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일 발표된 ‘2018 예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약 70%는 예술 활동을 통해 얻는 수입이 월 10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수입이 아예 없다는 예술인도 30%에 달한다. 그나마 미술인들의 수입은 월 수십만원에 불과하다.
통계만 보면 예술가들은 예술로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미술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의 처우개선에 목소리를 높인다. 안전판을 만들어줘야 한다거나 강화된 창작지원 및 예술인복지 제도를 통해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셀도큐멘타에 선보인 ‘다니엘 노어’의 ‘Expiration Movement’(2017). 세계적인 국제미술행사로 다시 한번 각인된 2017년 카셀도큐멘타는 전체 예산 약 420억원을 카셀시와 헤센주의 지원, 그리고 독일 연방문화원의 후원으로 마련했다. 카셀의 성장 동력은 파격적인 내용 외에도 지자체와 시민들의 예술지원과 의지에 있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선 정부나 지자체가 어째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관련 기사나 글에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지원하느냐”는 불만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일종의 ‘특혜’라는 시선도 있다.
맞는 말이다. 예술인들의 예술 활동은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것이 맞고, 현재 예술계에서 행해지는 각종 지원은 소득의 일부분을 국가에 납부하는 돈이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술만 해도 창작지원금을 비롯한 창작공간 조성에 필요한 재원을 세금으로 충당한다.
문제는 ‘예술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과 세금지원이라는 두 인식의 충돌이다.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 혹은 불평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가들의 사명감 및 그로 인한 사회 공헌, 공공성을 단순히 사적 기호와 욕망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교육의 부재와, 예술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거나, 시장과의 균형을 위한 순수예술지원의 당위성 등을 수긍할 만한 실질적인 기회조차 드물기 때문이다.
예술계 또한 어째서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이 보편적 사회보장제도 내에서의 지원과 달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좀처럼 답하지 않는다. 예술의 비물질적 가치를 기준으로 한 지원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공감의 장’이 요구됨에도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내는 세금이 아깝다고 하면서도 정작 당신들이 낸 세금으로 만든 작품을 관람하지 않는 오늘은 아쉽다. 실제로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2018년 문화향수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지난 1년간 미술전시 관람률은 약 15%로, 밑바닥을 맴돈다. 연극(14.4%)과 뮤지컬(13%)은 민망한 수준이다.
다행히 과거 대비 전반적으로 나아지고는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소득에 따른 편차와 장르 간 편중이 심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예술계는 작품의 특성과 질에 관심을 기울여야 옳다. 그러나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전시나 공연인 만큼 적극적으로 누리려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이 태도는 단순히 무언가를 보는 것을 넘어 ‘예술의 쓸모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물론 예술경험을 통한 향유와 예술품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납세자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예술현장을 찾자. 지원의 못마땅함이 공감으로 대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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