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대로 북변 사거리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이어진 중봉로로 접어든다. 직선의 도로가 크게 왼쪽으로 선회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오른쪽으로 이어진 좁은 길로 내비게이션이 나를 안내한다. 좁은 길로 300m가량 직진하니 왼쪽으로 연잎이 무성한 연못 뒤쪽으로 우저서원의 단아한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우저(牛渚)서원은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의 생가 터인 김포시 감정동에 인조시대인 1648년에 지어진 서원이다. 중봉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도끼를 지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도끼상소로 유명하다. 이듬해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게 점령되었던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싸우다 700의사와 함께 전사한 의병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671년에 ‘우저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는데 서원 주변에 소들이 물을 먹는 늪지가 있어서 ‘우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이 우저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은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김포평야가 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솟을대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놓여 있고 중앙에는 강학 공간인 여택당(麗澤堂)이 있다. 팔작지붕의 여택당 뒤쪽으로 놓여 있는 내삼문을 들어서면 제향 공간이 자리한다. 그 안쪽 중앙에 조헌의 위패가 있는 사당이 위치해 있는데 조헌의 시호인 ‘문열(文烈)’을 따라 ‘문열사(文烈祠)’로 불리고 있다. 보통 사당 앞에는 제향의식에 필요한 공간인 동무, 서무가 있는데 이 서원은 내삼문과 사당과의 간격이 좁아 우측에 조헌선생유허추모비를 모신 비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좌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우측에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서원의 운치를 더해준다.
서원 주변에는 도로명과 공원명, 마을명이 모두 ‘중봉’으로 되어 있다.
추석도 지났으니 이제 우저서원의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단풍으로 곱게 물들 것이다. 단풍 가득한 우저서원의 가을 운치가 눈앞에 그려진다.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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