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큐레이터, 동료 작가, 이웃, 가족 등 주변 지인의 초상을 평생 화폭에 담아온 앨리스 닐은 모델과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혼을 포착하는 화가’라는 수식어는 그냥 얻은 게 아니었다. 모델들은 그 과정이 불편했지만, 화가는 그 시간을 통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잡아냈다. 모델을 향한 화가의 통찰력과, 화가를 대면한 모델의 친밀하기도, 불편하기도 한 시선이 캔버스 위에 교차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형태를 만들었다.
앨리스 닐, 지니, 1984, 캔버스에 유채
작가의 며느리였던 지니는 종종 앨리스의 모델이 되어 의자에 앉았다. 발랄했던 젊은 날의 하루, 아이를 안고 있는 행복한 순간이 작품으로 남았다. 80대의 노화가 앞에 지니는 다시 앉았다. 제비꽃 색 원피스를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지니의 모습에서 앨리스가 발견한 것은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깊은 상실감이었다. 눈 쌓인 바깥세상의 냉기가 실내로 고스란히 들어오는 것 같은 하얀 풍경 안에 앉아 있는 지니는, 복잡한 상념에 젖은 눈빛으로 앨리스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해 어머니를 떠나보낸 지니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문득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슬픔에 무너지곤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언젠가는 이 바닥 없는 슬픔에도 무뎌질 터였다.
말기암 진단을 받고,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화가는, 지니가 겪어내는 애도의 시간을 화폭에 담으면서,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보내야 할 감정의 터널을 엿볼 수 있었다. 결국 다 지나가겠지만, 캔버스를 사이에 두고 앉았던 모델과 화가 사이의 대화는 화면 위에 남아, 문득문득 그 순간의 감정을 상기시켜 줄 터였다. 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정직하게 캔버스를 만났던 앨리스 닐은 이 작품을 마무리한 1984년, 세상을 떠났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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