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소망이 뭔가요? 올해 꼭 하고 싶은 일은?
지난 달 말부터 아마 대여섯 번은 들었을 거다. 글쎄... 가만히 머릿속으로 해야할 일들의 순위를 정하다가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등산을 한다’라는 항목을 넣었다. 헬스장에서 뛰는 것은 답답해서 못하겠고, 그렇다고 운동을 하지 않고 살기에는 저질 체력이 염려되는 까닭이다.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을 감안해 오버하지 않고 대략 2시간 안팎의 가벼운 산책코스를 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마련한 첫 번째 코스가 삼청공원에서 출발하는 북악산 산책코스! 평소 운동과 담을 쌓은 사람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초급자용 코스라 하겠다. 2시간 정도 열심히 걷다보면 살짝 땀도 나고, 약간의 난코스도 섞여 있어서 (등산하는 분들이 들으면 일제히 콧방귀를 뀌겠지만) 평소 숨쉬기 운동만 겨우 하는 사람들은 오랜만에 운동했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지난 3주간 세 차례나 실행에 옮겼으니 이미 계획은 초과달성이다.(으쓱~) 더구나 같이 간 친구들 모두 만족감을 표명한 지라 자신 있게 이곳에 소개한다. 이름 하여 “미술과 미식이 있는 산책코스~!”
일단 시작은 삼청동. 오전 11시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 이때 문을 열기 때문. 이건 뭐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팥죽 안에 들어있는 커다란 찹쌀떡을 먹고 나면 속이 아주 든든하고 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팥죽 한 그릇의 위력이란... 추위야, 가라~! 팥죽 외에도 근처 유명한 수제비집이나 다른 대안들도 많으니 취향대로 골라잡으면 된다능.
하지만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기 전, 잠깐 짬을 내어 근처 몽인아트센터(www.mongin.org)에 들러보는 것은 어떨지. 수제비집과 팥죽집 사이 길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잠깐 보고 나오기에도 좋다. 게다가 무료. 개관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월요일은 휴무다. 현재 강석호, 김윤호, 서동욱, 안정주, 최기창 등 5명의 작가가 참가한 전시 <행복>(2010.11.18.∼1.16)이 열리고 있는데 서동욱 씨의 비디오 작품을 빼곤 관람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도 않는다. 몽인아트센터는 5층짜리 노출콘크리트 건물로 2007년부터 국내외 유망한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좋은 기획전도 꾸준히 선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반인들에게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 지척인 삼청동수제비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바글한데 말이다. -.- 어차피 가는 길, 따로 시간을 낼 것 없이 한번 들러보자.
팥죽집에서 천천히 삼청공원으로 이동한다.(대략 10분 소요) 여기서 나무계단이 아닌 오른쪽 방향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공원 곳곳에 붙어있는 야생 멧돼지 주의 현수막. 하지만 정작 멧돼지와 맞닥뜨리게 되면 119에 신고할 정신이나 있을까?
사실 삼청공원을 찾은 건 거의 3∼4년 만이었다. 삼청동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소화도 시킬 겸해서 가보곤 했는데, 오랜만에 와보니 완전히 새로워진 느낌이다.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들어온 ‘디자인 수도 서울’이라는 구호는 매우 거슬리고 수긍할 수도 없었지만, 서울의 산길은 확실히 달라졌다. 쓸모있게 '디자인'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자꾸 걷고 싶어지잖아~
삼청공원은 말바위전망대 부근에서 서울성곽과 만난다. 말바위전망대까지는 20분 정도 소요되는데, 천천히 걷고 있노라면 문득 새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속세를 떠나 크게 한 발자국 산속으로 진입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낑낑거리며 말바위전망대에 오른다. 안내표를 보니 말바위는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고. 헉. 말을 타고 여기까지 올랐다니. ...아마 성곽을 따라서 올라온 거겠지? 간간이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이어서, 전망은 이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한숨 돌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팔각정, 숙정문’ 표지를 따라 성곽 아래쪽 흙길과 산을 끼고 비스듬히 이어진 나무계단을 걷는다. 늘상 시멘트 바닥만 딛고 살다가 자연 속을 걷고 있으려니 기분이 정말 상쾌하고 좋다. 살짝 흩뿌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서 조심스러웠지만 주변의 수려한 경관에 자꾸 정신이 팔린다.
숙정문으로 가려면 신분증을 보이고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1968년 김신조 및 북한 특수부대원 30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1.21 사태) 이후, 40년 동안이나 닫혀있던 이 길이 몇 년 전 개방되었지만 아직은 정해진 시간에만 허가증을 받고 통과할 수 있다.(4월∼10월은 오전 9시∼오후 3시까지, 11월∼3월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가능. 오후 5시 퇴장. 매주 월요일은 휴관)
여기서 숙정문까지 대략 20분, 숙정문에서 성곽을 따라 청운대까지 30분 정도 걷는다. 청운대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굽어보면 멀리 세종로가 보인다. 그러니까 (인왕산으로 자주 오인받곤 하는) 북악산은 바로 청와대의 뒷산, 경복궁 바로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산이다.
청운대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면 유명한 ‘1.21사태 소나무’가 있다. 무장공비와의 총격전 때 총알 15발을 맞은 비운의 소나무다. 지금은 이렇게 총알자국을 가려놓았다. 소나무 한그루가 총알을 15발이나 맞았다는 것도 놀랍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을 보면 당시의 총격전이 얼마나 힘들고 치열했는지 짐작이 간다.(윽. 어떻게 여길 뛰어다닐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정말 엄청난 내리막길이다. 거의 45도 경사로, 다리가 후둘거릴 정도다. 난간에 살짝 손을 댄 채 시선을 발끝에 고정하면서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맞은편으로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나마 조금 위로를 삼는다. -_-;;
이렇게 정신을 집중하고 30~40분 열심히 내려가면 드디어 창의문 안내소. 목에 걸고 있던 허가증을 반납하면 코스 완주!
총 소요시간은 (같이 가는 친구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대략 2시간 안팎으로 잡으면 될 듯하다.
창의문은 부암동의 명소 ‘클럽 에스프레소’ 뒤쪽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을 나와 바로 오른쪽 오르막길에는 또 다른 명소 ‘자하 손만두’집이 있다. 두어 시간 산행에 팥죽은 이미 언제 먹었냐 싶고... 늦은 점심으로 깔끔한 개성식 손만두국을 주문한다. 후식으로 나오는 매실주스를 마시면(대개 달라고 해야 준다) 뭔가 아주 산뜻하게 마무리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환기미술관으로 이동한다. 길 건너 떡집 앞으로 내려가면 된다. 환기미술관은 수화 김환기(1913~1974)를 기리는 사립미술관으로,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기리고 후배 작가들을 후원하는 성격의 상설전과 기획전을 꾸준히 열고 있다.(http://whankimuseum.org)
보통은 느긋하게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지만 미술관 건물을 보러 오는 건축가 지망생들도 꽤 많다. 미술관 건물은 올림픽선수촌아파트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설계한 재미건축가 우규승 씨의 작품인데, 솔직히 건물이 세워진 부지는 뭔가가 들어서기에는 부적절한, 가파른 계곡과 같은 곳이다.
수화의 부인 고 김향안 여사가 성북동의 옛집 노시산방(老柿山房, 원 주인은 근원 김용준)을 떠올리며 고심 끝에 정한 곳이라고 하는데, 건축가에겐 매우 어려운 숙제였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주변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심플한 건물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꽃피는 5, 6월, 전시를 보고 건물 외곽을 도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아트숍에서 스카프, 우산, 가방 등 예쁜 아트상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술관을 나와 다시 찻길로 돌아오면, 오른쪽은 평창동 방향이고, 길 건너 왼쪽 버스정류장엔 시내로 가는 3개 노선의 버스가 지난다. 교보문고에 가서 책 구경이나 좀 해볼까, 늘 생각은 하지만 아직까지 이눔의 저질체력으로는 무리인 듯.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졸음이 쏟아진다. 어서 어서 집으로 고, 고~
창의문 주변 100m전방 가볼만한 곳
- 산모퉁이 카페 : 드라마 <커피 프린스>에서 이선균의 집으로 나온 곳. 요즘은 조금 줄었지만, 드라마 방영 후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걸어야 한다. 등산한다는 기분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는거. 분명히 경고했다는거. ^^;;
- Cheers : 프라이드 치킨이 맛있는 곳. 바삭바삭 잘 튀긴 치킨과 시원한 맥주 한 잔 어떠신지. 치킨 외에 다른 술안주도 매우 ‘갠춘’하다.
- 클럽 에스프레소 : 주차가 마땅치 않다는 게 유일한 단점. 2층은 커피 볶는 공장. 1층엔 다양한 커피 도구를 판매하며 몇 가지 커피를 시음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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