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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2.07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자가당착
  2. 2019.01.24 도시 흉물 양산 ‘건축물미술작품제도’ 필요한가
  3. 2019.01.10 예술과 똥

지난 1일 임명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2015년 한 칼럼을 통해 “관장 공모 형식은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관에 관장이 꼭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역량 있는 적임자가 응모할 수 없는 구조”라고 썼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공모로 뽑는 현행 제도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불과 3년 만에 자신의 발언을 뒤집었다. 정권이 바뀌자 없애야 한다던 관장 공모에 나선 모순을 드러냈고, 제도 자체를 ‘촌스럽다’고까지 한 소신은 온데간데없이 임명장을 받았다. 윤 관장은 같은 칼럼에서 당시 관장 선임을 차일피일 미루던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해 인사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며 질타하기도 했다. 한데 문체부는 이번에도 인사 잡음을 냈다. 공직자의 최소 기준인 역량평가를 건너뛰려다 이미 속으로 정해놓은 ‘코드 인사’를 밀어주려 한다는 논란에 휩싸였고, 역량평가를 통과한 후보가 있음에도 탈락한 이들에게 재평가라는 혜택을 줘 특혜 시비가 일었다. 그 중심에는 윤 관장이 있었다.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1988). ‘다다익선’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징이지만 1년째 꺼져 있다. 문체부는 지난 1일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임명했으나 불공정 특혜 및 정권 코드 논란으로 시작부터 어둡다. ⓒ 국립현대미술관

 

윤 관장은 잡음의 배경인 지금의 문체부는 나무라지 않았다. 특혜를 거부하지도, 석연치 않은 인선 과정에서 발을 빼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처신은 부조리와 불평등, 반민주적인 것에 함몰되는 세태를 꾸짖던 진보 지식인으로서의 위치와 가깝지 않다. 2002년 발간한 비평서 <미술본색>에서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들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던 준엄한 평론가와도 거리가 있다.

 

예전 같으면 진영, 색깔, 코드, 특혜라는 단어만 들어도 버럭했을 그가 침묵으로 넘겼다는 점은 2013년 한 글에서 패거리 의식과 인맥 제일주의를 미술계의 고질적 병폐이자 ‘근친상간의 구조’라며 격하게 표현한 예와 상반된다. 결과적으로 당착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윤 관장이 한국미술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적임자인지는 의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로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을 다루는 데 비해 그는 근대미술 이론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 미술관장 경험이 없어 정책 및 경영 능력도 검증되지 않았고, 더구나 첫 역량평가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문체부는 공정·공평해야 할 기회를 갖가지 의혹, 논란으로 채웠다. 미술인들이 그런 문체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윤 관장이 역량평가를 두 번 받았다는 사실도 끝내 문체부가 숨기려 했다는 언론보도가 사실이라면 미술인들의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미술인들은 부도덕, 불의한 세상과 부당한 권력에 맞선 민중적 사고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윤관장에게도 스스로 떳떳했는지 되물을 것이다. ‘한국에서 줄 없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라던 <미술본색>에서의 역설이 실은 타자화한 본인의 민낯이었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미술계의 갖은 연(緣)을 적폐로 규정하며 작가들의 의식 부재와 속물근성을 지적해온 그의 진실성에 금이 간 것이, 불합리함의 타파를 통한 참다운 민주주의 실현 및 사회변혁을 담은 그동안의 말과 글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지게끔 한 행태가. 이제 윤 관장은 이런 안타까움, 의혹과 비판을 불식시킬 만큼 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만 한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Posted by Kh-art

공공장소에 놓인 미술을 공공미술이라 한다. 수준 높은 공공미술은 시대의 번역이자 정체성을 반영하는 기호이면서, 인간 감성을 환기시키는 심리 환경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공공미술을 일컬어 ‘공공재’라고도 부른다. 대가 없이 불특정 다수가 공동으로 마음껏 향유할 수 있고, 사회 구성원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공미술을 공공재라고 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의 제작·설치 비용을 민간이 떠안는다. 정부지원금은 없다. 도리어 거리를 오가는 다중의 선호를 고려해야 하고, 적절한지 여부를 다루는 지자체 심의까지 거쳐야 한다. 내 땅에 내 돈으로 세우는 것임에도 그렇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건축물 준공검사도 받기 힘들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야 한다. 1만㎡ 이상 건축물을 신축 및 증축할 경우 건축비용의 1% 이하를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하도록 한 건축물미술작품제도 탓이다.

 

고단한 삶과 현실, 노동의 고귀함을 담은 조너선 브로프스키의 ‘해머링 맨’(2002·광화문 흥국생명 빌딩)은 대표적 거리 미술작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축물 미술작품은 도시 흉물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홍경한

 

본질은 사유재인데 공공재라는 무게를 강요하는 이 희한한 제도는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당시 권장사항으로 출발해, 1995년 의무화됐다. 그 배경에는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 및 일자리 창출을 통한 민생고 해결,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과 도시환경 개선이라는 구실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하지만 명분과 달리 이 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연간 1000억원대로 시장이 커지자 거간꾼들이 끼어들었고, 공공미술은 공공조형물 ‘사업’으로 둔갑했다. 소수의 전문 업체와 작가들이 설치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재산 활용의 제약에 건축주들의 불만도 쌓였다. 이는 이면계약, 꺾기 등의 편법과 심사위원 로비, 매수, 청탁과 같은 위법으로 이어졌다. 작품별 1억~2억원이 넘는 게 지천이지만 정작 작가들의 형편 역시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 하청업자로 전락했다. 이리저리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손에 쥘 몫은 거의 없다. 생존권 보장은커녕 불량 조형물 생산에 일조한다는 오해만 샀다.

 

실제로 지난 20여년간 설치된 1만8000여점의 건축물 미술작품 대부분은 미학적 가치를 따지기 어렵다. 세계적인 거장 데니스 오펜하임의 유작 ‘꽃의 내부’를 무단 철거한 뒤 고물상에 팔아넘긴 부산 해운대구 사건처럼 사후 관리에 대한 인식도 엉망이기 일쑤다.

 

이쯤에 되묻게 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가 오늘날 과연 필요한가이다. 앞에서 벌고 뒤로 밑지더라도 당장은 먹고살아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재료비도 안되는 예산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작가들, 매일 시각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시민들, 내 재산 내 마음대로 못하는 건축주 등 어느 면에서든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업체와 브로커들의 배만 불리는 이 제도는 시효를 다했다. 도시 흉물 양산의 원인인 이 낡은 제도를 이제 폐지할 때가 됐다. 그럼에도 공공미술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국가 예산으로 문화소외지역 등에 설치하고 기관 공모로 작가를 선정하는 것이 옳다. 조세부담에 대한 국민 동의 아래 장소와 규모를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재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Posted by Kh-art

역사를 통틀어 예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당대 권력자를 비롯해 부유한 상인들, 그림을 주문했던 역대 숱한 이들의 품 안에서 안위했다.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들 또한 그 대가를 취하며 창작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자본에 종속된 예술가로 해석하는 건 무리이다. 그들 곁에는 구스타브 카유보트나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페기 구겐하임 같은 후원자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이 안목 높은 예술 우군들은 브뤼야스가 쿠르베에게 그러했듯 ‘예술가는 존경받을 만한 권리를 지녔다’고 봤다.

 

데미안 허스트의 ‘Aspect of Katie Ishtar ¥o-landi’,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 2017.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는 자본과 예술의 관계방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동시대 미술작가 중 한 명이다. ⓒ홍경한

 

작가들도 자본의 과잉 간섭, 자본으로 인한 예술의 자율성 침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현명하게 이해했다. 쾌감의 대상이자 우리를 더럽히는 배설물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똥과 돈을 등치시킨 피에로 만초니처럼 자본과 예술의 관계방식을 알고 있었고, 자산의 예술전용에 내재된 문화정신의 존중과 예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균형’을 추구했다.

 

하지만 균형이 보편적인 건 아니다. 사실상 적지 않은 수의 예술가들은 예술에 대한 자본의 과도한 참견과 통상적인 경제기준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예술이 어째서 예술일 수 있는지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며, 어설픈 시장중심 정책에도 대립하지 않는다. 새로운 모더니티 창출에 관한 고민은 당연히 없거나 적다.

 

대신 자신의 예술이 대중에게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보다 관심을 기울인다. 취향에 간택 받기를 원하고, 시장 선택체계에 비굴할 정도로 읍소한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한국 미술계에서 예술이 지닌 ‘섹시함’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자주성, 독자성은 화석화된 지 오래다.

 

문제는 예술가들이 예술의 가치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채 자본에 기생하도록 구조화하는데 앞장서는 곳이 다름 아닌 정부라는 데 있다. 실제로 정부는 예술경영지원센터 같은 산하기관을 통해 작가들에게까지 시장 좌판 깔 듯 장사하라며 부추기고 있다. 판로개척이라는 미명 아래 유통질서마저 교란하는 이 한심한 정책을 수년째 지속 중이다.

여기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발표해온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은 ‘미술시장진흥 계획’의 오판이기 일쑤다. 최근 공개된 ‘예비 전속작가제 지원사업’처럼 뭔가 그럴듯한 정책도 결국 알량한 돈 몇 푼으로 때우겠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근본적인 체질 변화와 예술에 관한 의식 개선과는 거리가 있다.

 

예술은 자본의 품 안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예술은 일반 경제적 기준만으론 평가될 수 없는 상징재화이며, 상징재화의 의미는 문화예술의 자율성 내에서 완성된다. 특히 문화예술의 자율성은 통상의 경제적 잣대에 대립할수록 가치를 획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역시 균형이다. 즉, 예술의 독립성과 작가적 신념을 침해하는 자본권력에 대한 경계와 자본을 통한 예술의 가치 확보라는 분동의 무게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 균형을 잡아주는 것에 있다. 지금처럼 ‘아티스트피’를 준다면서 소고기마냥 작가 등급을 매기고, 철학 없이 뭐든 돈으로 때우려는 습성은 예술과 똥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