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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그대로 제자리

꺾인 풍경, 오키나와, 2016 ⓒ허란

 

눈동자에도 기억이 있는 걸까, 멀리 흐린 바다, 가까이 교복 입은 학생들. 바다와 교복만 눈에 스쳐도 왜 팽목항, 세월호가 보이는 걸까? 동공에서 호출된 기억은 일본 오키나와 바다를, 일본 학생들을 진도 앞바다로, 단원고 아이들로 둔갑시키고 만다. 망막에 각인된 기울어진 배는 더 이상 바다를 바다로 볼 수 없게 한다. 언제쯤 잃어버린 바다를, 침몰한 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전시 중인 허란의 사진전 <꺾인 풍경>(류가헌·3월11일까지)은 제주 강정에서 밀양, 팽목항까지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던 눈동자의 기억을 따라간다. 아빠와 엄마가 싸울 때 딴청 부리며 예쁜 그림을 그리는 아이처럼, 작가는 아픈 풍경들 앞에서 딴 곳을 바라본다. 갈등이 첨예한 현장 속에서 찍힌 손톱 모양 초승달, 망아지 한 마리, 초록 나무 한 그루는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안온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현실 회피적인 시선이라 여기거나 반대로 내면이 투영된 자기만의 시선이라 치켜세우는 일은 조급하며 둔탁하다. 고개를 돌리는 건, 회피나 투영을 떠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사건의 중심부를 직시하며 오히려 현장의 어떤 치열함에 도취되거나 마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눈의 의지가 현실 회피가 될지 자기 투영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고개를 돌려도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대로이고, 풍경은 제자리일 뿐이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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