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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원의 살랑살랑 미술산책/오늘의 산책

일본민예관 찾아가기

크로스 지킴이 윤민용 기자가 필진열전에 쓴 오싹한세로드립을 보고 단풍구경 갈 짐을 싸다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쓰고 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실은 지난 달 말, 잠시 도쿄에 다녀왔다. 목적은 일종의 휴가. 다녀와서 바로 재미있는 글을 올리겠다는 말로 순진한 윤 기자를 안심시키고 튀었다’. 아니, ‘날았다’.

문득 달력을 보니, 다녀온 지 스무날도 더 지났다. 뭐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백수 과로사라고, 결코 노느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아니라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해본다. (미안, 미안~) 



이번 도쿄 행에서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과 리하쿠(李白)라는 오래된 찻집.
십 여 년 전부터 벼르던 곳들인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유는 찾기 힘들다는 것

다행히 이번엔 재일교포 친구의 도움으로 두 곳 모두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본민예관과 리하쿠는 모두 조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 곳 모두 조선의 미에 흠뻑 빠져 평생을 산, ‘전생에 조선사람이었을 법한 일본인이 지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도쿄의 일본민예관은 일본 민예운동의 총 본산지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세운 박물관이고, 리하쿠는 컬렉터인 미야하라 시게유키(宮原重之씨가 40년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찻집으로 모두 조선의 미를 알리는 데 열심인 곳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알게된 건 대학 1학년 미학입문 시간이었다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닌 柳宗悅이라고 들었던지라 막연히 한국사람이겠거니 생각했고, 한국인 유종열 씨가 아니라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일본 민예운동의 창시자이자 종교철학자, 미술평론가, 미학자로서 지금도 일본과 한국의 미학, 미술사학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만든 민예(民藝)’민화(民畵)’를 본래 우리말인 양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생명력 넘치는 민중의 생활미술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그의 사상과 철학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야나기를 숭배하는 수많은 무리들은 그를 좇아 각 지방에 민예관을 만들어 민예품을 수집, 소장하고 특히 뛰어난 조선의 민예품을 애호하게 됐다. 현재 일본민예협회 회원으로 가입된 각 지방 민예관 및 공예관은 총 29개. 이들 각 지방의 민예관은 일 년에 한번 씩 민예대회를 열고 있는데 그 중심이 바로 도쿄의 일본민예관이다. 아마 일본에 다양한 잡화(雜貨)’가 발달한 것도 일찍이 생활 속의 공예, ‘민예를 중시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이 아닐까.

그가 조선의 민예에 빠지게 된 것은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형제를 알게된 뒤부터라고 한다. 1914년 아사카와 노리다카에게 조선 백자를 선물 받은 후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그는 1916년 처음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등지를 답사하며 본격적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후 1922년에 조선과 그 예술이라는 첫 단행본을 냈는데, 그가 직접 서문에서 밝혔듯이, ‘조선 문제에 대한 공분(公憤)’그 예술에 대한 사모(思慕)’가 계기가 되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나같이 주옥같은 글이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길 

특히 그가 19229월 일제의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며 카이조(改造)에 쓴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는 읽을 때마다 심금을 울린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쓴 글이어서 더 놀랍고 부끄럽기도 하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파묻혀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멀지 않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빼앗겨서는 안 될 존재이기에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지상에서 너의 모습이 없어지더라도 나의 이 글만은 적어도 지상의 어딘가에 뿌려질 것이다. 나는 끈질기게 너를 기념하기 위해 이 추도의 글을 공중(公衆) 앞에 내보내는 것이다.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도리 없이 죽음으로 몰려 얼마나 분하겠는가. 나는 네가 당해야 할 고통과 쓸쓸함을 생각한다.”

오오,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서글프게 생각할 것인가. 너의 많은 친구들은 너보다 먼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서울 서쪽을 장식했던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은 이제 시민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해 나는 혜화문(동소문)을 찾았는데 보호하는 자가 없어 가련하게도 비바람에 지탱하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너의 귀중한 형제인 숭례문(남대문)은 성벽에서 고립되어 아무 상관도 없는 울타리에 의해 겨우 지켜지고 있다.


여기까지 읽고 있으려니, 불 타버린 숭례문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는 1916년 이후 몇 차례 조선을 더 방문해 각종 민예품을 수집했고, 1924년에는 드디어 경복궁 내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 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그는 자신이 편집위원이었던 문예지 시라카바(白樺)의 독자들에게 기부금을 구하기도 하고, 경성의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성악가였던 부인의 독창회를 열어 모금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굳이 힘들게 미술관을 연 이유가 궁금해진다.

나는 항상 한 나라의 인정을 이해하려면 그 예술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긴박한 오늘날, 나는 이 점을 더욱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 예술을 좀더 이해하게 된다면 일본은 따뜻한 조선의 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국경을 초월하고 마음의 차별을 초월한다. (중략) 나는 조선 민족의 저 우수한 작품이 우리의 마음과 깊이 교류하는 날이 올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그 작자로서의 민족이 우리 마음의 벗이 될 것이라는 것도 의심치 않는다. 나는 그러한 희망과 신념을 완수하기 위해 조선민족미술관설립을 드디어 계획했다.”

나는 먼저 여기서 민족예술(folk art)로서의 조선의 풍취가 배어있는 작품을 수집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건 나는 이 미술관에서 사람들에게 조선의 미를 전하고 싶다. (중략) 나는 이것이 사라지려고 하는 민족예술을 지속시키고 새로이 부활하게 하는 동인이 되기를 바란다. 수가 적은 조선의 작품은 아마 10년 후에는 뿔뿔이 흩어지는 슬픔을 맛볼 것이다. 지금 조선 사람들은 눈앞의 일 때문에 그것들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중략) 나는 그 불행한 흩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 기획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민족의 고유한 아름다움마저 마침내 과거의 것으로 묻혀버릴 것이다.”




일본에 있는 우리 것은 모두 일본사람들이 약탈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물론 약탈품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정당한 경매나 매입 절차를 통해 유입된 물건들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까지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미 우리가 팔아버리고, 잃어버린 것들 아니냔 말이다. 잃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다시 찾기는 힘들다.  


그런 이유로 눈 밝은 그가 일찍이 조선의 민예를 수집한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까. 그가 조선의 민예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헛되이 버려지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전쟁통에 모두 잃어버렸을 수도...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가 쓴 글에 관심이 있다면 국내에 번역된 책이 몇 권 있으니 참고해 보자. 개인적으로는 조선을 생각한다(도서출판 학고재)수집이야기(도서출판 산처럼)를 추천한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철학이 있는 수집또는 수집의 철학을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수집이야기》가 강추다.

아무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1920년대 그가 우리 미술의 특징을 비애의 미라고 했다는 게 원인이다. 마치 고차원적으로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지능범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선한 눈의 그를, 그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그대로 믿고 싶은 것은 글에서 느껴지는 진실함 때문이다. 


조선의 벗이고자 했던 그의 진심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민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그의 예리한 안목을 배우고 싶었다. 그가 구축한 미의 세계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를 만나러 간다. 

도쿄에서 일본민예관에 가려면 일단 시부야(渋谷) 역으로 가야한다.


게이오 열차의 승강장으로 가는 길에는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郞)의 초대형 벽화 내일의 신화가 있다.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등진 이 작가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작가 중 한 사람이다. 높이 5.5미터, 너비 30미터에 이르는 내일의 신화1970년 오사카만국박람회의 심볼이 된 태양의 탑과 짝을 이루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본래 멕시코의 어느 실업가에게 작품을 의뢰받아 1968년 멕시코 현지에서 2년간 제작, 완성한 것이었는데, 이후 소리 없이 사라져 30여 년간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03년 멕시코시티의 근교 어느 허름한 자재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어, 다음 해 일본운송과 수복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1년여에 걸쳐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가나사키시(川崎市)에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이, 아오야마에 오카모토 타로의 기념관이 있다.


시부야역은 여러 종류의 열차를 갈아탈 수 있는 굉장히 규모가 큰 역이다. 여기서 게이오(KEIO) 열차의 이노카시라 라인(頭線)을 탄다. 기치죠지(吉祥寺) 방향, 120. 이때 주의할 점은 반.드.. ‘local(各停)’을 타야한다는 거. ‘급행(express)’을 타려는 사람들을 따라 엉겁결에 같이 뛰어 탔다간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낭패를 보게 된다. (...그래요제가 그랬어요.)
 




느긋하게 ‘local’을 타고 두 번째 정거장인 고마바토다이마에(駒場東大前) 역에서 내린다.
3
분 소요. 도쿄대 교양학부가 있는 작은 역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멀리 캠퍼스의 상징인 시계탑이 보인다
. 여기서 U! 뒤로 돌아 일방통행 길을 따라 죽~ 내려간다. 길가의 약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표시되어 있듯이 바로 눈앞에 소바집이 보인다. ‘믿을만하군. 이대로 가면 되겠어.’ 물론... 소바집에도 들어가 봤다. 자동판매기로 먹고 싶은 메뉴표를 직접 뽑아 주문하는 시스템인데 아저씨들만 드글드글 모여 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 그냥 돌아 나왔다.

 


가는 길에는
李朝木工이라 쓴 푯말과 같이 조선시대 목공예품을 파는 골동품 상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교회도 보인다. 작고 단아한 모습이 맘에 든다. 아점으로 먹은 매운 카레 오므라이스. 모든 채소와 달걀은 유기농으로 목장에서 바로바로 가져와 쓴다고. 맛은? ...그냥 so so.




, 이제 나왔다. 왼쪽으로는 주차장과 서관(西館, 야나기 무네요시가 생전에 살던 저택)이 보이고, 오른쪽 건물이 민예관이다.




입장료는 일반 1000, 학생 5백 엔, ·중고생 2백 엔.
개관은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휴일은 월요일, 연말연시, 전시 교체기간이란다.

신발 속에 이름을 적어 넣어두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




1936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기획전이 열리는 대형 전시실과 7개의 작은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소장품으로 1년에 4회 정도 기획전이 열리고, 가끔 특별전이 열린. 15천 여 점의 민예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약 3천 점 이상이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그래서 일본민예관에는 조선시대 공예를 위한 상설전시실도 당당히 한 개 관을 차지하고 있다. 호랑이를 그린 조선시대 백자가 눈에 익다.

 



중간중간 놓여있던 세련된 디자인의 의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고안한 의자라고.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의 민예가구로, 제품화되어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1층 화장실 옆 벽에 붙어 있던 각종 전시 포스터들. 오른쪽 위에 오사카 민예박물관에서 열리는 가을 특별전 <민예운동의 작가들-소장품을 중심으로>(9.11-12.12)  포스터가, 왼쪽 아래에 <흑선. 페리의 세계>(9.10-11.7)라는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참고로 일본의 근현대 역사에서 페리와 맥아더는 은인으로 꼽히는 두 미국인이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1853년 에도시대 말기 해군 제독이었던 메튜 페리는 흑선(黑船, 구로후네)을 이끌고 들어와 일본을 일찍이 근대화의 길로 나서게 해 주었다. 서툰 명암법으로 서양인을 그린 그림이 재미있다.




일본민예협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民藝. 작년이 야나기 무네요시의 탄생 120주년이었다. 20103월호의 표지 사진은 1921년 도쿄에서 열린 조선민족미술전람회에서 포즈를 취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모습을 찍은 것.


본관 맞은편에 있는 서관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생전에 살던 저택으로, 건축보호를 위해 월4회만 한정 공개하고 있다.(둘째, 셋째 수요일과 토요일) 불행히도 다섯째 수요일에 방문한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

하지만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살펴보니, 신발장 옆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흑백사진이...! 그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얼마나 큰 관심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음 번엔 시간을 잘 맞춰서 꼭 둘러봐야지.



짧게 쓰려던 이 글은 이미 용량 초과다. 일단 그냥 올린다. 리하쿠 소개는 다음에.
잠시 광주와 담양, 지리산을 돌고 올까 한다.

일본 민예관 홈페이지는 www.mingeikan.or.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