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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코코시대의 두 거장, 화가 와토와 화상 제르생

글/정준모(국민대 초빙교수, 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Rigaud Hyacinthe <Portrait of of Louis XIV of France, 루이 14세의 초상> 1701년 


절대왕정을 완성시킨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완성시킴으로서 프랑스의 영광을 실현시킨 그 시기부터 섭정시대까지 활동했던 와토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과 그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지방에 있던 유럽미술의 중심축을 프랑스로 옮겨왔다.

특히 루이 14세가 1715년 사망하자 프랑스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무려 72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소모적 전쟁과 사치로 엄청난 국가 부채에다 과다한 세금으로 허덕이던 프랑스는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해 오를레앙의 필립 공작(Philippe d‘Orl?ans, 1674~1723)이 통치하는 ‘레장스’(R?gence; 섭정)를 맞게 되었다.



                     루이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했던 오를레앙 필립공.


당시의 문인이자 계몽 사상가였던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섭정시기 8년(1715~1723)을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프랑스인 본연의 민족성을 되찾은 시기”였다고 말 할 만큼 획기적인 시기였다. 

                     
                                            Houdon의  볼테르 좌상



감시와 통제를 위해 루이 14세에 의해 강제이주 하다시피 했던 귀족들은 감옥처럼 지긋지긋한 했던 베르사이유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새로 집을 짓거나 저택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집안을 화려하고 섬세하게 하지만 때로는 조악할 만큼 장식을 과도하게 했는데 이 시기 이런 양식을 로코코(Rococo)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 화려하고 장식적인 화풍으로 로코코(Rococo)시대를 대표했던 장 앙투안 와토 (Watteau, Jean-Antoine, 1684~1721)는 이미 당대에 명성과 부를 이룬 화가였다. 단지 후세사람들이나 당사자 모두에게 아쉬운 것은 그가 불과 37살이 되던 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데 있다. 
그의 화풍은 로코코 회화의 창시자이자 대가답게 경쾌하고 뛰어난 붓놀림으로 마치 속사를 하듯 그림을 그려냈으며 당시 풍속이나 패션, 연극, 소풍장면 등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여 오늘날 사회사나 복식사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화려하고 온화한 자신만의 색채와 분위기를 완성시켜 독특한 자신의 화풍을 구사했는데 그의 동료들이었던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이 ‘사랑의 향연’이라고 부를 만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당시 귀족들의 전원 속의 삶을 그렸다.


그의 화풍은 당시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왕조문화의 궁전풍속을 비롯하여 주로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던, 밝고 우아하며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매력을 풍기는 풍속이나 취미에 적합한 화풍이었고 로코코회화 특유의 테마와 정서를 반영하는 그림이었다. 


자연을 충실하게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풍을 이은 다른 로코코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움이 있었는데 이런 그의 화풍을 당대 사람들은 ‘아연(雅宴: 페트 갈랑트 fete galante)’이라고 규정했다. 프랑스 미술이 로코코 풍을 완성시키면서 이탈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전 유럽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 중심에는 와토와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 샤르댕(Jean-Baptiste-Sim?on Chardin, 1699~1779)  같은 이 들이 있다. 


그리고 새롭게 파리가 귀족들의 삶의 본거지가 되고, 집안을 새롭게 장식하고 꾸미는 동안 급격히 커진 프랑스 특히 파리의 미술시장은 플랑드르지방의 새로운 시스템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북 유럽 일부를 제외한 유럽에서는 여전히 그림을 사고팔기 보다는 주문 제작이 중심을 이루었고 이런 구조는 약 3~4백년이나 주목할 만한 변화 없이 지속되어 새로운 미술이 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따라서 화가들도 고객들의 눈높이에 봉사하는 미술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의 뛰어난 상재는 미술시장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고 상업을 통해 급성장한 중산층들의 그림수요가 폭증하면서 미술시장도 급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어느 정도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파리에서도 미술시장의 수요가 확대되면서 이런 선진적인 화랑시스템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화상과 같은 미술 중개인, 대리인, 그리고 갤러리는 시간상으로 고작 400여년에 불과한 1600년 경 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100여년이 지나 견고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절대왕정을 이룩한 1700년대이며, 루이 14세 이후의 프랑스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오늘날 대도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강력한 갤러리 시스템을 완성했는데 그 중심에는 위치했던 인물 중 하나가 에듬 프랑소와 게르생(Edme-Fran?ois Gersaint, 1694~1750)이다. 


당시 게르생은 브루군디 지방에서 파리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상인집안 출신으로 주식과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처음에는 그림을 수집하기 위해 세느강의 쁘띠 퐁트(Petit Pont)변에 화가이자 화상이었던 안토니 듀오(Antoine Dieu, 1662~1727)가 1699년 설립해서 1714년까지 운영했던 화랑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718년 이 화랑을 인수해서 태양왕의 천사라는 뜻의 <오 그랑 모나르크> (Au Grand Monarque)라는 이름의 화랑을 시작했다.  

최근 미술사학자 기욤 글로리유(Guillaume Glorieux,1971~ )는 게르생의 1725년과 1750년의 창고물품목록을 발견했는데 여기에 의하면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이국적인 진귀한 물건, 열대바다에서 나오는 조개껍질, 일본의 칠기와 중국의 도자기, 차와 커피, 동양의 칠기와 도자기, 차, 커피 마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다루었으며 그림과 함께 깨끗하고 멋진 액자와 거울 등 당시 파리가 문명의 중심이 되고자 필요했던 거의 모든 것을 거의 수십 년 동안 취급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우리는 초기 화랑의 형태가 어떠했던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당시 미술품을 다루는 상인 즉 화상들의 주요 임무는 자신들이 취급하는 화려하고 귀한 품목들로 귀족들의 저택 실내를 장식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귀족들의 저택 내부를 꾸미는데 필요한 가구와 집기 및 동양 도자기와 같은 이국적인 풍물이나 공예품을 컨설팅하고 판매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게르생 역시 초기에는 회화 작품에 주력하다가 점차 거래 품목을 온갖 종류의 값비싼 물품들과 희귀품목(nouvelles curiosit?s)으로 확대해나갔으며 당시 이런 상인들을 ‘마르샹-메시에’(marchand-mercier)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들이 취급하는 미술품 특히 그림도 실내 장식의 한 기능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게르생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시대 그리고 섭정 시대와 루이 15세의 시대를 통해 발달한 로코코 양식이 지배했던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화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호화롭고 화려했던 시대의 미술 시장과 호화사치품, 골동품 이국적인 풍물에 이르기까지 화랑에서 취급하는 품목을 넓히는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 그림을 팔기위해 작가와 주제, 크기, 제목, 매체 및 가격별로 분류하고 나열한 카탈로그를 만들어 그림을 팔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상재를 지닌 인물이었다. 


와토는 프랑스 파리로 나와 당시 오페라극장의 장식 화가였던 질로(Claude Gillot 1673.~ 1722)를 사사한 후 뤽상부르 궁전의 장식가인 오드랑(Claude Audran, 1657~1734)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특히 그는 초기에 희극배우들을 비롯한 인물을 주로 스케치했는데 오드랑과 함께 궁전에 들어가 바로크 회화의 거장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1640)의 작품을 접하고 감화를 받는다.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와토는 일찍부터 폐병을 앓아 1720년 요양 차 런던에 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런 와중에 친구 제르생이 화상을 시작하면서 간판그림을 부탁했고, 그 부탁을 들어 제작한 것이 <제르생의 간판>(Gersaint’s Shopsign, 1721년, 유화, 163x308 cm,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소장, 베를린)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몇 주 뒤 세상을 떠났으나, 18세기 전 유럽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와토 <제르생의 간판>



이 작품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간판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시기적으로 레장스 시기 초기 로코코 양식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와토의 정신과 양식에 대한 상징적인 요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있다는 점에서 간판이라기보다는 와토의 대표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간판’에는 와토의 전형적인 특색인 가볍고 밝게 빛나는 양식 안에 매우 사실적이며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한 주제를 통해 희비가 엇갈리는 아이러니를 전달하는 와토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역사와 예술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나름의 상징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회화적 규범 그리고 상류 부르주아계급까지 확대된 미술시장의 규모와 당시 유행했던 화풍이나 거래방법, 화랑들이 취급했던 물목 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생생하고 약동적인 이미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당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초 프랑스의 미술가, 미술상인, 수집가에 관한 단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림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당시의 시대상을 담아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제르생의 화랑은 노르르담 다리 위에 위치한 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 갈수록 깊어지는 구조를 지닌 수많은 상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와토가 그린 이 작품에서, 게르셍의 화랑은 도로변에 접한 면이 문이나 벽도 없이 개방된 구조로 안쪽에는 화려한 살림집이 딸린 구조로 그려져 있다. 

벽에 가득 걸려 있는 그림들은 평소 와토가 존경했던 플랑드르 지방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나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그리고 이탈리아의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경~1576)와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과 같은 작품들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인물의 됨됨이는 그림 속 그림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와토의 기호와 취미 그리고 동시에 당시 프랑스 컬렉터들의 취향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게르생이 제 아무리 컬렉터로서 경험과 안목을 가지고 미술시장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화랑 문을 연 지 1~2년에 불과한 게르생에게 이런 인기 있는 바로크 풍을 대표하는 작품을 다루는 데는 역 부족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새로 화랑을 개업하는 친구 게르생의 화상으로서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제르생의 화랑을 실제로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예술이 중심이 되었던  시대의 파리를 그리고 미술 시장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주었던 아주 우아하고 높은 안목을 지녔던 고객과 성숙한 무역업자가 등장한다. 3미터가 넘는 대작인 이 작품은 크기 때문에 두 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간판으로 유효했던 것은 불과 몇 주에 불과했다. 어떤 손님이 간판을 사겠다고 나섰고 그래서 몇 주 후에 판매되고 말았다. 그 후 이 작품은 일부가 유실되었는데 캔버스를 다시 팽팽하게 매는 과정에서 몇 인치정도가 날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에는 당시 화랑의 풍경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영국의 풍속화가 겸 풍자화가인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를 인도한 셈이다.
                                           William Hogarth <The Marriage Contract, 결혼 계약> 1743


사실 그림 속 인물에 대해서는 그 설이 분분하지만 그 중 하나를 빌어 그림을 살펴보면 왼쪽에는 점원이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1659~1743)풍의 루이 14세 초상화 한 점을 나무 상자 안에 담는 중이다. 이것은 바로 루이의 시대가 갔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프랑스 역사의 전환점이자 미술에 대한 취향과 인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오른쪽으로는 자신들의 저택을 장식할 그림과 소품을 고르는 세련된 귀족, 혹은 부유한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또 그림의 상태를 살펴보려는 듯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명은 서서 오페라 안경으로, 또 한사람 금발의 점원은 작품을 돋보기로 열심히 감정하고 있다. 이들이 보고있는 그림은 벌거벗은 님프가 목욕을 하고 있는 로코코시대의 전형적인 페트 갈랑트(우아한 연회)의 전형적인 예이다. 감정하는 점원의 대각선 즉 타원형 그림 뒤에 서서 그림을 설명하는 이는 제르생이다. 

<제르생의 간판> 세부1. 원형의 그림 앞에서 설명하는 이가 제르생이다.


그림의 뒤 배경에 걸려있는 그림들 중 하나는 사티로스가 갈대 숲 속에서 님프를 쫒아가는 관능적인 신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 그림들은 풍경, 신화, 그리고 누드의 여신상들로 18세기 초 프랑스 회화를 풍미하던 소재와 형식을 가벼운 터치와 창백한 색채로 모사하고 있다. 또 어둡고 근엄한 17세기 풍의 초상화나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회화를 연상시키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나 기도하는 수사 등을 그림 그림이 있지만 이 그림들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화랑 귀퉁이에 걸려있다. 


 화면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은 와토로 추정되는데 그는 정중하게 분홍 비단옷을 입은 한 숙녀를 화랑 안으로 이끌고 있다. 그녀는 화랑 안으로 들어서다 그림을 포장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여기에 카운터에 기대어 게르생의 부인이 열심히 작은 소품을 보여주며 그림을 설명하지만 그것을 듣는 귀족들의 태도는 심드렁하다. 이 작품은 장르화의 하나지만 원근법을 살려 화면에 깊이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장르화 와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이 그림에 의하면 압제와 공포의 루이 14세 시대는 가고 이제 귀족들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분위기는 섭정을 맡았던 오를레앙 공작이 죽고 1723년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 시대에 와서 맞게 되면서 로코코 양식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기 문화와 예술은 주로 살롱(Salon)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개 부인들이 특정 한 날 자기 집에 문화예술계 명사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하며,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 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는 풍습이 있었다. 

부쉐, <마담 드 퐁파두르> 1756


이 시기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1721~1764)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궁정의 극장을 관리했고, 지식인들과 왕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며 화가나 조각가와의 연계를 통해 18세기 문화와 예술 발전에 공헌했다. 

여기에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지지하고 보수적인 가톨릭과 왕당파들이 금서로 규정한 백과전서를 출판할 수 있도록 도운 여걸이었다. 루이15세의 총애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죽은 후 “20년에 걸친 우리 관계는 특별한 교제와 우정”이라고 술회할 만큼 역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로코코 회화의 완성과 절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귀족들의 권위를 되찾아 주었다는 평가와 함께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시대가 바뀔 즈음엔 언제나 사회, 정치, 문화, 예술분야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사람들이 같이 호흡할 동지들이 있을 때 가능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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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