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법 가을이 깊이 영글었다. 여름이 무더웠던 탓인지 10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지난주까지는 여전히 녹음이 짙었는데 이제는 가로수에서도 강한 단풍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돈화문을 거쳐 창덕궁 경내로 들어서면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 전해오는 가을 내음은 도시민의 피로를 한순간 사라지게 하리라. 자연 지형에 순응하는 자연스러운 배치로 이루어진 창덕궁의 궁궐 건축에 한동안 빠져 있다가 자연스레 뒤쪽의 후원으로 발걸음을 잇는다.
창덕궁의 후원(後苑)은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불렀던 용어이다. 지세를 그대로 살리면서 인위적인 면을 최소화하는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후원 중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부용지 주변이다. 부용지는 사각형의 연못으로 가운데에는 원형의 인공 섬이 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라는 원리를 담고 있다.
그림에서 좌측에 보이는 정자가 부용정인데 두 개의 기둥이 연못 속에 담겨 있는 십자형 평면을 하고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여러 단의 기단 위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 주합루이다. 1층은 왕실 도서관 격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 겸 누마루로 사용되어 왔던 공간이다. 우측에 있는 건물은 영화당으로 이 건물의 우측 마당은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조선시대 과거는 세 단계로 치러졌는데 이 영화당 마당이 왕 앞에서 보는 마지막 단계의 시험 장소였다. 부용정과 주합루, 영화당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부용지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되어 멋진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풍광을 흑백으로 드로잉하여 그 위에 좀 더 늦은 가을의 분위기로 색채를 입혀봤다. 도심에서 세월의 고즈넉함과 짙어가는 가을의 짙은 색채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바로 이곳 창덕궁의 부용지가 아닌가 싶다.
윤희철 대진대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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