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인 경기 김포시 월곶면 개곡리에는 개량 한옥으로 지어진 처의 본가가 있다. 그 집 대문 앞에서는 철책선 너머로 북한 땅이 보인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과거 대북확성기를 틀 때면 밤새 시끄러운 대북방송이 이 마을의 밤풍경을 대변해주었다.
이 집의 대청마루에는 처가댁 어른들이 신주 모시듯이 고이 모시는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그 액자에는 처의 선조 할아버지가 고종황제로부터 받은 ‘절충장군 겸 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임명한다는 교지가 들어 있다. 군인으로서 매우 높은 위치까지 오르셨다는 증표여서 처가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산이다. 할아버지 나이 30세 때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고 프랑스군과 격전이 벌어졌던 문수산성이 집에서 직선거리로 겨우 5㎞ 떨어져 있으니 분명 이 할아버지는 군인으로서 이 전장에 계셨을 것으로 처가에서는 믿고 있다. 처가 식구들에게 문수산성은 성지와 같은 곳이 되었다.
문수산성은 김포시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376m)을 둘러싼 산성으로 조선 숙종 때 축성되었다. 이 산성은 염하강 건너 강화도의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는 요새였다. 병인양요 때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강화도와 전략적 요충지인 문수산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 몰래 강화도의 정족산성을 점거하고 진을 친 다음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분풀이로 문수산성의 남문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문수산성은 1993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복원사업에 따라 북문과 남문 그리고 정상의 장대를 비롯한 성곽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무덥던 어느 날 처와 함께 장인어른 내외를 모시고 문수산성을 찾았다. 경사가 급한 돌계단을 잠시 오르니 문루 지붕이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이 우리를 맞이한다. 염하강 물줄기가 맞닿는 한강 하구 저 너머로 나지막한 산들이 겹겹이 쌓인 북한의 원경이 바라다보인다. 장인어른의 표정이 묵직하시다. 이곳에서 프랑스군과 접전을 벌이셨을 선조 할아버지의 힘찬 기개를 느껴보시려는 듯.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