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나무들도 얼마 남지 않은 마른 잎들을 떨어내느라 부산하다. 멀어져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얼마 전 부암동에 있는 서울미술관을 찾았다. 박스형 건물로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미술관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내년 1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특별기획전 ‘비밀의 화원’이 비중있게 전시되고 있다. 영국의 작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 집필한 동화 <비밀의 화원> 내용을 바탕으로 국내외 작가 20여명의 시선을 모은 전시회이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도로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인왕산의 동북쪽 사면을 배경으로 경사지를 따라 층층이 자리 잡은 멋진 한옥 여러 채가 주변의 수목들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이 흥선대원군이 흠뻑 빠져 빼앗다시피 한 석파정(石破停)이다. 이 건물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서(별장은 잠깐씩 와서 쉬어가는 공간인데 반해 별서는 오랜 기간 동안 생활을 하는 가옥을 말함)였다. 이 별서가 대원군의 소유가 된 배경은 이러했다.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장안에 으뜸가는 별서를 가지고 있었다. 대원군이 이 건물에 반하여 건물을 사려고 하였으나 흥근은 거절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머리를 써서 흥근에게 하루만 빌려 달라고 하여 허락을 얻어내고 임금을 권해 이 별서에 임금이 묵도록 하였다. 흥근은 임금께서 계셨던 곳을 신하의 도리로 감히 쓸 수 없다 하여 다시는 이 별서에 가지 않게 되었고, 결국 이 별서는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김흥근이 소유했을 때는 이곳이 삼계동 정사라는 명칭이었으나 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라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이곳에 있는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石坡停)으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일반에게는 개방되어 있지 않으나 서울미술관 옥상 정원에서 바라보는 외관은 어떠한 미술작품보다도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이 한옥의 경내를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충분히 달랠 수 있으리라. 석파정. 최고의 권력가가 자신의 호까지 바꿀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졌던 건물 앞에서 멀어져 가는 가을을 잠시 붙잡아 본다.
윤희철 대진대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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