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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작가들만 모르는 것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한다는 건 외형상 한 나라의 시각예술을 대표하는 성격을 띤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척박한 미술생태의 반영이자, 빈약한 인적 자산과 구조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틈’이기도 하다.

 

‘아트팩트넷(ArtFact.net)’ 등, 유명 미술전문 분석지에 이름을 올린 한국 작가들의 활약은 주목할 이유이긴 해도, 반드시 미술사적 평가까지 긍정적인 건 아니다. 분석의 단초로 활용할 수는 있어도 작가와 작품에 관한 절대적 기준인 양 맹신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비엔날레 대표작가가 되고, 유력 매체가 제공하는 지면 한 귀퉁이에 새긴 이름 석 자는 어떤 가능성을 담보한다. 적어도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문화적 상태인 ‘동시대성’에 근접해 있다는 건 인정받는다.

 

독일 신라이프치히 화파 작가 중 한 명인 네오 라우흐(Neo Rauch)의 (2014), 네오 라우흐는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이 좋아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면서 곧잘 닮은 작품의 모델로 부각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동시대성은 같은 시대의 작품이라 해도 이전의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철 지난 미술문법에 대해선 엄격한 편이다. 미학의 도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과 변별력 있는 개념, 새로운 모더니티를 구축할 수 없다면 예술적 역량 또한 외면받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한 한국 미술의 현주소는 어떨까. 결과부터 말하면, 동시대성을 읽을 수 있는 사례는 생각보다 적다. 숱한 전시와 작품들이 만들어지지만 나와 세상을 관통하는 철학은 사적 내러티브를 넘어서지 못하기 일쑤이며, 보잘것없는 것에 이데올로기를 부여하거나 미적 가치판단의 불가능성을 시스템으로 세탁하는 경우도 심심찮다.

이런 현실은 가까운 전시장에만 가도 확인할 수 있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작품의 태반은 비릿한 돈 냄새와 물감이 뒤범벅된 것들이지, 방식의 전환을 연구한 조형과는 거리가 있다. 취향에 읍소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미소 짓는 작품들이 즐비하고, ‘예술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술’은 될 수 없는 상품도 흔하다. 나름 힙(hip)하다는 것도, 알고 보면 국적불명의 염속예술이 주를 이룬다.

 

사고변환의 전제조건인 작가들의 미적 태도에서는 씁쓸하기까지 하다. 세상을 재해석하고 재발견하며 번역하려는 의지는 고사하고, 일부는 서양미술의 뒤꿈치에서 그들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아류를 끝없이 생산한다. 여기서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고유한 메티에(metier)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형식도, 기법도, 언어도 누군가와 혹은 무엇과 어떤 지점에서 닮았다.

 

심지어 작품만 봐도 어느 나라에서 공부했고,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독창성 역시 귀하다. 분명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다른 문화, 다른 시선에서 저마다의 삶을 영위했을 터인데, 어쩌면 그리도 획일적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예술가의 삶을 존경한다. 생존의 문턱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역사가 서둘러 종결되길 고대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산하는 예술의 가치와 삶은 구분되는 것이 합당하다. 삶에서의 부족함은 서로 나누고 채울 수 있으나, 사회적 의제로써의 예술에 주목하고,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는 예술의 가치완성은 온전히 작가들의 몫이다. 동시대를 무대로 역사를 촉발할 수 있는 힘 또한 예술과 예술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정작 당사자들만 모르는 듯하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