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캉팽, 수태고지, 64.1×117.8㎝, 1425~30년, 뉴욕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클로이스터 분관
미국 뉴욕에 가면, 마치 숨겨놓은 애인을 만나듯 홀로 은밀히 다녀오는 곳이 있다. 맨해튼 최북단,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한 클로이스터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분관인 클로이스터는 프랑스에 있던 중세 수도원 몇 개를 가져와 그대로 재조립한 중세 유럽예술의 보고다.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로베르 캉팽의 ‘수태고지’다.
플랑드르의 거장인 캉팽은 인류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고지하러 온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의 모습을 1400년대 플랑드르 지방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왼쪽은 기증자인 잉겔브레히트 부부로 당시 유명 상인이다. 상인계급의 봉헌자들은 수태고지의 순간이 마치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으며, 그 순간을 목격하는 증인으로서의 자신들의 모습을 좌측 패널에 그려 넣게 한 것. 뒤쪽에 모자를 벗고 서있는 사람은 당시로부터 800년 전에 예수 잉태를 최초로 예언한 선지자 이사야이다. 왼쪽엔 마리아보다 몇배는 늙어보이는 남편 요셉이 묵묵히 제 본분인 목수 일을 하고 있다. 마치 마리아에 대한 정욕을 자제하듯 마리아 뒤편에 있는 파이어스크린을 제작하고 있다.
화면의 중심에 배치된 흰백합, 흰수건, 물주전자는 모두 성모의 순결을 상징한다. 마리아는 신약성서를 읽고 있고, 탁자 위에는 구약성서가 놓여있다. 탁자 위에는 촛불이 방금 꺼져 그을음이 난다. 세상의 빛인 예수가 지상으로 내려왔으니 더 이상의 불빛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창문을 통해 성령의 비둘기 대신 십자가를 멘 아주 작은 아기예수가 들어오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이 아주 작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은 화면에 너무도 많은 사물들이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어 풍부한 볼거리를 준다는 점이다.
더욱 매력적인 점은 어떤 것 하나도 비유와 상징이 아닌 것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북구인만이 가진 지적이고 실용적인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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