 반면 건축은 우리 삶 속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새로운 삶이 조직된 설계도를 ‘본다’가 아닌 ‘읽는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은 “우리가 건물을 만들지만 또 그것이 우리를 만든다”고 하였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건축이 표현하는 시각적 디자인이 아닌 그것이 조직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건축의 표피를 절개하여 스타일이라는 화려한 치장물을 발가벗기면 관계성이라는 속살이 드러난다.


<조진만 |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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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르쿠엥트(1793)의 육군병원과 풀무로 작동하는 환기 체계(왼쪽 사진). <그림2> 마레와 스프로(1782)의 병원 계획. 상부의 단면도와 하부의 평면도 모두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다.


18세기 세균학이 정립되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오염된 공기가 전염병을 전파한다는 공기감염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치유의 공간인 병원 건축은 늘 공기의 흐름이 주요 과제였다. 과학자 보일의 기체 연구를 토대로 병실의 환기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가지 방식은 &lt;그림1&gt;과 같이 커다란 풀무를 건물 외벽에 설치하여 정화된 공기를 주기적으로 공급하였고, 또 다른 방식은 &lt;그림2&gt;와 같이 공기 흐름을 고려한 건축물을 설계하는 방식이다. 의사 마레와 건축가 스프로의 협업에 의한 1782년 설계도를 보면 병동은 공기가 흐르는 형태 그 자체를 따른다. 평면적으로 모서리 없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단면적으로는 위가 좁고 높은 반원형 곡면을 통해 공간 자체가 공기를 자연스레 통과하는 방식이다. 의학적 전문 지식이 건축물 형태를 부여하고, 호흡하는 기계로서의 건축이 탄생한 것이다.


19세기 영국은 과밀화된 도시의 열악한 위생 수준으로 인해 여러 질병이 창궐하였다. 다수의 공중목욕탕과 공공세탁장이 건설되고 1848년 공중위생법이 제정되었다. 개선의 대상은 비단 시설물과 규정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까지 확대되었다. 비위생적인 것은 죄악이었다. 청결함과 도덕관념을 결합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개혁하였다. 근대 건축운동이 청결의 표식인 순백색을 선호한 것은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위생 개념도 내포하고 있었다. 건축가는 순백의 건축물들을 통해 이전의 어둡고 비위생적인 도시 환경을 치유하는 의사이기도 하였다. 


20세기에는 눈부신 설비와 기술 발달 덕분에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부를 만한 복잡하고도 거대한 규모의 병원이 나타났다. 수천명의 환자를 수용하며 정교한 기계와도 같이 작동하는 거대 복합 병원에서는 더 이상 이전 건축가들의 고민-쾌적한 공기의 흐름을 고려한 건축물 형태-을 볼 수 없다. 첨단기술 속 모든 것은 커지고 효율화되었지만 공간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되레 감소하였다. 공간으로서 창의 위치라던가 유선형의 평면보다 천장 속 보이지 않는 강력한 공기조화기계의 효율이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이러한 기술진보의 다음 종착지는 어디일까.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 코로나19와 같은 현대적 전염병은 병원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 


건축학자 알렉산더 초니스는 “효율적이고 숭고하며 건강을 고려한 대성당을 세운 기술이 이번에는 그 대성당을 폐허화시킬 것이다. 그때가 오면 거대한 신앙(병원)은 갈 곳을 잃고 홈닥터의 책상 속으로 깔끔히 수납될 것이다”라고 했다. 즉 미래에는 병원의 기능이 공기와도 같이 일상 속 기기들로 흡수되고 시설 자체의 존재 의미는 점점 옅어질 것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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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으로써 보다 더 풍요로운 킴벨미술관의 진입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가장 쓸모없다는 것이다(존 러스킨). 킴벨미술관 제공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은 근대 건축 최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 사조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근원으로 회귀하여 고전 건축에서 모티브를 얻고 창의적인 현대 공간으로 승화시켰다. 명쾌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내부에 극적인 자연의 빛을 담아내는 건축들을 선보인 그를 사람들은 ‘빛과 침묵의 건축가’라 칭송한다.


1972년 완성된 텍사스주 킴벨미술관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외부는 투박할 만큼 단순한 반원형 콘크리트 지붕을 나지막이 여섯 줄 이어 엮고 내부 곡면 천장에 가느다란 천창을 내어 온화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자연광이 충만한 전시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휑하리만큼 비워진 현관은 연못의 흐르는 물소리와 주변의 숲을 고즈넉이 품어 건물에 들어가기 전 예술적인 감흥에 흠뻑 도취되게끔 만든다. 일화에 따르면 칸은 “이 현관 부분이 왜 멋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묻고, 스스로 대답하길 “그것은 바로 이것들이 완전히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마이클 베네딕트는 1987년 <진실의 건축을 위하여>라는 얇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책을 저술한다. 당시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각종 주의들이 과잉 난무하는 시대에 진정한 건축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그것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비움(Emptiness)’이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움이란 상실과 외로움의 골이 깊은 허무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의 첫째 의미는 명쾌함, 순수함, 투명함, 탈속적이고 고요함과 같은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 그 비움이 다양한 쓰임을 위해 적극적으로 맞아들이고 채워질 잠재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비어 있음’은 소리 없는 울림이며, 충만되고자 하는 잠재력으로 완성을 위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비어 있음’은 시간, 순간, 상황의 모든 것들 사이의 여백이다. 근사한 벽난로가 우리를 끌어당길 때, 아침 안개 속 어슴푸레한 창문 저편의 풍경에 이끌림을 느낄 때, 닫혀 있지 않고 살짝 열린 문을 찾아낼 때 ‘비어 있음’이 있다. 


우리의 마당이나 처마 툇마루도 비움의 공간이다. 비움의 공간이지만 공동체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사유의 중심공간이며 자연과 조우한다. 또한 그것은 실로 생동적이고 다채롭다. 시각에 따라 변하는 태양의 빛에 의해, 그 그림자의 농도와 깊이에 의해, 계절마다 변하는 하늘과 바람에 의해 공간은 풍부해지며 수시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 


비움으로 인해 건축은 단순히 주어진 기능을 담는 도구의 틀을 초월한다. 진정한 완성은 미완을 품음으로써 사용하는 사람들이 채울 수 있는 생동력 있는 여백을 만들고, 또 우리를 그 속으로 이끄는 것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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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자연에 가까운 건축. 구엘 공원의 열주 회랑.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우디를 떠올린다. 마치 도시 자체가 한 건축가의 이름으로 등식을 성립하는 특이한 경우이다. 가우디가 제자들에게 남긴 중요한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실 인간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발견할 뿐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 질서를 갈구하는 건축가는 신의 업적을 모방함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독창성은 창조의 근원에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과학과 기술을 통해 기발한 것을 만들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의 바탕이 되는 재료는 항상 자연으로부터 온다. 공기나 빛, 광물 등 세상에 존재하는 자원들 모두 인간이 무에서 창조한 것은 없다. 창조의 주체는 조물주인 자연일 뿐이다. 또한 자연에는 무수히 상호 작용하는 관계성이 존재한다. 식물의 광합성이나 먹이사슬에 있어서 어느 하나의 기능이 다른 것들의 존재를 성립하게 하고 그것들의 복합적인 체계로 자연은 이루어져 있다.


가우디는 그러한 관계성의 차원을 한 단계 확장하고 자연의 요소들을 표현이 아닌 원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사진은 가우디가 1914년에 완성한 구엘 공원 한쪽 언덕 하부를 들어내 열주로 떠받친 산책로이다. 마치 나무줄기같이 기울어진 기둥들은 공원 내 도로를 내기 위해 파쇄한 쓸모없는 돌들을 사용하였다. 기둥 상부에는 주변에 자라고 있던 야자수를 심고 돌기둥 위에 놓인 뿌리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 안으로는 물이 흐르게끔 만들었다. 지면으로부터 나온 돌을 인간의 지혜를 활용하여 건축함으로써 야자수가 자라는 자연의 일부로 다시 환원시킨 것이다.


조경과 건축의 구분이 의미 없고 땅 자체가 건축인 구엘 공원은 구석구석이 이러한 가우디의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가 건축을 자연과 조화시키는 방식, 디자인을 자연으로부터 차용한 것을 보고 종종 ‘아르누보’ 건축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아르누보 건축은 식물이나 동물의 표면적 형태를 모티프로 장식화하는 것에 비해 가우디의 건축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내재된 질서를 자연에 근접시키고자 하였다. 자연을 담고자 하는 그의 수법은 그것을 이론이나 공식으로 파악하는 과학자이라기보다 직관에 의해 파악하고 직접 손으로 만들어내는 장인에 가깝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각에 의존하게 되고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만 습득이 가능한 것이다.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금욕생활과 작업에만 몰두한 가우디는 공사현장 앞에서 전차에 치여 1926년 7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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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남쪽으로 약 500㎞, 사하라사막의 오아시스에 위치한 가르다이아(Ghardaia)는 사진과 같이 독특한 형태의 집락을 형성하고 있다. 11세기 이슬람교 음자브인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남아프리카의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옮겨와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일거에 만든 이른바 요새 도시이다. 주변이 온통 사막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오목한 지역에 위치하고, 마을은 낮은 언덕 지형으로 가장 높은 곳에 모스크의 첨탑이 있다. 이 모스크를 에워싸며 ㅁ자 중정을 가진 집들이 원심형으로 언덕 전체를 빼곡히 메우며 펼쳐진다. 실로 한 폭의 입체주의 회화를 보는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마을은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하늘에서 본 가르다이아. 상부의 첨탑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진 마을이다. 첨탑은 불과 10m 높이지만 언덕의 정점에 위치해서 어느 곳에서 봐도 두드러진다.

 

불규칙하게 무작위로 들어선 건축물들이 조화롭게 보이는 것은 집을 지을 때 어느 집에서도 언덕 꼭대기에 있는 모스크의 첨탑이 가려지지 않도록 함이 배치의 원리라고 한다. 길을 먼저 만들고 집을 세우는 우리와 달리 이들은 집을 만들고 그 사이 틈을 마치 길로 활용하는 듯하다. 차가 아닌 인간의 크기로 미로와 같이 오밀조밀 얽혀있고 높은 담들 사이로 좁게 굽이치는 길들은 사하라의 뜨거운 햇볕과 모래바람을 막아준다.

작은 문들만 듬성듬성 나있는 폐쇄적인 길과 대조적으로 집들의 내부는 방들이 각각 중정으로 열려 있어 쾌적하고 기능적이다. 집집마다 형형색색의 옥상 테라스는 종교적 제약 속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외부공간이자 바짝 붙어있는 이웃집들과 쉽게 오갈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한편 집 안에는 가구가 거의 없다. 주변이 모두 사막이라 목재 수급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납은 벽을 파서 해결하고, 식탁이나 의자 없이 거실이나 야외 테라스 바닥에 앉아 식사를 한다. 인체 크기에 맞춘 최소한의 공간으로 모든 일상이 간소하게 이루어진다. 집들의 외벽 재료는 땅과 같은 흙으로 되어있어 도무지 어디까지가 건물이고, 어디까지가 자연환경인지 경계가 모호하게 매력적으로 어울려 있다.

 

1930년대 알제의 도시설계에 관여하던 현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도 가르다이아의 특성에 매료되어 수차례 방문한 기록이 있다. 그곳에서 영감을 받은 르코르뷔지에는 오아시스 도시의 독특한 건축의 형태, 관개농법, 교통체계 등에 대해 여러 메모와 스케치를 남겼다. 그는 주변에 “생각이 막히면 가르디아에 가보라”고 했다고 하니 이후 수많은 건축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천의 하나가 되고 있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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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루비우스가 <건축 10서>에서 ‘인체 비례의 규칙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고 쓴 대목에 영향을 받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창조는 모방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성장하기까지 무수한 학습들, 즉 이전 것들의 모방을 통해 한 분야에서 숙달된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세상에서 완벽히 독창적인 것은 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고의 수단인 언어나 문자는 모두 기존의 것이며 그 결과물 또한 지나온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기 힘들다. 대체로 우리는 이전 것들의 색다른 조합이나 덧댐으로 새로움이라 부르는 것에 한 발짝 다가가는 식이다. 


좋은 건축을 만드는 데 있어 독창성은 필수 조건이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질서가 되는 규범이 필요하다. 과거 시대별 양식이 규범이었고 근대에 와서 기능주의가 그 역할을 하였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건축 책이라는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10서>는 로마시대인 기원전 60년경 집필되어 오늘까지 읽히는 교양서이다. 책 제목처럼 1서에서 10서까지 건축가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에서부터 재료의 선택방법, 천문학, 무기제작법,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비트루비우스가 글에서 새로운 원칙을 주장할 때마다 ‘그리스에서는~’이라며 이전 시대 언급을 통해 정당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16세기 르네상스가 끝나고 매너리즘시대에 맹활약한 건축가 팔라디오는 자신의 규범을 다시 비트루비우스에게서 찾았다. 비트루비우스의 흔적을 찾아 로마를 수차례 답사하고 많은 고전양식의 작품들과 함께 그는 <건축사서>를 남겼다. 본문에는 비트루비우스를 늘 선생 또는 안내자로 칭송하며 고대 로마 건축을 찬미하였다.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18세기 영국 건축가들이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에 매료되어 팔라디오 양식이 새로운 시대의 규범이 되었다. 방대한 자료가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넘어가서 고전주의가 이후 미국에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세기 르 코르뷔지에도 새로운 치수이론을 만들 때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그 규범으로 삼았다. 하나 단순히 그것의 비례가 지닌 아름다움이 아니라 당시 공업화에 적용 가능한 수치시스템의 당위성이었다. 


이렇듯 그리스, 비트루비우스, 팔라디오, 영국, 르 코르뷔지에의 단속적 계보를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규범을 가까운 시대가 아닌 되도록 먼 과거에서 찾는 것이다. 주변에서 누군가 동시대 것을 따라하면 표절로 비난받지만 놀랍게도 먼 과거에서 차용하는 경우 정반대이다. 오히려 지혜가 풍부하고 기발하다며 호평한다. 독창성의 배경이 되는 규범은 가능한 한 멀리서 찾는 것이 필요조건이라면 또 그것이 누구나 공감하는 요소이어야 하는 것은 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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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는 새로움에 도전했던 에로 사리넨의 뉴욕 JFK공항 TWA터미널(1961년 완공). ⓒBalthazar Korab


건축가의 능력을 평가할 때 단지 한두 개 건축 작품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설계 시 어떤 제약들이 있었는지, 건축주 혹은 발주처가 도중 변경을 요구했다거나 공사과정에서 건축가의 설계의도가 충분히 구현됐는지, 완성 후 설계의도를 존중하여 잘 관리했는지 등등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되고 그것이 현실에서 기능하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다사다난한 드라마와도 같다. 


훌륭한 건축가의 판단 기준으로 평론가 바바 쇼조의 흥미로운 관점을 빌리면 ‘미분적 평가’와 ‘적분적 평가’가 있다. 


미분적 평가란 한마디로 그 건축가가 얼마나 힘 있는 건축을 만들고 있는가, 디자인적인 가속도를 지니고 있는가다. 수학에서 곡선을 어떤 점에서 미분하면 접선의 방향을 표시하고 속도를 미분하면 가속도가 보이는 법이다. 이를 평가에 적용하자면 그 시점에 있어서 건축가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과 가속도를 나타낸다. 오르막길에 있는 건축가는 미분적 평가치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고 에로 사리넨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51세라는 한창 나이에 삶을 마감하기까지 비록 10여년에 불과한 짧은 활약기간 동안 그는 늘 작품마다 새로운 디자인 콘셉트를 가지고 근대건축의 가능성에 도전하며 놀라운 건축을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 만일 그가 급사하지 않고 오랜 시간 활동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대 건축의 풍경은 조금 달랐을 것이다. 우주에 다다르기 위한 로켓은 상당한 초기가속도 없이는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기 힘들다. 스타트업 시점에서는 미분적 평가치가 높은 것이 유리하다. 


이에 비해 적분적 평가란 현재까지 시간 동안 실적 축적에 대한 평가이다. 어떤 곡선, 즉 그 건축가가 걸어온 궤적을 적분하면 좌표축과 곡선 사이의 면적이 산출되고 그것이 그 건축가의 총체적 작품의 가치이다. 건축가뿐만이 아니라 각 디자인 분야의 대가들은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디자인 성향은 거의 변하지 않게 된다. 이 경우 미분을 적용하면 그 평가값은 제로가 된다. 그것은 디자인 질이 낮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높은 수준에서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적분적 평가치가 높은 건축가라도 지속적으로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눈물 나는 노력과 지구력이 필요한 법이다. 


한편 초기 미분값이 높아도 그것의 적분치는 미미하다. 문제는 가속도만을 추구하다 보면 그 접선은 점점 수직에 가까워지다 어느 순간 하향 점을 향하고 그 적분값은 0에 가까운 것에서 한순간 마이너스 값으로 변해버린다. 건축이든 예술이든 남다른 창의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미분적 평가와 적분적 평가의 조화가 중요하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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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학 미술관과 루이스칸.


예술이나 패션처럼 건축계에도 다양한 미디어에 자주 소개되고 세상의 주목을 받는 스타들이 존재한다. 건축학도나 새내기 건축가들은 언젠가는 스스로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며 이리저리 회전하는 등대의 불빛을 쫓아가듯 디자인을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등대의 불빛이 지나간 뒤의 흔적을 좇는 것이고, 한번 지나간 자리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다시 비추어지지 않는 법이다. 움직이는 등대에 비추어지기만을 바란다면 오히려 아무런 미동도 없이 한곳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소위 유행이라 불리는 것이 디자인에 연관된 분야에 늘 존재해 왔다. 시대별로 보아도 항상 그 시대에 대표적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디자인을 고안한 건축가는 아이디어를 이론화하고 설계도로 표현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것이 실현되고 미디어를 통해 소개된 시점에서 아무리 허겁지겁 쫓아가 보아도 수년 이상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미 흐름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 이후일 것이다. 결국 허무하게 등대의 불빛 흔적만을 좇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에게 침묵과 빛의 건축가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 칸(1901~1974). 칸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이었던 국제주의 양식과는 거리를 두고 묵묵히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무려 50세가 되어서야 첫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건물인 예일대학교 미술관을 시작으로 솔크 연구소, 킴벨 뮤지엄, 방글라데시 의사당 등의 숱한 역사적 명작들을 완성하였다. 


무언가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구멍을 파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직경이 작고 깊은 구멍을 팔 것인가, 반대로 얕아도 좋으니 넓게 팔 것인가 자신만의 철학이 필요한 법이다. 나비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날며 여기저기 내키는 대로 파는 것은 피해야 한다. 주변의 공기 흐름이 바뀌었다고 냉큼 자신의 방법을 바꾸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자신이 몰두해 온 것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디자인에 있어서 등대의 불빛은 그것이 회전하면서 적절한 곳을 단지 기계적으로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발신성능이 강한 쪽으로 자연스레 불빛이 향하는 법이다. 우직할 정도로 한 우물을 깊이 파면서 스스로의 발신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등대의 불빛을 유인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칸이 작고한 뒤 40여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건축이 시간과 유행을 초월하여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가 지닌 발신의 강도가 그만큼 견고했기 때문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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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무어의 성 매튜 교회. 독창성에 대한 타협 없이 설득과 공감을 통해 성취된 창의성이 돋보인다. ⓒTimothy Hursley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물의 외관 색상을 노란색으로 하고 싶은 어느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설계 기간은 물론 건물이 지어질 때도 일절 외관의 마감처리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매번 설계 미팅 때마다 노란색 넥타이, 셔츠, 손수건, 모자, 양말, 바지 등 상대방에게 노란색이 읽히도록 의도적으로 의상에 하나씩 포인트를 주었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드디어 외장 재료를 결정할 시점에 건축가는 넌지시 던졌다. “뭔가 주변에서 돋보이는 색깔이 필요할 것 같군요.” 건축주는 “예? 여기 노란색이 아니었나요?!” 말이 필요 없는 설득의 한 예이다. 뛰어난 디자인 실력, 기술 그리고 종합적 판단력은 우수한 건축가의 필요 사항이다. 하지만 건축주로부터 사용자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건축행위에 관여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그의 이상은 실현되기 어렵다. 뛰어난 건축가는 분명 뛰어난 실력만큼의 설득력과 공감력을 필요로 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성 매튜 교회가 새로운 디자인을 하기 위해 건축가를 찾을 당시의 일이다. 많은 후보 건축가들을 제치고 찰스 무어라는 이가 선택되었다. 선정 이유는 그가 교회 구성원 전원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설계를 진행하겠다는 독특한 방식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두 차례 형식적인 공청회가 아닌 신도 모두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새로운 교회의 방향과 공간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다. 건축가는 가지각색의 의견들을 정리하며 스케치로 옮겼다. 이윽고 교회는 우아한 목조 건물로 완성되었고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들이 만든 교회라며 만족했다. 하지만 전문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명확히 찰스 무어의 독창성 넘치는 작품이었다. 기본 구성에서부터 구석구석에 이르는 사소한 디테일까지 절대 일반인이 흉내 낼 수 있는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토론을 거듭한 결과로서 눈앞에 나타난 건축가의 디자인을 교인들은 바로 바라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만약 무어가 그들이 말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도면으로 옮겼다면 건축은 제대로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무어는 공청회라는 수단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에게 설득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설득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넘치지 않으면 안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회의적인 사람은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도 창의적인 측면에서는 그 뜻을 이루기 쉽지 않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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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나선형 관람 구조로 유명한 뉴욕의 명물 구겐하임미술관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최후 작품이자 최고 걸작이다. 생의 말년에 설계를 맡게 된 그는 미술관 인근의 호텔 객실을 장기 계약하고 사무실로 개조하여 완벽한 완성을 향한 의지를 불태운다. 하지만 완공에 가까워지는 어느 무렵부터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공사과정에서 미술관 측과의 마찰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에 분노와 실망을 느끼고 본거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미술관은 개관 후 30년이 지나 다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지금과 같은 건축가의 원안에 가까운 방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라이트는 사망한 후였다. 만약 그가 살아서 그것을 보았다면 과연 작품의 완성으로 보았을까?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나선형 공간. 관람객은 입장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미술관의 맨 꼭대기에서부터 중력을 따라 자연스레 물 흐르듯 내려오며 미술을 관람한다. 초기 개관 후 30년간 이 매력적인 부분은 미술관이 창고로 사용하면서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흔히 우리는 건축가=예술가로 생각한다. 화가는 작품을 완성하고 거기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창작물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건축가는 그린 도면에 서명을 할지라도 누구도 건축물에 서명하지는 않는다. 이 서명은 완성의 의미가 아닌 책임의 소지를 위함이다. 간혹 머릿돌에 새겨지는 건축가의 이름은 서명이라기보다 완공에 관여한 관계자들의 기록에 불과하다.

 

설계단계에서 건축가의 머릿속에 그려진 명확한 이상은 이후 공사단계에서 무수한 타자들의 개입으로 의도와는 다르게 만들어진다. 다음은 사용단계에서 소유자의 필요에 의해 개조가 발생하고 사용기간이 다하면 리모델링에 의해 대대적으로 변하고 결국 어느 시점에 그것은 소멸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을 작품의 완성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다. 피카소 그림의 소유자가 얼굴이 삐뚤게 그려졌다고 똑바로 고쳐 그리면 코미디가 된다. 하지만 완성된 건물의 어느 부분을 소유자가 멋대로 고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원작자인 건축가가 법에 호소를 해봐도 소용이 없다. 때론 시간이 흘러 건축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수정이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지만 이는 창작성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그것이 공공재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건축가 팔라디오의 작품집을 구입해 그의 건축에 매료되어 찾아간다. 하지만 실현된 건물은 작품집에 그려진 것과 다름을 목도하고 놀란다. 팔라디오 같은 대건축가도 현실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이다. “명확한 의도는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의도대로 성립되지는 않는 법이다.” 간혹 예외가 있긴 해도 세월이 흘러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원래의 명료함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는 생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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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발이자 도시의 핏줄이라는 지하철. 서울 지하철은 1974년 처음 개통된 이후 현재 10개 노선, 330개 역사, 351㎞의 구간을 통해 연간 약 20억명을 수송한다. 역사 공간은 전철을 타기 위한 단순한 통로 역할에서 도시의 발달에 따라 점차 환승영역이나 인접한 건물의 지하와 연결되는 부분까지 포함되면서 그 규모나 복합성이 날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공간이 광고판이나 상점 이외에는 별다른 기능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면서 지하철 역사는 시민들에게 지하철을 타기까지 마냥 걸어야 하는 지루한 통로에 불과하다. 


공간 자체가 예술작품인 나폴리의 톨레도역. 승강장을 갤러리로 디자인한 브뤼셀 지하철역.


지하공간은 사계절이 뚜렷한 지상에 비해 항온·항습에 유리하고 또한 버스, 주변 건물 등과 바로 연결되는 장점이 있다. 역세권의 프리미엄은 지상에서 상업적으로만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역 자체가 공공 프리미엄’이 되어야 한다. 지하철역의 통로와 유휴공간들 그리고 넘쳐나는 광고와 상업공간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시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보다 쉽고 친숙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면 우리 일상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도시의 매력이 될 것이다. 


요즘은 단일목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새로운 공간들이 현대 도시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창고나 공장이 공연장, 전시장으로 자유자재로 변화하며, 거대 쇼핑몰의 한가운데 만들어진 뜬금없는 도서관은 연일 사람들로 붐빈다. 기존 특정 공간들이 재생, 협업, 공유를 통해 단일목적에서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하철역을 천편일률적이고 무미건조한 통로 중심에서 역사마다 그 동네의 지역성과 이용자의 특성을 세심히 반영하여 출퇴근, 등하교용 생활 편의 기반시설로 개조하자. 노후화가 가장 심한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예로 들면, 청량리역은 지역특산품을 서울로 운송하던 기차역의 기능을 되살려 경기 서부 지역과 강원 지역 청년들의 활동 연계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창작품을 사고파는 청량리 크래프트 마켓으로, 제기동역은 과거 전국의 한약재를 유통하던 제기동 약령시장의 기억을 되살려 바쁜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치유의 공간인 마음약방으로, 서울역은 구역사인 문화역 서울284의 예술 전시가 확장되고 도심의 다양한 문화공간의 전시를 사전에 맛보기 할 수 있는 프리뷰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키면 명소가 될 것이다.


좋은 도시란 작고 다양한 문화요소들이 인접해서 오밀조밀한 네트워크를 이루는 도시이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 곳이 더 중요하고 영역 간 접근성이나 연계성이 핵심이다. 


1000만 서울시민의 절반 이상이 매일같이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면 우리 일상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풍요로울 것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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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풍경은 굽이치는 산들과 언덕들의 자연과 도시가 묘하게 어울린 독특한 매력이 있다.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 자연이라는 경관을 자신의 깊은 내면세계와 결합해 우리가 경험치 않고 보지 못한 감성의 풍경으로 탈바꿈시킨다. 마주한 풍경을 벗어나도 그 장소는 향수로 우리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게 된다. 풍경은 나를 통해 스스로 사유하며, 나는 그것의 의식으로 성립된다. 세잔의 말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채석장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망봉 채석장 절개지.


풍경은 거기에 일어나는 여러 상호 관계의 놀이 속으로 우리를 흡수하기도 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긴장감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또한, 그 안의 뭔가 특별한 것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느낌을 일깨우는 것 같기도 하다. 전망대에서 원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꿈에 빠지기도 하고 몽상가가 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지각적인 것은 감정적인 것으로 바뀌고, 사물의 물리성은 흐릿해져 저 너머로 이어지는 무한함 속에 잠겨버린다. 발아래 드넓게 펼쳐진 풍경 속에서 관찰자에게 그것은 단순한 지역 일부분이 아닌, 우리 삶이 끊임없이 활력을 얻는 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울의 맑은 바람과 높은 하늘을 만날 수 있는 서울의 옥상 창신동. 창신동은 서울에서 가장 역동적인 곳이다. 창신동 채석장은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으로 운영됐으며 현재 잘린 땅이 곳곳에 남아있다. 한국은행, 옛 서울역, 옛 서울시청,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이곳에서 나온 돌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나오는 화강암의 질이 좋았고 위치가 동대문 바로 밖이기 때문에 실어 나르기에도 편리했다. 해방 이후에 채석장 사용은 중단됐고 1960년대 무렵에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채석장 절개지는 창신숭인 지역의 독특한 주거지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뉴타운으로 지정되어 아파트 공화국이 될 뻔한 이곳은 주민들의 반대와 자립으로 도시재생지역 1호로 지정된 마을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것보다는 이곳만의 방식, 사람 냄새를 제대로 풍기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채석장은 어느새 100년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현재는 방치된 채 자원회수시설, 청소차량차고지, 무허가주택, 경찰기동대 등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다. 비록 아픔과 서러움이 담겼지만, 이제는 모두가 가꾸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역사문화 자원이다. 국내외 관광객들을 모으는 관광자원으로 활성화하는 프로그램과 낙산공원 등 주변 지역과 연계해서 장기적인 도시재생 거점 공간으로 그 숨겨진 잠재성을 캐내야 할 시점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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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가 교회 내부공간.


“제대로 된 화가가 되고 싶다면 먼저 혀를 뽑아버려야 한다. 그래야 전달하고 싶은 것이 오로지 붓질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될 테니.” 화가 앙리 마티스가 1942년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북구 스웨덴의 건축가 시구르드 레베렌츠(1885~1975)는 바로 이 말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대다수 건축가가 과장된 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방식과는 달리 그는 침묵의 건축가였다. 60여년에 이르는 창작활동 동안 평생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고 따로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친 적도 없이 작업실에 은둔하며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하였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가 남긴 건축의 농후한 공간 속에 구석구석 살아 숨 쉬며 오늘날까지 보는 이로 하여금 귀 기울이게 한다. 


당시 20세기 중반은 철과 유리의 첨단기술 건축을 표방한 모더니즘이 유럽을 지배하던 때였다. 대표적으로 그가 만든 스톡홀름 외곽의 성 마가 교회(1956~1960)는 놀랄 만큼 이러한 당시 유행과는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이전의 고전주의도 아닌 원시적인 새로움이 있다. 당시 지역에서 생산되던 조악할 정도로 거칠고 어두운, 극히 평범한 벽돌을 엄격한 원칙을 가지고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 만들었다. 그 원칙이란 오로지 표준 규격 벽돌만을 사용하되 절단하지 않고 온장만을 활용해 벽, 천장, 좌석, 제단 등 내외부 모든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벽돌을 쌓기 위한 회반죽에 주변에서 나는 점토를 더하고 줄눈을 의도적으로 흐트러트림으로써 외관은 주변 자작나무숲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독특한 존재감을 나타낸다. 또한 내부 벽은 일명 ‘호흡하는 벽’으로서 수직 방향으로 만든 다수의 동공을 통해 따뜻한 공기가 순환되도록 하여 춥고 긴 겨울에도 훈훈한 공간을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치장 벽돌이라는 일명 콘크리트 구조체에 겉치레로 붙인 장식이 아닌 벽돌 한 장 한 장이 구조체이자 마감이고 가구가 되어 공간 전체를 통일감 있게 아우르는 신전과도 같다. 


주변 자작나무 숲에 녹아드는 외벽.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하는 것은 어제 했던 방식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 등 함께 작업했던 이들로부터 전해지는 그의 창작 태도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우리는 사물을 만들고 볼 때 말과 수사의 번지르르함을 제거하고 그의 건축처럼 마음으로 깊이 보고 눈으로 꼼꼼히 생각한다면 성취하고자 하는 진리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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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캠퍼 광장에 있는 국립미술관 신관.


좋은 건축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논할 때 우리는 그것이 담고 있는 시대성을 이야기한다. 고고학자가 유적의 발굴을 통해 과거를 밝힐 수 있는 것은 바로 건축이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건축은 그 시대에 가장 적합한 기술과 재료로 지어야 한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전통한옥이나 초가집을 짓지 않고 벽돌로 이쁘게 치장된 건축을 새롭다고 부르지 않는 이유이다. 


지난 20세기 건축사를 돌이켜 보아 그 시대를 결정짓는 원형과도 같은 건축을 찾는다면 독일 베를린 캠퍼 광장에 있는 국립미술관 신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혁명적 건축은 1968년 건축가 미스 반 데 로어 생애의 마지막 완성작으로 매우 단순한 입방체의 형태를 하고 있다. 모더니즘 거장이자 ‘Less is more’라는 언급으로 유명한 그에게 철과 유리라는 당시대 공업화의 대표적 산물은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인 공법이자 재료였다. 미스 반 데 로어는 단순히 기술을 건축 공간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미술관을 상설전시 공간과 기획전시 공간으로 명쾌히 구분하여 전자는 광장 하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8개의 가벼운 철제 기둥으로만 지지가 되는 가로세로 각각 64.8m의 거대한 지붕을 띄워 그 안에 끝없이 비워진 공간을 기획전시 공간으로 계획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붕의 거대함이나 기둥의 가늚 등과 같은 기술적 성취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창조된 투명한 공간이다. 명확히 규정된 기능과 용도는 없지만 어떠한 기능과 용도들도 가변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스페이스의 탄생이다.


건축에 있어서 궁극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건축물이 튼튼히 서 있기 위한 구조적 기술, 실내가 쾌적한 설비적 기술, 외관의 재료적 기술, 지속 가능한 환경적 기술, 미학적 기술 등 건축을 구성하는 기술에도 여러 가치가 있다. 서양에서 건축의 어원인 ‘Architecture’는 크다는 의미의 ‘Archi’와 기술이라는 의미의 ‘Tect’로 이루어진 ‘큰(종합적인) 기술’이라 명명한 이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기술의 궁극적 목표는 투명함이다. 만들고자 하는 것의 본질을 가장 명쾌하게 사용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마치 내용물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 혹은 인간이 호흡하기 위한 공기와 같다. 그래서 기술이란 연마할수록 투명해져서 결국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도래하는 각종 친환경 신기술과 첨단 공법들로 요란스럽게 포장한 건축일수록 가만히 보면 그 안에 지녀야 할 본질적인 새로운 삶의 가치가 퇴보함은 아이러니하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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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안도 다다오가 기획한 ‘도시의 큰 나무’ 프로젝트. 하지만 녹화의 대부분이 플라스틱 조화임이 알려진 후 오사카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사진은 2013년 프로젝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마루 빌딩(왼쪽 사진)과 현재.


2013년 일본 오사카 중심부에 빼곡히 들어선 고층 빌딩 숲을 지나던 시민들은 갑자기 바뀐 도시의 풍경에 감탄과 함께 환호를 보냈다. 오랜 세월 가로를 답답하게 채웠던 거대한 30층 높이 마루 빌딩 1층에서 6층까지가 벽면 녹화를 통해 녹음이 풍성한 자연으로 변모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오사카가 배출한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아이디어를 내 지역의 새로운 상징이자 자부심이 된 ‘도시의 큰 나무’ 프로젝트였다.


흥미로운 점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녹화의 대부분이 플라스틱 조화였다는 사실이다. 벽면 녹화라는 특성상 성장하는 시간이 걸리는 넝쿨식물 위주로 조성이 되었고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초기효과에 보다 중점을 둔 것이리라. 워낙 정교하게 만든 탓에 시민들 모두 속아 넘어갔지만 몇몇 전문가들에 의해 조화임이 밝혀졌고 이내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시민들은 블로그와 안도 다다오에게 보낸 편지로 가짜 자연을 성토했고, 공공 토론회를 벌이고, 철거 요구 소송까지 벌였다.


이 불편한 아름다움이 위험한 것은 ‘녹화’의 의미가 녹색을 칠하기만 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에 대한 우려, 어린이들에게 자연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교육효과, 자연과 시민에 대한 모욕 그리고 플라스틱의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적 부담이다.


오사카의 자부심에서 수치로 전락한 위장 녹화는 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절반이 풍화로 사라졌다. 반면 넝쿨식물은 상부의 조화에 막히어 타고 오르는 속도가 더디다. 애초 10년 후엔 30층 건물 꼭대기까지 자연으로 덮이는 구상을 했으나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보인다. 자연과 인공이 어느 쪽도 이득을 취하지 못함은 아이러니하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근래 조성된 서울 성동구 옥수역 고가 하부에서 비슷한 광경을 목도했다. 이곳은 어느 순간 원래 있던 자연은 사라지고 해괴망측한 LED 조명이 들어간 장미 조화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반음지라 식생의 성장이 느리고 관리에 정성이 많이 필요한 곳인데 위의 마루 빌딩과 같이 정치적 ‘전시효과’를 재현한 것이다. 그 광경에 씁쓸함을 삼키던 중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조화의 두 배 높이만큼 우뚝 자란 개망초와 그 틈틈이로 기지개를 켜는 민들레를 보게 된 것이다. 하찮은 들꽃임에도 자연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리라. 


가짜들 무리 속에서 보여준 자연의 눈부신 생명력은 경외적이다. 분칠이나 화장으로 만들어진 가짜 속에 진정한 우리 삶의 의미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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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물질적 환경제어 용품 (사진 1)


이동식 거실 (사진 2)


모든 학문이 그렇듯 건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고대 이후 오늘날까지 건축에 대한 수많은 정의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을 꼽으라면 당연히 ‘모든 것은 건축이다’일 것이다. 이는 작고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한스 홀라인(1934~2014)이 1968년 제대로 실현된 작품도 없던 젊은 시절 패기 넘치게 발표한 논문 제목으로 당시 세계 건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선언문 전후인 1960년대에 발표된 그의 작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물질적 환경제어 용품’(사진 1)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건축작품’은 하나의 캡슐 알약에 불과하다. 그것은 폐소공포증 환자를 위해 고안된 것으로 알약을 복용함으로써 환자의 갑갑한 공간에 대한 인식력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이 ‘건축작품(?)’의 주된 목적이다. 또 ‘비엔나 대학 증축계획’이라 불리는 작품은 증축할 건축물에 대한 투시는 보이지 않고 달랑 TV 사진이 한 장 있을 뿐이다. 홀라인은 이를 통해 TV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통해 대학의 기능이 실질적으로 확장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동시에 학교 건물의 확장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자 구태의연하게 학교 건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예술가 월터 피클러(1936~2012)와 개최한 전시에서 선보인 ‘이동식 거실’(사진 2)이다. 폐허와 같은 공간 속에서 한 남자가 머리에 기이한 모양의 헬멧을 머리에 쓴 채 앉아 있다. 그는 헬멧 속의 영상과 음향을 통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자신만의 이동 가능한 거실 환경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념적인 작품으로 실제 작동하지 않는 외형을 만든 것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VR,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이미 이들 시대에 새로운 건축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비엔나 대학 증축계획’은 마치 오늘날의 유튜브나 아이튠스 U와 같은 이러닝 플랫폼이 담는 기능의 정확한 예견이기도 하다. 당시 예측한 새로운 기술에 의해 확장된 건축은 이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돌이켜 보면 건축은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에 나타나는 인간의 본질을 묘사하고 규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다가올 미래 사회에 대한 건축의 새로운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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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로서 건축주에게 의뢰받은 새로운 계획을 제안할 때마다 항상 논점이 되는 것은 특정한 기능을 가지지 않는 중정이나 넓은 복도와 같은 공용공간의 쓰임에 관해서이다. 왜 이러한 쓸모없는 공간을 크게 만드는 것이냐고 물으면 이것은 전체적인 건축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여백”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백이라는 것의 의미는 아무 목적도 없는 ‘0’의 공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입과 아이디어에 의해 무한적으로 가능성이 확장되는 시작으로서 ‘0’의 공간이다. 


도서관을 매개로 마을과 비단산 사이에 다양한 여백이 삽입된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


기능적으로만 정돈되고 짜인 공간은 일견 효율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계획된 것 이상의 어떠한 가능성도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삶을 조직하고 창조적 관계성을 만들어야 할 공간이 획일적이며 일방적 소통의 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쓰임이 불분명한 일견 낭비와도 같아 보이는 여백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은 발휘된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언어나 전통적 공간과 여기서 생성되는 인간관계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덕분에 풍요로움을 가질 수 있었다. 서예와 한국화는 여백의 미였고, 우리의 대청, 툇마루같이 풍부했던 기능이 명확하지 않은 영역들은 사람들과 자연 앞에 활짝 열려 항시 쓰임에 있어 풍요했다. 


건축과 마찬가지로 도시 차원에서도 여백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 도시에도 다양한 재생과 입체적 활용을 통해 성숙한 도시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복잡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와 행위로 다채로워지는 가능성의 공간이 도시의 여백이다. 그것은 단순히 빌딩들 사이에 남은 곳을 정돈한 공개공지나 필요 이상으로 크고 비워진 업무시설의 로비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장소성과 지역 특색을 살린 여백을 만드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시의 여백을 얼마나 개성적이고 풍요롭게 마련해 공동체의 기억을 새겨나갈 것인가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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