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미술은 오늘의 의제를 예술을 통해 해석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모더니티를 생성하는 데 방점을 둔다. 이는 전 지구적 현상으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비평가든 기획자든 그들의 시각은 국지적이지 않다. 글로벌 흐름이 만들어내는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이해한다.
작가들도 매한가지다.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이기도 한 동시대성을 발판으로 미적·물리적 확장을 끊임없이 도모한다. 특히 시대흐름에 신속하게 반응하는 젊은 작가들은 동시대 미술 특유의 영토 구분 없는 교류에 민감하며 자신만의 미술언어로 지구촌 곳곳의 예술현장에 서기 위해 부단히 경주한다.
하지만 세계로의 접근을 위한 ‘통로’는 대체로 작가들 개별 노력에 의해 마련된다. 낡은 교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술대학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의 해외지원정책이란 것도 유한하거나 빈약해 보편적 체감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잭슨 폴록, One: Number 31, 1950. 유럽 미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미국 미술은 1940년대 등장한 잭슨 폴록에 이르러 탈 유럽화가 가능했다. 미국이 동시대 미술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작가 작품에 관한 이론적 논쟁과 더불어 당시 미국 정부의 계획적인 지원과 정책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물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등재되는 정보와 국공립미술관 및 지자체들이 운영하는 창작공간에서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은 작가 경쟁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의 카셀 및 베니스 투어프로젝트만 해도 작가들의 견문을 넓히는 시기적절한 투자였다. 그러나 아직까진 동시대 미술 담론의 저장소이자, 능동적 활동에 있어 온전한 디딤돌이라 판단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정부와 공공기관은 단순 자료를 제공하는 수준인 게 태반이고 그나마도 단기 혹은 일회성 지원,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폐쇄적 운영, 지원금 사용 영역 제한 등의 제약이 적지 않은 탓이다. 더구나 미술을 고급 상업 콘텐츠로 해석하는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은 되레 동시대 미술의 결과 다른 편협한 가치를 생산한다.
그렇다면 해외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는 한국문화원 같은 재외기관은 어떠할까. 밖에 있으니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작가들은 기회 부족에 따른 절박함을 헐값에 이용하는 일부 재외문화원의 행태를 해악이라 정의한다.
국제적 작가 양성 차원에서 작가들을 초대하지만 항공료도 되지 않는 예산으로 재료비와 운송비를 해결하라 하고, 통관절차까지 작가에게 전가하니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다. 심지어 현지에서 작품을 보관할 창고를 구하는 것도 작가 몫이다. 결국 손 하나 까닥 않고 전시공간을 채우는 착취가 나라 밖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경험 많은 예술가들은 정부나 정부출연기관에 의존해서는 한국이라는 문지방을 넘기도 어렵거니와 외국에서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조차 개인 인맥을 활용해 헤쳐 나간다고 말한다. 이는 그만큼 기댈 곳이 없다는 뜻이자 각자 알아서 하지 않는 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작가들의 역할과 그에 따른 긍정성을 바란다면 보다 넓은 영역으로의 진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의지에 맞춰 공적 관심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미술의 우수성을 알린다는 측면에서 합리적 대우에 소홀하지 않아야 하고, 무리 없이 안착할 수 있도록 행정 시스템도 개선해야 한다. 지금처럼 무늬만 지원이거나 홀대해선 세계적인 한국 작가 배출은커녕 빠르게 변화하는 당대 미술 흐름마저 따라잡을 수 없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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