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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보통의 영웅들

A_두훈(BLUE), 2017 ⓒ이승주

 

짧은 머리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뒤에는 고층빌딩과 버스 정류장, 바닥에는 보도블록이 보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보이는 건 콘크리트 교각과 강바닥의 크고 작은 돌뿐이다. 만약 회사들이 즐비한 강남의 테헤란로에서 그를 마주쳤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테헤란로에서 순간이동한 것처럼 한강에 뚝 떨어진 모습이 자꾸 눈길을 멈춰 세운다.

 

사진가 이승주는 오랜 친구인 ‘두훈’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두훈의 직장과 멀지 않은 한강변이었다. 사진가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옷이나 소품을 준비하라고 주문했고, 모델은 파란색 넥타이와 짙은 남색 양복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주변 지인들을 집이나 회사 근처 등에서 촬영한 사진연작 ‘A’에는 결과적으로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공간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블루, 레드, 옐로, 카메라 앞에서라도 히어로물의 주인공처럼 자기 고유의 색으로 변신하면 좋으련만, 스스로 선택한 파란 넥타이처럼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서 이미 익명의 존재들 ‘A’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사진가는 친구들을 불러 그들의 독사진을, 전신상을 카메라에 당당하게 새긴다. 마치 변신을 앞둔 히어로의 모습처럼. 우뚝 선 두 다리, 불끈 쥔 두 주먹, 빳빳하게 쳐다보는 두 눈동자, 두훈은 친구의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온몸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그들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존재를 힘주어 바라본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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