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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가들 상인을 겸하다-최초의 화상은 화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4)가 시스틴 성당에서 천지창조를 그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 <고뇌와 절정>(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을 보면 그림을 주문한 율리우스 2세와 다투는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분한 <고뇌와 절정>. 이 작품에는 시스틴 성당 천장화를 주문한 율리유수 2세와 미켈란젤로가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다툼의 원인은 돈 때문이었다. 작업에 필요한 대금을 계약대로 주지 않고 지급일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인문학이 절정에 이르고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후원이 가장 융성했던 르네상스 기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화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놓고 다음 소장가나 컬렉터를 찾는 대신 당시의 화가들은 주문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즉 화가들의 자유의지로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주문에 의해 그림을 그렸고 주문자는 특정한 색을 지정하고, 초상화의 경우 어떤 모습으로 그려달라는 것을 계약서에 명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은 오늘날과는 달리 철저한 주문제작에 의한 상품이었고 여타의 공방에 물건을 주문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초상화 제작이 주를 이루었던 당시는 요즘의 맞춤양복을 주문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계약조건에서 화가들을 괴롭힌 것은 작품이 주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그림을 인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급한 경비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또 계약서에 의하면 당시 귀했던 금이나 금색을 사용한다던가, 울트라마린 블루를 사용하는 경우 특별히 몇 그램을 사용한다고 명시할 정도였다. 왜냐면 울트라마린 블루의 경우 동방에서 수입한 준보석인 청금석을 간 후 그 가루를 여러 번 물에 녹여 추출해내는 고급의 안료로 매우 고가였기 때문이다. 


또 사실적인 화풍으로 르네상스를 강타한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1573~ 1610)의 삶을 돌아보면 당시 미술품 유통구조를 대강이나 그려볼 수 있다.


1595년, 25세가 된 카라바조는 조수생활을 청산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스튜디오를 연다. 그의 그림을 팔아줄 마에스트로 발렌티노(Maestro Valentino)라는 화상을 만난 때문이다. 어렵게 그림을 기던 그는 화상 발렌티노를 통해 교황의 실력자인 고위성직자 프란체스코 델 몬테(Francesco Maria del Monte, 1549~1626)추기경의 눈에 들어 그의 처소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타고난 다혈질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은 내내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컬렉터들 덕분에 다행히 연명할 수 있었다. 

카라바조, <성 바울의 개종(Conversion of St. Paul or 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1600~01), 캔버스에 유화, 230x175cm, 이탈리아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성 바울의 개종>의 수난은 당시 화가들의 처지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이다. 작품을 주문받은 카라바조는 자신의 방식으로 말에서 떨어지는 바울을 그렸으나 성당 측은 당시의 성화들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인간적인 바울을 보고 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부했다

이 일로 <성 바울의 개종(초판)>은 성당을 책임지고 있던 사네시오 추기경(Cardinal Sannesio)이 작품가를 지불하고 소장하게 되었고 현재는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 케이티 홈즈가 결혼식을 올린 로마 근교의 카스텔로 오데스칼치 성에 소장되어있다. 


화가면서 화상이었던 루이스달과 렘브란트 

그의 역동적 화면 구성과 테네브리즘(Tenebrism)[각주:1]을 계승한 17C의 렘브란트, 루벤스 등은 그림을 파는 재주에서는 카라바조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이미 바로크시대(1600∼1700년대 중반)로 접어들면서 화가들은 중산층과 시민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던 시기로  이 시기 대표적인 화가들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물론 루이스달(Salomon van Ruysdael, 1600,1603?~1670),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등은 화가로서의 재주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화상으로서의 재주를 겸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루이스달(Salomon_van_Ruisdael), <Ferry on a River>(1649), 101.5x134.8cm, 미국 워싱턴DC National Gallery of Art

외교관으로 외국을 떠돈 루벤스는  헤롯왕의 영아학살을 주제로 한 <Massacre of the innocents>(1611-2).

그는 외국 귀족들의 취향을 파악해, 역사화를 주로 그렸다. 그림은 공방에서 대량제작했다. 


 루벤스는 화가이자 외교관이었으므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많아 귀족들과 친분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취향을 간파하고 주로 귀족들의 일대기나 위대함을 주제로 한 역사화를 그렸다. 게다가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 분업 방식을 통해 다량제작방식을 운용했다. 우선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이 색칠을 하고 루벤스가 마무리를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경우 루벤스는 자신이 그렸다는 의미로 ‘Rubens Pinxit’라는 사인을 남겼다. 또 풍속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풍속화를 잘 그리는 브로웨르(Adriaen Brouwer , 1605~1638)가 그린 그림을 사 그 위에 더 그려 자신의 그림으로 팔거나 풍속화에 재주가 있는 다른 화가의 제자나 또 다른 화가들을 고용해서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다. 

<카드놀이를 하는 농민들>(1630~40)브로웨르는 브라우버르로 불리기도 하는데 플랑드르 지방의 농민들의 삶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브로웨르<술에 취한 농민 The bitter drunk>


 렘브란트는 리히텐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면서 경쟁이 심한 풍속화를 피해 경쟁이 비교적 덜 한 초상화분야를 선택해서 화상 헨드릭 반 율렌버그 (Hendrick van Uylenburgh, c. 1587~1661) 의 중개로 명성을 얻은 다음 역사화, 단체 초상화, 풍경화 등으로 분야를 넓혔다. 


렘브란트, <The night  watch(혹은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렘 반 라위텐부르흐 민병대)>(1642), 캔버스에 오일, 
363x437cm, 네덜란드 라익스 미술관 Rijksmuseum 소장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도 여러 점 남겼다. 왼쪽은 1640년 제작한 자화상, 오른쪽은 1669년 제작한 자화상. 



 영국의 화가 호가스는 화가나 판화가로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돈을 내고 배울 형편도 되지 못했다.시계 기능공으로서 은세공 기술을 익혀 판화가로 특히 인기가 많은 풍자적 판화로 인기를 얻으며 부호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화상의 등장: 플랑드르 지역의 경제적 안정과 그림의 수요 증가

특히 플랑드르 지방의 17세기는 소위 ‘황금시대’(Golden Age)라 일컬어지는 경제적 성장은 렘브란트 혹은 루이스달과 같은 재주 있는 화가들의 지위만을 상승시킨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유명 화가들은 늘 금전적으로 어려웠다. 그것은 수요 부족 때문이 아니라 수요가 넘쳐난 때문이었다.


 해양왕국 스페인의 뒤를 이어 대양을 장악한 플랑드르 즉 오늘날의 네덜란드는 많은 중산층들이 생겨나고 그림에 대한 수요 또한 폭증하였다. 이렇게 수요가 많아지자 지배자들은 미술가의 자격제한을 철폐하고 미술가 길드가  해체되면서 너도나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등장했고 바야흐로 화가들의 범람시대를 맞게 되면서 그림의 공급과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는 7만점의 그림이 시장에 나왔으며 어떤 그림이건 소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에 나온 그림에 대해 질을 담보할 만한 장치가 필요했고 그 결과 그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화상을 신뢰하고 그들의 신용을 담보로 작품을 구입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즈음 또 다른 변화가 화상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는데 그것은 화가와 화상이 가입되어있는 길드의 미술품에 대한 수요는 고정되어있었다. 그 이유는 가격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공급이 수요와 같아야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미술품의 공개적인 매매를 확하게 반대했다. 공개매매는 통제 할 수 없는 미술품의 공급과잉으로 나타나 가격하락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alomon van Ruisdael, <View of Deventer Seen from the North-West>(1657), Oil on oak, 
52x76cm, 런던 National Gallery


하지만 그와 반대로 풍경화가 루이스달를 중심으로 한 하를렘(Haarlem)의 화가집단은 공개매매 즉 경매방식을 선택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 수요를 촉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은 1644년 하를렘 시장으로부터 그림을 공개판매 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미술품에 대한 수요를 자극함으로서 미술시장의 확대를 꾀하는 판매기법이 된 것이다. 


미술 시장의 출현과 발달

그리고 길드에 의해서 통제되던 미술시장의 시장적 행위들이 힘을 잃게 되면서 미술시장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경매결과가 그림을 소장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이렇게 미술시장이 급증하면서 새로운 판매방식과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고 점차 전문적인 화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에 의해 미술시장은 수 백 년 동안 발전을 거듭했다.  


화가들은 이즈음 작품 제작단가 절감방안을 연구하여 실천에 옮겼을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안목을 바탕으로 중요한 미술품이나 골동품 등을 사두었다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창조하기도 했다. 사실 렘브란트가 말년에 어렵게 보내게 된 것도 미리 사논 작품에 문제가 생겨 빛을 냈던 것이 원인이었다. 



*화가보다 그림중개상으로 더 열심히 활동했던 베르메르. 

왼쪽부터 차례대로 <A girl with pearl earing> 1665. <The Music Lesson(또는 A Lady at the Virginals with a Gentleman> ca.1662-5 <The Milkmaid>1658


또 유명한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도 자신의 그림중개인이 있었지만 스스로 화가보다는 중개인으로서 시간을 더 할애했다고 전해진다. 

인류역사상 ‘주식회사’를 처음으로 고안해 낸 네덜란드인들이 그림을 파는 전문 화상의 길도 열어간 것을 보면 역시 그들의 상재는 당 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글/정준모(문화정책, 국민대 초빙교수)

  1. tenebrae는 어둠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조가 창안한 극적인 명암대조법을 말한다. 한 줄기 빛이 화면에 쏟아지고,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대비시켜 주제를 강조하는 것으로 렘브란트가 즐겨 사용했다. 이처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명암의 표현은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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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