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

청계천 메리야스 차림의 사내가 아랫도리가 시원한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는다. 숱 많은 검은 머리의 사내는 아직 젊고, 아이는 그런 아빠의 품이 넉넉하여 공중에 뜬 채로도 평온하다. 동네 소박한 식당 앞, 막걸리라도 한 잔 걸쳐 흥이 난 아빠가 춤사위를 대신해 아이를 어르는 여름밤. 그런 평범한 밤일 것이라 착각했다. 대책 없이 떠나야 하는 재개발이 두려워 아이 품에 기댄 채 흐느끼는 여린 아빠라는 사실은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이 한 장의 사진도 오독하는 판에 제멋대로의 해석과 이해가 뒤엉킨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파란만장할 것일까. 어쩌면 아들은 아빠의 팔뚝 안에서 든든했고, 아빠는 그런 아들을 의지해 그 뜨거운 여름날들을 지나온 것만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고 난 뒤 사내가 이내 멀쩡하다.. 더보기
수도사의 불륜이 낳은 그림 피렌체에 가면 보티첼리만큼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는 화가를 만날 수 있다. 보티첼리의 스승 프라 필리포 리피다. 그래서인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 속 시모네타만큼 어여쁜 여자들이 그의 그림에 넘쳐난다. 어쩌면 그녀들은 보티첼리보다 덜 이상화되어 있는 동시에 훨씬 더 관능적인 여자들임에 틀림없다. 프라(fra)는 이탈리아어로 ‘승려’라는 뜻이다. 고아가 된 리피는 15세 무렵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카르멜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카르미네 수도원에 입단해 평생 수도사 겸 화가로 살게 된다. 미술사상 그 누구보다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많은 일화와 추문을 남겼다. 술과 여색을 탐했으며, 술고래에 사기꾼으로 알려진 그는 방탕하고 분방한 일생을 보냈지만, 예술에서만큼은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빛의 교차를 .. 더보기
엄마가 엄마에게 5·18 민주항쟁의 첫 희생자는 김경철이었다. 어렸을 적 약을 잘못 먹어 귀가 먼 스물여덟의 농아. 국제양화점에서 신발 만들면서 백일을 갓 넘긴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소박한 가장. 광주버스터미널에서 계엄군들이 그를 학생으로 오인해 둘러쌌을 때 그는 구령을 따라 부르지 못해, 진짜 벙어리가 말을 못한다는 죄로 목숨을 잃었다. 말을 하는 이조차도 말문이 막힐 기막히게 억울한 시절이었다. 이제 그는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1-1이라는 번호로 그날의 끔찍함을 증언한다. 그런 아들 곁에서 소복을 입고 선 어머니 임근단 여사.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머리 위편, 잔디 안에 심어진 진갈색 나무에 유독 눈길이 가곤 한다. 그것은 아직 봄이 먼 날들을 버티다 누렇게 변해버린 어머니의 가슴속 같기도 하.. 더보기
사냥의 여신이 된 왕의 애첩 18세기 로코코 예술의 핵심 인물은 마담 퐁파두르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들은 로코코 예술을 마담 퐁파두르 양식으로 부른다. 마담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20여년 동안 문화예술의 후견인은 물론 섭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창의력이 뛰어난 여성이 되었다. 평민 출신이었던 퐁파두르가 왕의 여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점성술에 심취했던 어머니 덕분이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의 딸이 미래에 왕의 여자가 된다는 점술을 들은 모친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한 모든 사교술과 매너, 인문학과 음악·예술 등 다방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한 집중교육에 들어간 것. 다행히도 총명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퐁파두르는 모든 방면에 탁월한 .. 더보기
프란체스카의 부활 오랫동안 서양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예기치 못한 화가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런 화가다. 전공자들도 처음엔 미술사에서 중요하다고 자리매김된 작품들에 시선을 둔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학이나 미술사를 가르치게 되면, 미술사에서 배제된 작품들에 눈길이 간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이 생기는 것이다. 이탈리아 산세폴크로에 있는 ‘부활’이라는 그림은 미술사에서 과소평가된 작품 중 하나였다. 산세폴크로가 너무 외진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다빈치나 라파엘의 그림과 비교할 때 너무 조용하고 유혹적이지도 않아 재미도 감동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다른 용도로 쓰이기 위해 벽화가 지워졌고, 19세기에 회벽이 깨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해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화로 떠.. 더보기
덧댐과 덧없음 그는 애초에 이런 무거운 주제를 다룰 생각이 없었다. 2001년 불광동으로 작업실을 옮겼을 때만 해도 강홍구에게는 시골과 도시의 경계쯤에 놓인 이 지역이 그저 흥미로웠을 뿐이다. 예상 밖의 근사한 녹지, 그 주변부의 정감어린 촌스러움, 그럼에도 서울시라는 행정 구역이 갖는 도시적 욕망. 이 묘한 지역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작가인 그의 기록 본능을 부추겼다. 그렇기는 해도, 본래 창작 활동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딱히 이 기록에 특별한 무게를 두지는 않았다. 2004년 은평 뉴타운 계획이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갑자기 매일같이 보던 익숙한 풍경이 살풍경으로 변하면서, 그는 본의 아니게 재개발의 현실을 오랫동안 기록해온 뛰어.. 더보기
“이 집은 당신만의 집이 아닙니다” 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이 덧대어져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아니라 거주인이 시간과 더불어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건축이 거주인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서 건축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그 건축이 담아야 하는 시간을 재는 지혜를 가져 그 풍경의 변화를 짐작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기 마련이며, 그렇지 못하면 시간을 견디지 못해 소멸되거나 아니면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기 위한 비용이 만만찮게 들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건강한.. 더보기
섬세와 실용의 속 깊은 만남 미국 뉴욕에 가면, 마치 숨겨놓은 애인을 만나듯 홀로 은밀히 다녀오는 곳이 있다. 맨해튼 최북단,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한 클로이스터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분관인 클로이스터는 프랑스에 있던 중세 수도원 몇 개를 가져와 그대로 재조립한 중세 유럽예술의 보고다.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로베르 캉팽의 ‘수태고지’다. 플랑드르의 거장인 캉팽은 인류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고지하러 온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의 모습을 1400년대 플랑드르 지방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왼쪽은 기증자인 잉겔브레히트 부부로 당시 유명 상인이다. 상인계급의 봉헌자들은 수태고지의 순간이 마치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으며, 그 순간을.. 더보기
고고학 제목은 꽤 거창하다. 거기에 속아 실제 작품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디에 쓰는 건지도 모를 물체들이 고인돌이나 탑처럼 심각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가벼운 말장난에 속은 기분이지만 작품이 풍기는 진지함에 대놓고 딴죽을 걸 수는 없는 상황이랄까. 상상마당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고고학’을 위해 사진가 권도연은 아이들의 역할 놀이처럼 스스로 고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함께 사는 강아지를 데리고 놀이터로 산책을 나가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팠으니 말이다. 주택가 땅 밑에는 스티로폼, 컴퓨터 부품, 캔 등 고만고만한 물건들이 숨어 있었다. 때로는 땅 위에서 말라비틀어진 무나 지우개 따위를 덤으로 얻기도 했다. 작가의 눈속임은 감쪽같아서 버섯처럼 보이는 고인돌은 스티로폼이고, 무처럼 보이는 녀석.. 더보기
뜻밖의 삶을 춤추어라! 마티스는 춤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춤은 그의 인생의 활기였다. 그런 그에게 1909년 러시아 최고의 미술품 애호가로 유명했던 섬유왕 세르게이 슈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이 자신의 저택 계단 벽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한다. 바로 전년 를 사들였던 슈추킨은 자신이 구입한 그림에 만족하고, 춤 그림을 그려보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마티스는 슈추킨의 찬사와 격려에 고무되어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영감에 휩싸여 유화 스케치인 을 완성했다. 러시아 발레단의 춤, 카탈류냐 해변에서 어부들의 춤, ‘파랑돌’이라는 프로방스 지방의 춤 등에서 영감을 받은 마티스는 발랄함과 유례없는 활기, 과단성이 결합되어 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어 그린 는 더욱 격정적인 색조와 원초적이며 강렬한 춤의 .. 더보기
침묵과 낭만 부산만큼 여행의 정석이 난무하는 곳도 드물다. 다들 부산하면 조용필 노랫말 속의 동백섬이나 해운대의 영화제를 자동으로 연결시킨다. 간 김에 자갈치시장에 들르거나 ‘부산오뎅’을 먹는 건 빠뜨릴 수 없는 행사처럼 얘기한다. 이제는 여기에 유행처럼 국제시장까지 한몫 거들고 있다. 이런 식의 답사 코스는 한편으로는 뻔하지만, 유독 사람들이 식지 않고 쉬지 않고 부산에서 얘깃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뎅은 부산 것이 맛있고, 쌀쌀한 날 부산에서 먹는다면 더 맛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굳이 꽃이 펴 있지 않더라도 동백섬에서 갈매기가 슬피 우는 소리를 듣는 일 또한 조용필의 목소리를 듣는 것 이상으로 운치 있다. 사진가 이갑철이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소개하고 있는 부산 사진에는 왜 이.. 더보기
아몬드 나뭇가지에 핀 꿈 아몬드 꽃은 매화처럼 아주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이 작품은 1890년 반 고흐가 아를에서 고갱과의 불화 끝에 귀를 자르고, 자발적으로 들어간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이다. 사랑하는 동생 테오가 아들을 낳자, 조카의 탄생을 기념하는 선물로 주려고 그린 것. 그것도 파란 눈을 가진, 자기와 똑같은 ‘빈센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조카를 위해서 말이다. 이른 봄에 피는 아몬드 꽃처럼 조카가 고통을 잘 극복하고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자살한 해의 마지막 봄에 그려진 그림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완성한 후 몸져누워 몇 주간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기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 같다. 삼촌도 .. 더보기
유령 도시 얼마 전 익숙한 거리의 가게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를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포털사이트에서 거리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수월하게 가게 이름을 찾고 나자, 분명 이제는 없어져 버린 옆 가게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아주 잠시, 뭔가 비현실적인 공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정작 몸은 컴퓨터 앞에 있는데 실제로는 과거로 돌아가 그 거리에 서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영상이 과거에 촬영된 것이 아니라 ‘실’시간 이미지라고 느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이 아니라 과거 그 거리에 서 있다고 착각할 만큼 눈앞에 보이는 화면을 더 믿었던 셈이다. 어쩌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실시간으로 거리가 스캔되고 있는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으면서도 그곳을 보.. 더보기
아주 안타깝고 아까운, 한 여성화가 너무 일찍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여성화가가 있었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20세기 최고의 화가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당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도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한 존재였다. 1898년 독일 브레멘 근교의 예술인 공동체 마을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한 모더존은 그곳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미술가들을 만나고 우정을 쌓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그의 부인이 된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난 곳도 그곳이다. 모더존은 동료 화가였던 오토 모더존과 결혼했고, 짧은 공동작업 시간도 가지지만, 결혼과 작업에 회의를 느껴 파리로 떠난다. 표현에 있어 형태를 최대한 단순화하고자 했던 그가 선택한 파리는 예술적 영감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만들어주는 .. 더보기
가족 앨범 뭐니 뭐니 해도 사진의 탄생이 우리에게 선물한 최고는 가족사진이다. 물론 대형 카메라 앞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버텨야 간신히 얻을 수 있던 초기의 비싼 사진관 사진과, 누르기만 하면 나머지는 카메라가 다 알아서 해주는 ‘똑딱이’ 카메라 시대의 가족사진은 그 위상도 성격도 많이 다르다. 필름 카메라가 중산층의 필수품이던 시절을 거쳐 스마트폰 시대 우리의 모든 기념일은 이제 낱낱이 기록된다. 그러므로 가족사진은 개인의 작은 역사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양식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거대한 시각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비록 누구나 찍기에 너무 흔하고 세속적인 사진으로 치부되지만, 사진가들도 가족이라는 주제를 많이 다룬다. 그러나 사진가가 찍은 가족사진이 사진관 사진만큼이나 기술적으로 더 아름답고 완벽할 거라.. 더보기
동네를 잃어버린 주소 오래전의 일인데, 외국유학을 갓 다녀온 한 조각가의 푸념을 듣게 되었다. 청계천 철물상에 가서 직각으로 된 자를 만들어 달랬더니 어느 한 곳도 90도 정각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슬며시 외국과 비교하며 직각도 만들지 못하는 한국의 장인정신 부재를 트집했다. 그렇게 비난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가구들을 보면 자로 잰 듯한 정확함이 없는 게 사실이다. 어딘가 틀어지고 어딘가 모자라는 불완전한 상태를 두고 한국인이 가진 해학이며 미학이라고 학술적으로 논문을 쓰며 해석까지 해왔다. 건축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옛 건축에서 궁궐이나 사찰의 주된 건물을 얼핏 보면 좌우대칭의 당당한 입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측으로 따지면 실제는 정확한 대칭이 아닌 게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더보기
메멘토모리와 카르페디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전도서 1장 1절).” 라틴어 ‘바니타스(vanitas·영어로는 vanity)’는 허무, 무상, 허영을 뜻한다. 바니타스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거의 모든 정물화의 기본 주제다. 그중에서도 해골이 등장하는 정물화를 특별히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부른다. 인생이 허무한 건 인간이 죽음 앞에 무력하기 때문이고, 해골만큼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티프는 없기 때문이다. 초기 바니타스 정물의 대표작인 바르텔 브륀 1세가 그린 ‘제인-로이즈 티시에르의 초상화 뒤편에 그려진 바니타스 정물’에는 두개골이 벽감(니치)에 놓여있다. 두개골은 이미 턱뼈가 빠져 있는데, 인체가 점차 해체, 소멸되어 가는 .. 더보기
소소산수 겨우내 이 사진을 책장에 걸쳐 두고 함께 봄을 기다렸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정말 봄이다. 오히려 눈 내리는 겨울은 참을 만한데, 요즘처럼 사방에서 봄 기운이 보일락 말락하면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낸다. 한껏 연둣빛이 오른 새순도 보고 싶고, 제멋대로 흐드러지는 진달래도 그리워진다. 김진호가 찍은 사진 속에서는 그런 봄이 이제 막 오고 있다. 콘크리트 담장 아래로는 진분홍 꽃이 줄지어 피었다. 실제로 가보면 촌스러울 새파란 지붕도 진분홍과 짝을 이루니 꽤 개성있어 보인다. 길 건너 논밭은 빈혈을 앓듯 아직 푸석한 걸로 보아 꽤 이른 봄인 듯한데, 유독 파랑 지붕 집 뒤편만 꽃놀이가 한창이다. 산수유며 매화, 수선화까지가 한꺼번에 유난스럽기는 어려운 일, 어쩌면 부지런한 집주인이 장에서 구해다 꾸며놓은 .. 더보기
상처 입은 삶의 포에지 실연을 한 후 몽유병 환자처럼 어떤 의지도 없이 미술관에 갔다. 그때 내 심경의 이마주는 길고 가느다란 자코메티의 걷고 있는 인물상과 접촉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와 절망을 안고 찾아가기엔 미술관만 한 곳이 없다. 거기엔 나보다 더 예민하고 민감하고 처절하게 삶과 사랑에 배반당한 존재들의 환대(?)가 있으니까. 스위스 출신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기다랗고 야위고, 날카롭고 납작하고, 의식 없이 출몰하는 조각으로 파리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이후 뉴욕에서 열린 두 차례의 전람회(1948, 1950년)와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장 폴 사르트르가 쓴 작품론으로 미국에서 더 명성을 떨쳤다. 절친이던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혹은 유섭 카쉬가 찍은 자코메티의 얼굴은 그대로 그의 작품이다. 꾸미지 .. 더보기
혼종의 탄생 도대체 이 생명체의 정체를 뭐라 불러야 할까. 다리가 여덟 달린 고릴라 아니면 고릴라의 얼굴을 한 문어. 어쩌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처럼 문어를 통째로 잡아먹고 있는 고릴라인지도 모른다. 이 괴생명체는 아직도 진화를 멈추지 않았는지 머리 위로는 더듬이가 솟아나고 몸통에는 날개까지 달고 있다. 물과 뭍, 하늘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존재는 과연 슈퍼 생명체인가 아니면 그 어느 한 부분도 온전치 않은 끔찍한 기형 생명체에 불과한 것일까. 조잡한 싸구려 모형을 재조립해 탄생시킨 이미지 앞에서 심각한 척 이런 식의 궁금증을 갖는 일이 어쩌면 과대망상에 가까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켄타우로스나 인어공주 같은 수많은 전설 속 반인반수는 지금도 여전히 동화와 공상과학 세계를 통해 변형된 캐릭터로 재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