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마지막 버스

지난가을, 어느 그리스 미술관장을 만났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우리의 얘기는 자꾸만 무거운 주제를 맴돌았다. 그리스의 재정난으로 인해 유럽연합의 지원금을 받아 간신히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는 말끝에 그는 하루하루가 공황 상태라고 했다. 아침에 바닷가에 나가면 난민들의 시신을 발견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는 설명과 함께. 그리스와 터키는 IS의 끔찍한 폭력을 피해 유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의 관문이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자존심이었던 그리스는 난민을 보듬을 만큼의 여력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목숨이 너무 가벼워지는 현실 앞에서 미술관의 미래를 얘기하기에 그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진섭, 크로아티아 밥스카, 2015



그리스의 상황은 유럽의 오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가를 상실한 이들의 탈출 앞에서 가난해진 유럽의 국가들은 자국민 보호를 핑계 삼아 자꾸만 빗장을 걸어 잠근다. 파리에 머물면서, 유럽 국경의 난민 문제를 기록해온 사진가 조진섭의 목격담은 훨씬 암울하다. 변변한 끼니도 없이 꼬박 며칠을 걷는 일은 난민들에게 흔한 풍경이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발칸반도의 국경 어딘가에 당도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몸을 누여야 할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크로아티아의 국경 지대 밥스카에서 출발하는 사진 속 버스는 헝가리로의 이동 수속을 밟을 수 있는 다음 검문소로 향한다.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다 간신히 얻어 탄 그날의 마지막 버스. 그나마 이 차에 올랐다는 건 다음 행선지가 생겼다는 뜻이다. 위기를 알리는 경고등 같기도 하고, 안식을 부르는 성탄절 조명 같기도 한 버스의 빨간 불빛과 함께 파국의 한 해가 저물어간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지난 칼럼===== > 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Yes We Cam  (0) 2016.01.07
[사진 속으로]108인의 초상  (0) 2015.12.31
블록  (0) 2015.12.17
언더프린트  (0) 2015.12.10
가족과 함께  (0) 2015.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