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가 ‘취한 다음 꽃을 본다(醉後看花)’라는 글을 쓴 그림이다. 무엇에 취해 꽃이 보일까? 송나라의 시인 임포가 서호에서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아 혼자 살았다는 은유를 그리면서, 친구도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에 작은 집에서 친구 한둘과 이야기를 즐기는 ‘은일’은 지혜의 문화였다.
‘은일’은 고립이 아니다. 은일은 나만의 시공간을 가져서 마음의 평정을 찾는 방법이다. 은일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산은(山隱), 시은(市隱), 조은(朝隱)이다. 은일은 어디서든 가능했다. 아름다운 자연에서,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정치의 격돌에서 틈새 시간을 이용한 마음의 은일이다.
한·중·일의 은일은 강조점이 다르다. 중국은 나라가 큰 만큼 복잡한 권력투쟁 속에서 생존을 위한 정치적 은일이 발달했다. 일본은 섬나라라서 인간관계를 밀착하지 않고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은일이 중요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아서 은일을 해도, 벗과 이야기하는 따뜻한 은일을 좋아했다.
요즘 ‘혼자’가 유행이란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혼자가 아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수많은 친구들에게 자신을 발신하고 있다. 대화방식이 바뀌었을 뿐, 혼자가 아니다. 다만 잠시 마음의 평정을 위한 나만의 시공간에서 은일이다. 우리의 은일에는 늘 벗이 함께 있다고 기억하자. 당신은 외톨이가 아니다.
왜 지금 한국에서 은일이 필요한가? 공감의 강박에 지쳤기 때문이다. 공감의 명분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속속들이 알려고 달려들었다가, 사라져 버린 후 상처를 입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째로 이해하려다 지쳤다. 이제 은일로 맑은 마음을 찾는 동안 누군가가 마음 곁에 서주기를 바란다.
은일은 소통의 강박에서 마음을 구해준다. 수직적 구조에서 권력의 의견이 아래로 소통되기를 기대한다. 경청하다가 상하좌우를 살펴서 모나지 않게 하려다가 침묵으로 마무리한다. 차라리 소통의 무게를 가볍게 하면 어떨까? 그때 김홍도의 ‘취한 다음 꽃을 본다’는 화두를 깨달을지 모른다.
선승혜 |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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