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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상파 이전의 인상주의자, 화상 폴 뒤랑 뤼엘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근대산업사회로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던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서사적인 고전주의나 목가적인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오늘날 근대적인 조형의식과 색채와 미학의 총체라 인식되는 인상주의는 적어도 당시로서는 설 자리도 전시할 장소도 얻기 어려운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파리 교외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파리 시내에 자리를 잡는다면 사창가나 다름없는 허름한 몽마르트의 피갈(Pigalle)거리였다. 이즈음 누구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인상주의자들의 혁명적인 그림을 혁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폴 뒤랑 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이다. 


르느와르가 그린 폴 뒤랑 뤼엘의초상화(1910)


1830년 처음 미술품 재료상으로 출발한 그의 아버지 장 뒤랑 뤼엘(Jean Durand-Ruel)의 화랑은 화가들에게 물감이나 종이, 기름, 수채화물감, 이젤 등을 주고 그림을 받는 화방을 겸하고 있었다. 늘어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을 보면서 장은 그들을 그림을 사는 고객으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테오도르 제리코(Jean Louis André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나 들라클로와(Eugene Delacroix, 1798~1863) 같은 이미 아카데믹한 부분에서 검증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취급하면서 그림을 대여하기도 하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화상으로 활동했다. 1833년 보다 많은 고객들이 사는 쁘띠 상스(Petits Champs)로 이전했다 

                                들라크루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유화, 260*325cm)


다시 1846년 보다 번화한 슈아젤가(Rue de Choiseul)로 사업을 확장해서 이전한다. 이때 그의 아들이며 19세기 최고의 화상이 된 폴 뒤랑 뤼엘이 합세한다. 하지만 1848년 2월 22일 발발한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855년 파리 세계박람회 기간 중에 개최한 들라클로와의 전시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화랑은 더욱 번창해 1856년 드디어 오페라좌와 아름다운 파리의 중심 뱅돔광장(Vendôme)이 있는 페가(Rue de la Paix)에 보다 큰 화랑을 구해 이사하는 중에도 그의 성공의 밑거름이 된 화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는 꾸준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우면서 프랑스는 물론 유럽전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그림을 사고팔고 발견하는 안목을 갖추었다. 
 

르느와르 <찰스 & 죠지 뒤랑 뤼엘의 초상>(1882, 유화, 65*81cm)


그리고 1862년 그는 에바 라퐁(Eva Lafon)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후 슬하에 다섯 아이를 두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명에 따라 낙선자전시회가 마련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존재도 세상에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32세가 되던 그해 뒤랑 뤼엘은 처음으로 경매에 참여하면서 경매사로서의 꿈을 키우기도 한다.   


1860년대부터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을 주로 취급하면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나름 안정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한 아버지의 화랑에 1865년부터 본격적으로 뒤랑 뤼엘은 화랑의 모든 일들을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코로(Corot)와 바르비종(Barbizon school)파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면서 이들 그룹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는 화상으로서 “참된 화상은 또한, 필요하다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않는 이해심 깊은 애호가여야 한다.” 고 말하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예술을 방어하며, 화가의 작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개인전을 통해 작가와 컬렉터들을 이어주고, 화랑 간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자신의 갤러리와 자신의 집을 무료로 개방하여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며, 언론을 통해 화가들의 작품을 최대한 홍보하는 동시에 금융권과 미술계를 접목시킨다는 나름의 근대적인 화랑으로서의 철학과 원칙을 세운다. 


그는 일반적으로 그림을 화가들로부터 위탁판매하거나 미술품을 구입한 후 일정한 이문을 붙여 파는 일반적인 화상들과는 달리 자신이 관심 있는 화가들에게 일정하게 매월 또는 매주 급료를 지불하는 소위 전속계약이라는 제도를 통해 화가들을 후원하고 전적으로 화랑이 지원해서 개인전을 열어주는 공격적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화랑을 경영했다. 집중적으로 특정작가의 작품을 매집하고 때로는 앞으로 그릴 그림까지 선점하는 공격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는 금융권을 미술시장에 끌어들인 탁월한 그의 능력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1866년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1812~1867)의 작품 70여점을 구입한 후 루소의 회고전을 열고 언론과 관객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이익을 얻었고 이듬해 루소가 사망하고 열린 경매에서 또 다시 그의 작품을 수집하는 등의 수완을 발휘한다.   

 
그는 이렇게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부터 인상주의를 지원하고 후원한 화상이 되었다. ‘탕기아저씨’가 단지 마음씨 좋은 후원자였다면 뒤랑 뤼엘은 후견인을 자처하고도 남을 상재와 경영능력을 갖추었던 이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진보적인 성향과 전통적인 미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조형의지가 만나 최대의 시너지효과를 거둔 것이 인상주의라 할 것이다.        


그는 1867년 파리의 라파예르 거리로 화랑을 이전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재료와 화구, 가구와 고미술품까지 잡다한 화랑의 취급품목을 그림과 판화만으로 한정해서 집중한다. 그리고 이미 컬렉터로 활동하던 귀족이나 부호들이 아니라 양적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들을 새로운 미술품 구매층으로 확대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1870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 즉 보불전쟁이라 불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는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피난 중에 런던의 본드가 168에 새롭게 화랑을 열고 화상으로서의 업무를 재개하는데 이때 그는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을 다루는 전문 화랑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 12월 그는 찰스 데샹(Charles Deschamps)과 함께 투자하고 판매하는 공동 마케팅으로 제 10회 프랑스 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해서 미술시장의 기린아로 등장한다. 그는 이때 영국으로 피난 와 있던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 François Daubigny,1817~78)의 소개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를 알게 되고, 모네는 다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 30~1903)를 소개해 주어 이들과 교유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도비니 <발몽도와 근처 와즈 강에서 빨래하는 여인>(1865)

도비니 <와즈강변의 보트들>(1865)


당시 모네와 피사로는 바르비종파 스타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지닌 작가였다. 뒤랑 뤼엘은 이들 두 화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했다. 그는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두 사람의 작품을 구입한 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이렇게 그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잠재력 있는’ 작가들을 주목했으며 이런 그의 화상으로서의 방식은 매우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을 고객들에게 대여해 주고 다시 이 작품을 판매하거나 클럽이나 고객들과 접하기 쉬운 공간에 작품을 걸어 놓는 등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화상으로서 승승장구한다. 


전쟁이 끝난 1871년 다시 파리로 돌아 온 그는 모네와 피사로를 그의 파리 고객들에게 소개한다. 그들은 시간이 흘러 파리 컬렉터들에게도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이미 그의 수중에 있었다. 1872년 런던의 뒤랑 뤼엘 화랑에서 아직 결성되기전 인 인상주의 화가들 즉 카페 게르보아에 모이던 일군의 젊은 작가 즉 바티뇰 그룹과 바르비종파를 모은 전시를 개최한다. 이렇게 그는 유명작가와 신진작가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것을 하나의 전략으로 삼았는데 꽤나 효과적이었다.


이때 미국 화가로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도 함께 참여한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Nocturne in Black and Gold-The Falling Rocket>(1875 유화 60.3 x 46.6 cm)
 
 
휘슬러는 이때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구입하여 뉴욕으로 가져갔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에도 인상주의 바람이 부는 계기가 된다. 이때 마네의 작품 23점을 한꺼번에 구입하면서 한때 재정적 위기에 처할 만큼 미술품을 확보하는데 무모한 일면도 지녔던 그는 성공의 배경이 되어 줄 탄탄한 고객이자 인상주의의 옹호자였던 컬렉터들이 함께 있어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바리톤 오페라 가수로 우리에게 더 알려진 장 밥티스트 포레(Jean-Baptiste Faure,1830 ~1914)는 모네의 후원자이자 뒤랑 뤼엘의 고객인 동시에 인상주의의 후견인이었다. 그는 마네의 대표작인 <풀밭 위의 식사>나 <피리 부는 소년> 등 대표작을 포함해 67점을 그리고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다리>를 비롯한 62점의 작품을 소장한 대 수장가였다. 여기에 드가, 시슬리, 피사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 ~1867), 피에르-폴 프뤼동(Pierre Prud'hon, 1758~1823)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마네 <풀밭 위의 식사>


부유한 사업가이자 루브르 백화점 주인이기도 했던 에르네 호슈데(Ernest Hoschede, 1837 ~1891)도 그의 고객이었다. 그 또한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였다. 그는모네에게 자신의 집 장식을 의뢰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그의 아내가 마네의 두 번째 부인으로 동거를 시작하면서 인간적인 갈등에 싸이기도 한다. 1877년 그는 파산하고 그의 소장품은 경매에 붙여져 흩어지고 말았고 그의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보내져 모네의 슬하에서 자랐다. 1891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네는 호슈데의 아내였던 엘리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외에도 인상주의를 후원했던 이들로는 비평가이자 문필가였던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1838~1927), 은행가 샤를 에프뤼시(Charles Ephrussi,1849~1905), 루마니아 출신의 의사로 인상파화가들의 주치의나 다름없었던 조르주 드 벨리오 (Georges de Bellio, 1835~1894)등이 있다. 그는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 그림을 소장했으며 1878년에는 <인상-해돋이>를 단돈 20프랑에 소장했다.



    모네  <해돋이 인상>


1894년 조르주가 사망하자 그의 딸 빅토린(Mademoiselle Victorine de Bellio)은 아버지가 소장했던 150여 점의 그림을 1957년 일명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이라 불리는 마르모탕미술관(Museum Marmottan)에 기증했다. 젊은 인상파 화가들을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들라클로와 동등하게 보았던 그는 인상파의 철저한 지지자였던 퇴직 세관원 빅터 쇼케 (Victor Chocquet,1821~91)의 존재도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명성과 달리 인상파화가들의 삶은 처절했다. 집시나 보헤미안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의 생활고를 해결해 줄 생각으로 1874년 3월 24일, 뒤랑 뤼엘이 경매인으로 나서 드루오(Drouot) 경매장에서 르누아르, 모리소, 시슬레,  모네의 작품 163점을 경매에 붙였다. 하지만 이들의 그림은 통렬한 야유 속에 형편없는 가격에 낙찰되어 수중에 별로 남는 것도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해 4월 카퓌신가(Boulevard des Capucines) 나다르 사진관에서 처음으로 인상파전시를 개최했다. 당시 이들 전시의 명칭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예술가들의 유한협동조합’이었다. 모네와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1841~1870)의 생각은 피사로의 강력한 지지를 얻으며 마침내 전시로 드러났다. 29명의 젊은 화가들의 165점이 전시된 이 전시는 한 달간 3,500명의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의 참패로 끝났다. 여기에 ‘인상파’라는 비아냥조의 이름을 루이 르루아(Louis Leroy)로부터 얻었다. 

바지유 <바지유의 콩다뱅가의 화실>(1870, 90×128.5cm, 파리 오르세이)
 
세상이 ‘정신 나간 화상’이라고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뒤랑 뤼엘은 1876년 3월 30일부터 4월 30일까지 그의 화랑에서 두 번째 전시를 열었다. 20명의 252점이 출품된 이 전시회도 역시 “여자까지 하나 낀 대여섯 명의 미치광이 집단”들의 전시라는 악의에 찬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과 특히 시인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의 글은 그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렇게 두 번째 전시부터 어느 정도 세상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참여했던 화가들의 생활은 궁핍하다 못 해 처절한 것이었다.  

1877년 3회 전시는 인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18명의 230여점이 전시된 3회전은 관람객도 늘었고 비평의 강도도 약해졌다. 이후 분열을 거듭하며 6회까지 지속되지만 인상주의자들 간의 입장과 이해 때문에 그 결속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비평의 등장 
 
 이 시기 미술계는 커다란 변화를 만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화가와 컬렉터 또는 소장가들의 관계가 아닌 화가와 비평가 그리고 시장과 컬렉터의 구조로 바꾸어 나간다. 특히 비평의 힘은 새로운 매체로 자리 잡았던 신문이나 잡지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근대화와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등장한 도시노동자층과 중산층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던 매체의 미술비평은 화가들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미술비평과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뒤랑 뤼엘은 보불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1890년『두개의 예술』(L'Art dans les deux mondes)을 창간하나 다음 해에 폐간하고 만다. 하지만 이 잡지를 통해 그는 르느와르와 피사로 등을 소개했다. 그리고 1899년 다시 『예술과 호기심의 국제저널』(La Ravue internationale de l'art et de la curiosité)을 라아무도 모르게 자금을 지원해서 창간하여 화실에서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고, 비평가들에게 평론을 의뢰해서 실었으며 화집을 발행해서 작가들을 홍보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뒤랑 뤼엘은 많은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을 수장하고 있었지만 일부 컬렉터를 제외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1870년대 중반과 1880년대 초 두 번이나 결정적으로 그를 재정적인 위기를 맞는다. 197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그의 화가들에게 월정 급료를 지불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을 맞았지만 곧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어떤 화가의 작품가격이 급속하게 상승하면 이익을 얻었다가 후원자가 파산하거나 전력을 다해 구입한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파산지경이 이르는 재정적 기복이 심했지만 크게 게의치 않을 만큼 매우 통이 큰 사람으로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거나 전망이 밝다고 판단되면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사들이기도 했다. 1873년 그는 마네의 화실에서 본 23점을 3만 5천 프랑에 사들였다. 그는 후에 이 작품들을 각각 4,000프랑에서 2만 프랑 또는 그이상의 가격으로 팔아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1881년 1월에는 피사로가 보여주는 작품 모두를 구입하고 앞으로 그릴 작품도 모두 구입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외젠 부댕(Eugène Louis Boudin, 1824~1898)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 이후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인상파 그림을 사기위해 몰려들자 프랑스 소장가들에게 팔았던 작품을 되 사들여 한 점당 10만 프랑이라는 어머 어마한 금액으로 되팔아 큰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1882년 들어 자금을 지원해 주던 뤼니옹 제네랄 은행(Le Union Générale bank)이 1882년 파산하면서 뒤랑 뤼엘은 다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1870~80년 경 많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사망하면서 그들의 작품이 대량으로 시장에 몰려나오면서 경제적 위기는 더욱 더해졌다. 하지만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화가들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미래는 너무도 암울해 보입니다. 회의에 사로잡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1882년 9월 18일, 모네가 보낸 편지에 그는 언제나처럼 관대하게 돈과 풍부한 충고로 성실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의 집을 장식하는 일을 모네에게 맡겼고 그런 중에도 뒤랑 뤼엘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모네의 전시를 개최하고 10월에는 노르망디에서 그린 20점의 작품을 구매했다. 하지만 위기는 역시 기회였다. 

 
1883년 마네가 사망하고 그의 유작들이 경매를 통해 호평리에 팔려나가고 공립미술관 등지에 소장되면서 바로 회고전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경제적 위기에서 숨통은 튀였으나 뒤랑 뤼엘의 화가들은 다시 살롱전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화상들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의 이런 재정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다름 아닌 미국출신의 여성화가  메리 스티븐슨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1844~1926)였다. 주식중개로 돈을 벌어 부동산 업자가 된 아버지와 은행가의 상속자인 어머니 사이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화가가 되기로 하고 파리에 정착해서 인상파의 대열에 합류한다.

 

 

[##_'2C|cfile10.uf@130C7D474DB124721B4D9A.jpg|width="370"_##](1879, 종이에 파스텔)|cfile5.uf@150C7D474DB124731CED74.jpg|width="370" height="493" alt=""|메리 스티븐슨 카사트 <아이 돌보기>(유화)'>

그녀는 1979년 인상주의 전시에 참가한 이후 뒤랑 뤼엘의 재정적 위기 때 많은 도움을 준다. 미국 펜실바니아 철도회사 사장이었던 오빠 알렉산더 카사트(Alexander Cassatt, 1839~1906)도 큰 고객이 되어주었다. 설탕업자 해리 하버마이어(Henry Osborne Havemeyer, 1847~1 907)와 1883년 결혼한 그녀의 친구 루이진 엘더(Luisine Elder)도 매리 카사트의 조언으로 인상파 작품을 대량으로 수장하여 뒤랑 뤼엘을 도왔다. 현재 이들 소장품 대부분은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어 전시중이다. 이외에도 카사트는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비롯한 유수의 미술관에서 인상주의 작품을 소장하도록 설득해서 뒤랑 뤼엘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890년대 초 르느와르와 피사로의 전시가 호평을 받으며 파리화랑도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런 호전된 상황에 고무된 뒤랑 뤼엘은 독일의 10개 도시를 순회하는 인상주의 전을 시작으로 독일에 인상주의 컬렉터들을 양성하고자했고 이와 함께 세계로 인상주의를 수출하고자 노력했다. 소위 국제화를 시도한 셈이다.      
 

1885년 뒤랑뤼엘은 미국미술협회(American Art Association) 회장 제임스 수톤(James F. Sutton, 1843~1915)의 인상파 최전성기작품을 모은 전시회로 모든 경비는 미국 측이 지불하고 작품이 팔리면 일정부분 커미션을 주는 조건의 제안을 해왔다. 그는 이 제안을 수용했다. 자신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비평가 반응은 좋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뒤랑 뤼엘은 이듬해인 1886년 뉴욕에 지점을 열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미국의 컬렉터들에게 소개한다. 이로 인해 인상파 화가들 그림이 미국에서 고가에 팔리는 전환기를 맞는다. 이 전시회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1886년 4월 뉴욕에 뒤랑 뤼엘 화랑 분점을 열고 약 30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제1회 파리 인상파 화가전>을 열었다. 

 
그는 이미 몇몇 파리의 화상들과 함께 1883년 보스턴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열린 해외작가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때가 그의 첫 미국방문이었다. 1884년 프랑스는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신상은 제작되어 미국에 도착했지만 좌대가 없는 채 였다. 좌대제작경비를 마련하기위해 195점의 프랑스 공예품과 미술품으로 구성된 전시를 국립디자인미술학교(National Academy of Design)에서 열었다. 하지만 미술품은 미국 소장가들이 출품한 3점의 마네와 1점의 드가작품 그리고 3명의 미국화가들의 작품이 전부였다. 

 
이어 1866년 4월 뉴욕에서 대규모의 인상파전을 개최하면서 미국에 인상주의를 본격적으로 상륙시켰다. <파리 인상주의들의 유호와 파스텔화>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는 뒤랑 뤼엘이 지니고 있던 289점의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전시가 끝난 5월에는 미국의 일부 인상주의를 신봉했던 컬렉터들의 작품을 추가해서 국립디자인미술학교로 순회하였다. 당시 전시를『더 스튜디오』(The Studio)지는 “뒤랑 뤼엘과 몇몇 소장가들은 우리에게 더 할 나위없는 선물을 주었다.”고 할 정도로 매우 호의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1887년 그는 장애에 부딪혔다. 1886년 개최한 인상파전의 통관 및 관세문제를 제기한 뉴욕일부화랑들의 제소로 판매했던 그림을 파리로 반출했다 다시 뉴욕으로 반입하면서 관세를 납부하는 뻔 한 절차를 거쳐야했던 것이다.  
 
1890년 화랑을 하버마이어가 소유한 건물로 이전한 후 많은 소장가들과 연을 맺고 인상파 화가들을 소개해 나갔고 당시 미국으로 유입된 작품들 대부분은 오늘날 미국 주요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1905년에는 약 300점에 이르는 인상파 작품을 가지고 런던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전시회는 인상파 최고의 전시로 평가된다.

1910년에 다시 런던의 그라프톤 화랑(Grafton Galleries)에서 대규모 인상파화가들의 전시를 개최하는데 이 전시회는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자들>(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s) 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 폴 고갱과 고흐 그리고 세잔을 주목한 영국의 형식주의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 1866 ~1934)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까지 인상주의의 영역을 확대시켜 정의했다.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오늘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뒤랑 뤼엘은 1922년 2월 5일 눈을 감았다. 1891년부터 1922년까지 31년간 그가 구입한 작품은 약 12,000점에 달했다고 한다. 약 1,000 이상의 모네, 1500점이 넘는 르느와르, 400여점이 넘는 드가와 시슬리, 800여점의 피사로, 약 200여점 가까운 마네의 그림 그리고 400여점의 메리 카사트의 작품 등이 대부분이었다. 

 
당대 사람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던 간에 그는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가장 성공한 화상이자 경제적인 지원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런 그의 유럽과 미국을 아우르는 화상으로서의 성공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95),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오귀스트 르느와르(Pierre 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 등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막심 드토마 (Maxime Pierre Dethomas, 1867~1929)나. 위그 메를(Hugues Merle, 1823~81) 등 여러 작가들까지 챙겼다. 그는 1880년대 들어서서 두 아들 요셉(Joseph)과 조지(George)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들은 파리와 뉴욕을 번갈아가면서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그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뒤랑 뤼엘 화랑은 인상주의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파리의 화랑은 1975년, 뉴욕화랑은 1950년 문을 닫았다.

 
인류의 근대미술발전에 기여했지만 그가 죽기 2년 전 프랑스 최고의 훈장이라고 수여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의 수여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국제교역에 공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근대미술의 발전에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화상들을 평가하는 척도는 결국 ‘돈’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천하의 뒤랑 뤼엘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보다 무려 25살이나 어린 파리의 또 다른 화상 조르주 쁘띠(Georges Petit, 1856~192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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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계급의 등장과 미술의 변화 

미술이라는 장르가 시민들의 품으로 다가온 것은 산업혁명(18C말~19C전반)의 과실을 손에 쥔 도시 중산층들 즉 ‘부르주아’들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이들은 생산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닦으면서 신분과 문벌을 넘어 세상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 프랑스에서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Ier, 1773~1850)의 7월 왕정이후인 1830년대부터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 시기에 들면 도시가 확대되면서 농촌인구가 유입되어 인구는 늘고 철도가 발달하고 대중적인 신문이 발행되면서 시민계급이 확실하게 권력의 주체가 되어갔다.


 이들은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취미의 전통이나 문화적 교양이 부족해서 스스로 열등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교양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거실에 걸어들 ‘걸작’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작품보다 화가의 지명도나 위치가 중요했으며 그것이 작품의 가치를 재는 척도이기도 했다. 물론 이 시대 모든 부르주아 계급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재 오르세미술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이자 컬렉터인 동시에 미술사학자이기도 했던 에티엔 모로 넬라톤(Adolphe Étienne Auguste Moreau-Nélaton, 1859~ 1927) 같은 이의 경우 대단한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렇게 사회중심을 이루는 세력의 교체가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미술은 궁전이나 교회를 떠나 가정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시민계급이 등장하면서 화가들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는데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작품의 크기이다. 일반 시민들의 거실에 100호(162x131cm)이상의 대작을 걸어두는 것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공했다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미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작품의 크기가 그림이 걸릴 실내를 감안해서 작아진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는 신화, 역사, 종교를 주제로 했던 그림들이 쉽고 친근한 주제로 바뀌어 가족의 초상이나 풍경으로 옮아가며 사실적인 화풍이 주를 이루게 된다.


앵그르 <나폴레옹의 초상>(유화,1804)

윌리엄 브로그 <돌아온 봄>(유화,1886)



 특히 초상화의 경우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841년 약 2,000점의 출품작 중 약 25%에 이르는 500점 정도가 다시 1884년에는 673점의 초상화가  출품될 정도로 시민사회의 기호와 취미에 따른 그림들로 대체된다. 



#풍경화와 정물화의 유행

 여기에 풍경화도 시민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한다. 17세기 이미 장르화로 자리 잡은 풍경화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 풍경화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그리고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d)로 이어지면서 현격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고 이는 인상주의로 이어진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빙해-좌초된 희망>(유화, 1823~4, 96.7×126.9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와 대 서부철도>(유화, 91x122cm, 1844 런던 내셔널 갤러리)


컨스터블 <브라이톤 해변가를 항해하는 배>(유화, 149×248cm, 1824, 런던 V&A 미술관)



 17세기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이나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 1682)류의 풍경화가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이탈리아 풍경이었던 데 반해 19세기의 풍경화는 일상의 주변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풍경화의 변화는 살롱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1835년 살롱에 출품된 460여점의 풍경화중 고전적인 이탈리아 풍경은 전체의 10%에 불과한 46점이었고 전에 볼 수 없었던 프랑스 픙경화가 336점이나 되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물론 이런 변화를 살롱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1817년부터 풍경화를 살롱에 반영했는데 다만 그 권위를 지킬 속셈으로 일반분야인 ‘역사화’는 매년 공모한데 반해 4년에 한번씩 ‘역사적 풍경화’부문을 공모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와 함께 시민들과 친근해진 장르는 정물화이다. ‘교양’이나 ‘취미’등 인문학적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가치관은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따라서 익숙하고 친근한 인물이나 자연,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에게 ‘진짜와 똑 같아 보이는’것은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신화나 역사와 성서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환영을 받았다. 일상적인 초상, 풍경, 정물화의 다른 편 즉 살롱에서는 역사화와 우의화가 인기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는 사실적인 그림이 시민들의 취향에는 맞지만 전통이 없다는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역사나 우의를 다룬 사실 풍을 선호한 것이다. 이들은 비너스를 빌어 관능적으로 그린 누드를 선호했고, 예술이라는 이름의 ‘우의’를 통해 자신들의 세속적 고상함(?)을 위장(Camouflage)한 것이다. 



여기에 그림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으로 보았던 사진술이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지만 이내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진과 이내 친하게  되면서 이런 우려는 사라졌고 그림은 더욱 풍성해졌다. 하지만 사진의 발달은 그림의 보도, 기록, 기념, 교육 등의 기능을 가져갔다.  


 이렇게 시민계급이 미술에 그림을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산층으로서의 경제적 여유와 교양인을 선망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19세기 중엽이 되면서 미술관이 일상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술관이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1787~ 1799)이후의 일이다. 혁명정부는 1793년 미흡하나마 국민들에게 루브르 궁문을 활짝 열어 미술관으로 개방했다. 그 후 혁명기간 중에도 화가인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 ~1808)에 의해 루브르 본전시관 전시계획안이 발표되었지만 구체화하지 못하다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1769~1821)에 의해 오늘날의 미술관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근동지방에 이르는 작품들을 모았다. 그는 전쟁으로 정복한 나라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배상금대신 미술품을 요구했으며 이때 많은 미술품과 유적지 주요작품들을 조직적으로 파리로 옮겨와 결국 1802년 미술관의 이름조차 ‘나폴레옹미술관’으로 바꾸었지만 결국 이 미술관은 ‘루브르미술관’으로 오늘의 이름을 찾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나폴레옹은 ‘전쟁미술관’을 만들었고 지방의 주요도시에도 미술관을 개설했다. 1795년부터 1805년까지 10년 동안 파리에 4개의 미술관, 지방에 22개소의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는 나폴레옹1세가 대제국을 구축한 제 1제정시대(1804~1814) 이후 즉 왕정복고시대인 루이 18세 시대에도 뤽상부르미술관을 현대미술관으로 운영토록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파리국립근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의 효시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하지는 않지만 중앙집권제도와 예술을 애호하는 정신이 결합한 성공적인 사례이다. 프랑스의 이러한 선도적인 미술관 건립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자극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1800년 개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1809년개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1819년 개관), 런던의 대영박물관(1823년 개관), 독일의 프로이센미술관(현 베를린국립미술관, 1830년 개관) 등이다. 


 미술관의 등장으로 이제 더 이상 교회와 황제의 미술이 아닌  순수한 ‘예술’로서 , 오늘 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미적 감수성을 위한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밀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의『목로주점』에서 주인공 제르베즈가 자신의 결혼식 날 오후에 하객들과 함께 루브르를 가는 것처럼 일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이 대중화함으로서 크게 발전한 것은 판화이다. 르네상스 이래 미술품 보급의 가장 쉽고 값싼 수단이었던 판화는 18세기말 석판화(Lithograph)기법이 등장해서 일반화되면서 미술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욕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당시 미술품 수집은 신분이나 수입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의 열망의 대상으로 소장가들의 숫자가 급증했다. 



1830년대 이런 현상을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는 “유화로 그린 초상화를 가진 시민은 수채화 초상 밖에 갖지 못 한 시민을 경멸하고 석판화 초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을 정도로 이제 미술품 소장정도와 내용이 신분의 고하를 결정짓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정교한 복제판화가 등장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지자 이제 전문으로 판화만 제작하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석판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1808~79),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 동판화의 메리옹(Charles Meryon, 1821~68)이나 르돌프 브레댕(Rodolphe Bresdin, 1822~85), 석판과 목판을 자유스럽게 구사했던 뭉크(Edvard Munch, 1863~1944), 그리고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과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등은 유화작품에도 남다른 성과를 남겼지만 판화에 더욱 더 열중했다. 

도미에 <트랑스노냉 거리, 1834.4.15>(석판화, 1834)

브레뎅 <죽음의 코메디>(석판화,1854)


르동 <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안개를 보았다>(동판화, 1880년대)

메리옹 <뱀파이어>(동판화, 1853)

뭉크 <절규>(판화, 1895)



 이와 함께 캐리커처 즉 삽화와 포스터도 등장했다. 시각매체로서 삽화와 포스터는 보도나 기록, 선전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화보 중심의 일간 또는 주간신문의 중요 언어가 되었다. 또 풍자와 익살, 조롱을 담은 캐리커처는 정치적 입장이나 주장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사회를 비판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고 만화로까지 진화했다. 윌리암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나 18~19세기 스페인의 격동기를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살았던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나 <전쟁의 참화>같은 판화는 예리한 풍자와 날카로운 비판은 판화나 캐리커처의 가치를 심화시킨 역작이다. 
 

고야 <카프리초>(동판화, 1797-98)

보나르 <목욕탕> (석판화,1800년대)



 또한 소비를 전제로 하는 산업혁명은 많은 선전수단을 필요로 했는데 당시 판화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중요한 광고수단 중 하나였다. 이런 광고용 판화 즉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이끈 사람은 로트렉이다.

로트렉 <물랑 루즈, 먹보>(1891, 석판화)

로트렉 <아리스타드 브뤼앙>(1892,석판화)



 그는 1891년 몽마르트의 카바레 ‘물랑루즈’를 위해 대형 다색판 포스터를 석판화 기법으로 제작했는데 파리 시민들을 열광시켰고 이후 아리스타드 브뤼앙(Aristide Bruant,1851~1925) 이나 메이 밀튼(May Milton), 잔 아브릴(Jane Avril, 1868~1943) 같은 연예인들을 위한 포스터를 만들어 사람들을 유혹했다. 이렇게 미술은 이즈음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민들의, 중산층의 손으로 들어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갔고 이와 함께 미술시장의 문도 훨씬 넓어졌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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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림, 세속으로 내려오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등장한 게 바로크(Baroque, 17세기)이다. 이 시기는 교황과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시기이자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커지기시작한 때이다. 이 때 자신의 권위와 우아함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왕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미술품의 주문자인 동시에 소비자였다. 따라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화가나 조각가들은 기사작위를 얻는 등 신분상승과 함께 황실과 가톨릭 교회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유례없는 호황을 만나게 된다. 


14세기 이전 실질적으로 유럽을 지배한 것은 교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부유한 상공인 시민계급이 등장하고,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몰락하고 점차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일일이 로마와 대립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교황의 허락 없이 프랑스 내 교회에 임시세를 부과하면서 교황과 왕의 대립은 한층 격렬해 졌다. 프랑스가 교황의 고향 아나니에 머무는 교황을 습격하는 아나니 사건(Anagni Incident, 1303년)이 일어나고 이후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임명되자 곧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곳에 새로운 고딕풍의 궁전과 교회를 짓고 약 70여 년 간 교황들은 프랑스왕의 수중에 있었던 셈이다. ‘바빌론 유수’ 또는 ‘아비뇽의 유수’(Avignonese Captivity, 1309~1377)라고 기록되는 사건이 그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편지를 썼던 시에나의 성 카트린느(Catharina de Siena, 1347~80)의 노력 덕에 다시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의 궁전 건축과 면죄부 판매 


현재 교황청으로 쓰이는 오늘날의 라테란 궁전


 
로마로 돌아 온 교황의 궁전인 라테란(Lateran Palace)은 이미 낡고 파 헤쳐져 당장 거처할 곳조차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임시로 자리를 잡아야 했는데 지금까지 이곳에 거처하고 있다. 당시 교황이던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 1397~1455)는 낡고 황폐회한 교회를 할고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교회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죄를 지어도 돈만 내면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와의 갈등도 결국 성당의 신축 또는 개축, 증축자금 즉 돈이 문제였던 때문에 교회는 온갖 이유를 동원해서 면죄부 판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는 95가지의 이유를 들어 면죄부 판매를 반박했고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고백 이후 결국 교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로 나뉘게 되었다. 

 신교도들은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교회를 장식하고 치장 하는 일은 최소화하는 청빈과 검소를 기본으로 했다. 이런 신교도들의 주장에도 일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교황 파울루스 3세(Paulus Ⅲ)는 트렌트 공회의(Tridentine Council)를 소집하여 종교 개혁 후 등장한 신교에 대응하여, 교리의 확인과 교회 내부의 쇄신을 위해 3회에 걸쳐 개최하면서 반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된다.

이 회의는 성모숭배와 비적(Sacrament) 신앙을 확인하는 동시에 1563년 말 공포된 교령의 의거 신교의 성상파기 또는 성상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성상과 성 유물의 보호를 결정함으로서 바로크 미술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도상(iconography)에 관해 엄격하게 규정하였으며 그림을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에게도 교리와 복음을 전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성 그레고리우스 1세의 말처럼 미술은 선교의 수단으로 ‘문맹의 성서’가 되었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미술에 대한 인식은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1455년 선종 당시에 남겼다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교양이 부족한 대중의 정신에 견고하고 안정된 신념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시각에 호소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교리에만 의존하는 대중의 신앙은 미약하고 동요될 수밖에  없다.....인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기품과 미가 조합된 훌륭한 건축물은 교황의 권위를 고양시키는 데, 막대한 기여를 할 것이다.”


교회는 신이나 교황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민중을 교화할 목적으로 활용하기로 하면서, 공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성당은 더욱 화려하고 호화로워졌다. 하지만 그림은 여전히 알기 쉬운 내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정서적인 호소력이 강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신앙에 봉사하기위한 그림이어야 했다. 


 새로운 일감으로 사기가 충만해진 당시의 예술가들을 더욱 고무시킨 것은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였다. 군인이었던 그는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병상에서 하느님을 만나 누구 못지않은 신앙심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는 결국 예수회를 조직하여 신의 병사가 되었다. 그는 비록 가난할 지라도 교회에 갈 때는 교황의 친인척에 버금갈 만큼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에도 대리석과 금장식, 그림과 조각, 천정화와 화려한 치장벽토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또 예수회 회원들은 교회가 신의 거주지인 동시에 신도들이 자유롭게 쉬었다 갈 수 있는 휴게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수회는 적극적으로 속세에 파고들어 일반 신도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이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어 현실적인 수단을 통해 신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당시 제작된 조각이나 그림은 영혼과 육체가 일체를 이루어 ‘법열’의 상태에 이른 극적인 표현들이 많았다. 이런 법열의 상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있는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 (The Ecstasy of St. Teresa, 1646~52, 대리석 높이 350cm,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로마) 이 있다.


             Gian Lorenzo Bernini, <성녀 테레사의 법열> 1646~52,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하지만 이 작품의 극적인 상황과 묘사 때문에 성스러움과 에로틱의 경계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고위 성직자들의 선교수단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 인해 확실한 후원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르니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제대를 가려주는 발다키노(천개天蓋)>(1624-33)



하지만 이런
종교에 봉사하는 바로크에 대한 반발로 영국에서 고딕스타일이 등장하였고 이는 점차 유럽일대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교회와 신도들의 지갑이 화가 등 예술가들을 향해 열려있던 시절 가장 많은 돈과 높은 명예를 누렸던 이는 이미 31세에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던 베르니니이다. 그는 천재적인 재주와 함께 남다른 전략과 반종교개혁운동 정신에 입각해서 은총과 용서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그는 <추기경 보르게세의 흉상>(Cardinal Borghese, 1632, 대리석, 높이 78cm, 보르게세미술관, 로마)을 만들어 그의 눈에 들면서 추기경의 사금고에 들어가는 돈보다 베르니니의 금고에 쌓이는 돈이 더 많을 정도로 성공을 거둔다. 


베르니니, <보르게세 흉상>( 1632, 대리석, 높이 78cm, 보르게세미술관 로마)



하지만 동시대에 베르니니의 라이벌로 돈보다는 예술가로서 세상의 잡다한 일보다는 자신의 예술에 매달렸던 사람이 있다.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가 바로 그사람이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세속적인 성공을 생전에 이루었고, 그에 반해 보로미니는 예술가로서 자존심은 세웠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결국 68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보로미니<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폰타네의 돔>(1634-1641, 로마)



교회의 재건과 부흥 특히 예수회의 회화관은 많은 화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게 해 주었고 신을 대신해서 인간을 통치한 속세의 왕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 화가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의를 갖추었지만 이는 일부 잘나가는 화가들의 몫이었고 여전히 무명의 화가들은 춥고 배고픈 처지였다. 그리고 여전히 미술품의 소비처는 교회와 왕 그리고 제후 등 지배계급에 국한되었다. 어찌보면 부유한 시민계급이 주 고객이었던 르네상스시대의 피렌체 보다 더 퇴보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표방하면서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 of France, 1638~1715)에 이르러서는 화가 등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던 미술아카데미까지 국가행정조직에 편입시켜 여러 가지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공적인 미술품 주문은 이곳 아카데미 회원들에 한해서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단 아카데미회원은 개별적으로 그림을 주문받거나 팔수 없다는 전제아래.     



 하지만 여전히 미술은 하느님의 것이거나 제후들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북부, 혹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의 예외는 있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근대시민사회가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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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6년 고흐가 파리로 나왔을 무렵, 파리는 온통 일본문화(Japonism)에 열광하던 시기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일본문화를 접한 유럽인들에게는 경이의 그것이었다. 전에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과 입체적인 화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회화, 단순한 면과 밝고 맑고 그러면서도 화려한 채색 등은 1870년대 파리의 문화계와 사교계를 강타했다.

 하지만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 취향 그리고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화가들은 이미 한 둘이 아니었다.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Pierre Bonnard, 1867~ 1947)등의 화가뿐만 아니라 귀족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포니즘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일본열풍을 뒤늦게 접한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문화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감각은 정신적 환희를 느낄 만큼 즐겁고 기쁜 것이었다.

 특히 당시 인상주의자들이 발전시켰던 과학적인 색채론을 공부하고 있었던 고흐는 동생 테오 덕에 알게 된 화방 주인 탕기 아저씨에게서 건네받은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고향 네덜란드의 준데르트(Zundert)나 런던과 헤이그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그림이었다. 캔버스나 서양의 두툼한 화지(Carton)와는 다른 얇은 일본종이(和紙)에 인쇄된 다색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대담한 구도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는 어둡고 칙칙한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그리고 있던 고흐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고흐의 그림은 밝고 격정적인 색채로, 필촉은 더욱더 감각적으로 움직였고 전체적인 느낌은 경쾌해졌다.


 그 중에서도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1797~1858)의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고목이 된 매화나무가지에 봄바람이 불어오자 성기게 매화가 피어난 그 사이로 사람들이 봄나들이를 나와 매화 향에 취해 있는 모습이다.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파리에서도 기후 때문에 볼 수 없는 이런 풍경은 그를 매료시켰고 그래서 그는 이 우키요에를 당장 그려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전 다른 종이에 가로 17줄 세로 27줄의 모눈종이를 만들어 그 안에 원화를 조금도 틀리지 않게 옮겨 그려본 다음 이를 다시 캔버스에 옮겼다. 그런데 캔버스의 비례와 원화의 비례가 맞지 않아 좌우측에 여백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좌우 여백을 주황으로 칠하고 그 위에 한자로 된, 뜻도 모르는, 심지어 틀린 글자지만 정성껏 써 넣은 것이 아니라 그려 넣었다. 이것이 <꽃 핀 자두나무>(The Flowering Plumtree, 1887, 유화, 73X54cm, 반 고흐미술관)이다.



 고흐의 우키요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지나칠 정도였다. 그는 자신에게 유키요에의 남다른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알려준 탕기아저씨의 초상화 3점 중 2점의 배경에는 우키요예로 가득 채웠다.

고흐가 그린 <탕기아저씨의 초상>(Le Pére Tanguy, 유화, 92×75㎝, 1887, 니아르코스 컬렉션, 로댕미술관, 파리)에는 밀짚모자를 쓴 탕기아저씨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림의 배경은 후지산과 벚꽃나무와 일본 기녀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우키요에 4점이 배경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그려진 우키요에는 당대 최대의 문중을 이끌었던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가 그린 <후지36경 사가미강,富士三十六景さがみ川>, <53차명소회석약사,五十三次名所会石薬師>,<삼포옥의 다카오, 三浦屋の高尾> 등 3점과 케이사이 에이센(渓斉英泉, 1790~1848)이 그린 <기녀,花魁>이다. 


 


이 초상화에는 고흐가 관심을 보인 비대칭의 테두리, 그림자나 원근법을 무시하고 양식화한 인물, 단색의 배경은 일본 판화의 특징과 일치한다. 그리고 배경의 노랑, 초록, 빨강과 탕기의 푸른색 재킷은 원색을 강하게 대비시키며 강한 화면의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고흐는 이 작품에서 자연 그대로의 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함으로서 대상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색을 선호하는 표현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화려한 우키요에를 뒤로 하고 있는 탕기아저씨의 모습은 소박하고 선량한 인품과 사람 됨됨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 보다 조금 크기가 작은 다른 한 점의 <탕기아저씨 초상>(Portrait of Pere Tanguy, 1887~88, 유화, 65x51 cm. 개인소장, L.A. 미국)에도 거의 같은 우키요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탕기아저씨네 화랑에서 판매를 위해 걸려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또 하나의 탕기아저씨는 <탕기아저씨의 초상>(Portrait of Père Tanguy, 유화, 47x38.5cm, 1886~87 겨울, 니 칼스베르크 미술관, 코펜하겐) 2점의 초상화와는 다른 형식인 정통적인 초상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역시 이해심 많고 인정 있는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한 점의 드로잉이 있는데 이 초상의 배경에도 역시 <후지36경 사가미강>이 자리하고 있다. 



 테오와 함께 지내던 고흐는 탕기아저씨의 소개로 새로 문을 연 카페 탕부랭(Café du Tambourin)을 알 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네 번째 연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카페의 주인이자 화가 코로(Jean 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 마네(Manet),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모델이기도 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이다. 독특하고 이국적인 옷차림과 미모를 지녔던 그녀는 단숨에 고흐의 넋을 뺏고 만다. 여기에 그녀 또한 고흐의 정물화를 갖고 싶다고 하며 관심을 보이자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887년 초 파리에 온 지 불과 1년 남짓 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의 책과 에도시대(江戸時代) 우키요에 최대문중이었던 우타가와파(歌川派)의 작품 등 우키요에를 수집했다. 그는 이 우키요에 소장품을 가지고 그녀의 카페 탕부랭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곳에서 전시되었던 우키요에들은 암스텔담의 국립고흐미술관에 소장된 430여점의 판화 중 대부분 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전시기간동안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화>(Agostina Segatori Sitting in the Café du Tambourin, 1887, 유화, 55.5x46.5cm)에도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원탁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후에도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꾸준히 나타나는 우키요에를 발견할 수 있는데 1888년 12월 23일 아를에서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고갱과의 공동생활을 하다 끝내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자학적인 행동이후 그린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유화, 60.5x50cm, 코털드 인스티튜드, 런던)에도 화면의 배경 오른 편에 후지산을 배경으로 기모노 입은 여인을 그린 우끼요에가 걸려있는 모습을 그렸다. 

                                              고 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98

                                       고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의 세부. 뒷편에 우키요에 이미지가 보인다. 


 이렇게 고흐의 화가로서 인간으로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탕기아저씨는 고흐가 세상을 떠난 4년 후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화방에는 오늘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된 고흐는 물론 세잔, 베르나르, 고갱, 피사로 등등의 그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탕기아저씨의 화방에서 발견된 세잔, 베르나르, 로트렉 등의 작품. 이들은 서양근대미술사를 다시 썼다.  

결국 그가 사랑하고 후원했던 화가들이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듯 그 또한 그림을 가졌을 뿐 팔지 못하는 비록 상재 면에서는 부족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눈이 밝은’화상이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미르보의 소개로 그를 이어 인상파 화가들의 또 다른 후원자가 된 볼라르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근대미술의 여명을 여는 중요한 화상으로 등극한다.

사실 오늘날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하찮게 여기고 외면했던 시절 그들의 그림을 일찍이 밝은 눈과 애정으로 바라보고 이들을 지원하며 작품을 보관했던 탕기아저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탕기아저씨는 당시의 화가들에게도 ‘아저씨’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감동적인 그림들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저씨’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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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를 알아 본 최초의 화상 ‘탕기 아저씨’ 줄리앙 탕기(TANGUY Julien, 1825~1894)와 고흐의 만남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화랑이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시스템을 갖춘 것은 이미 18세기 중반의 일이지만 여전히 이 시스템에 적용되는 그림들은 귀족들의 호사취미에 봉사하거나 장식적인 그림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화풍의 그림, 특히 오늘날에는 고전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실험적인 미술이나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자신의 창작의 자유와 소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초한 어려운 길을 감내해야만 했다.


 특히 이 시기, 즉 산업사회로 이동하고 쁘띠 부르주아(Petit Bourgeois) 계급들이 등장하던 시절의 화가들에게 그림시장이란 그림의 떡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특히 불우한 화가들이 많았던 시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보편적으로 인류의 삶의 질이 한 단계 격상하던 이 시기와 일치한다. 이는 아마도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경제적인 부였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취미나 기호보다는 오직 일에 올 인하던 시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이솝 우화 속 ‘베짱이’취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하게 즐기기 위해 노래했던 베짱이가 아니라 ‘생각하는 손’을 통해 인류의 또 다른 가치를 찾고 이를 실천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젊었을 적 어려운 가운데도 열정하나만으로 버티며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난 화가들의 가슴 짠한 이야기들의 이면에는 항상 두 어 명의 천사 같은 사람들이 존재해서 우리들의 심사를 흩뜨려놓기 일수이다.

우리들에게 늘 마음 저리도록 처절한 삶을 살았고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최대의 영광을 누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있다.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시절에 인상파에 적을 두거나 적어도 후기인상주의화가라고 지칭되던 화가들 중 대부분은 세상이 아직 그들을 ‘베짱이’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의 새로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에 어렵고 힘든 생활을 감내해야했다. 물론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이나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1901) 처럼 원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화가들 몇몇을 빼고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도 당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의 길을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또는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늘 곤궁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간신히 끼니를 때우고, 카페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 즉 물감이나 캔버스 그리고 붓 같은 재료를 살 처지가 못 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때마다 이런 가난한 화가들에게 물감 등 재료를 외상으로 주고, 때로는 돈도 빌려주면서 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탕기 아저씨’(Pere Tanguy)로 불리는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Julien Francois Tanguy, 1825∼1894)이다.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 (드로잉, 1887)


 1867년에 몽마르트르(Montmartre)의 클로젤(Clauzel)거리에 물감가게 즉 화방 문을 연 탕기아저씨는 당시 몽마르트르에 몰려 살았던 많은 화가들과 교류했고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를 자처했던 많은 당시의 화가들이 그를 ‘탕기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매우 좋아했다.

  그는 때로는 화가 친구들을 위해 화구들을 챙겨가지고 파리에서 무려 70Km나 떨어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가 살았던 ‘만종’의 고향 바르비종(Barbison)이나 근처 모레 쉬르 르왕(Moret sur loing),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몰려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아르장퇴유(Argenteuil) 때로는 인상파의 장로라 불리는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가 있던 퐁투와즈(Pontoise)까지 돌아다니며 화구를 방문 판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당시의 화가들과 교우의 폭을 넓혔다.



                 <탕기 아저씨가 화구를 팔러다니던 지역을 지방으로 그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마네, <아르장퇴유 자기 집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83 

                                                           바르비종에 자리한 밀레의 아틀리에

 

                  
                                                         시슬리, <아르장퇴유의 다리>, 1872                    

                              피사로, <퐁투와즈의 얄라이스 언덕>, 1867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이렇게 화가들을 격의 없이 대하며 외상으로 화구를 공급해주거나 때로는 그림을 받고 물감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가들에게 팔리지도 않는 그림에 기꺼이 선불을 치르기도 했다. 사실 그 당시에 어느 누구도 그 화가들의 그림이 후대에 어마어마한 가치의 작품으로 평가받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적에 말이다.


 이렇게 한 3년을 지내다 보니 그의 화방 뒤 창고는 언제부터 인가 그림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1870년 그는 드디어 창고에 남아있는 그림들을 정기적으로 팔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고흐의 그림을 비롯해서 모네, 시슬레, 세잔느,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같은 화가들의 그림 중 하나도 팔지 못했다. 그러나 살롱전에 대해 꾸준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담하지 않고 꾸준하게 신선한 화풍의 이들을 도왔다.


 이렇게 그는 화상이라기보다는 화가들을 도와주고자 한 마음씨 좋은 정말 ‘아저씨’같은 사람이었다. 인상주의를 세상에 알린 성공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8~1939)가 1895년 세잔느의 생전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줄 수 있었던 것도 ‘탕기 아저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파리에서 세잔느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은 탕기아저씨네 화방 쇼 윈도우가 유일했다.


 탕기는 1877년부터 1893년까지 근 15년 동안 틈틈이 세잔의 그림을 자신의 화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세잔을 처음 본 볼라르가 전격적으로 세잔의 전시를 열어주게 된 것은 1895년의 일이고 보면 그는 비록 그림을 잘 팔지는 못했지만 잘 팔 수 있는 화상과 연결시켜주는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항상 겸손한 자세로 화가들을 대했고 그들의 조형적 태도와 미학에 동의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 화가들의 노력을 지지했고 그들이 비록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술비평가로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풍자잡지『그리마스』(Les grimaces)를 창간했던 옥타브 미르보 (Octave-Henri-Marie Mirbeau,1850~1917)에 의하면 탕기아저씨의 가게에는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 ~ 1941)의 그림들이 소장가를 찾기 위해 걸려있었다고 전한다.


 사회주의자로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에도 참가한 바 있는 탕기아저씨는 화가들을 자신의 이상향을 지키는 영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화가들을 도왔고 이런 과정에서 모인 그림들을 팔기위해 화랑 진열장을 오늘날의 윈도우 갤러리로 사용했고 화랑 모퉁이 방을 화랑으로 운영했다.


 특히 탕기아저씨의 고흐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대단했는데 그는 파리를 떠나기 전까지 3점의 탕기초상화를 그릴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 (유화, 47*38.5cm, 1886-7)


                              고흐 <탕기 아저씨의 초상화> 1887@로댕미술관.
               (초상화 뒤로 당시 파리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유행이었던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 이미지가보인다)


고흐가 빈센트가 탕기아저씨를 만나게 된 것은 동생 테오(Theo van Gogh, 1857~1891)를 통해서 였다. 이후 탕기는 이내 고흐에게 관심을 보였고 종종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고흐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 까지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첫 만남 이후 반 고흐는 탕기아저씨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던 시기는 물론 1889년 1월,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고흐가 아를(Arles)을 떠나 1889년 5월 8일, 생 레미(Saint Rémy)에 있는 생 폴 드 무솔요양원(The mental hospital of Saint Paul de Mausole)에 입원 중 일 때도 탕기아저씨는 고흐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를 돕고자 노력했다. 고흐도 이에 화답이나 하듯 병원에 있던 53주 동안 143점의 유화와 100점의 드로잉, 그리고 수많은 스케치를 그렸다. 이때 그린 고흐의 그림을 자신의 화방 모퉁이 작은 화랑공간에 전시를 하기도 했다. 이즈음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에 의하면 당시 고흐가 얼마나 탕기아저씨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어제 탕기 아저씨를 만났어. 그는 내가 막 완성한 그림을 가게 진열장에 걸었어. 네가 떠난 후, 그림 네 점을 완성했고 지금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야. 이 길고 큰 그림들을 팔기는 어렵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야외의 신선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야.”

 약 1년 동안 병세가 호전되는 듯 했던 고흐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테오는 한 걸음에 달려와 피사로가 소개해 준 오베르 쉬 즈와르(Auvers sur Oise)의 가쉐(Paul Ferdinand Gachet, 1828~1909) 박사를 주치의로 정하고 오늘 날 고흐의 마을로 알려진 이곳으로 옮겨와 라보(Arthur Gustave Ravoux)의 여관에 숙소를 정한다. 1890년 5월 20일의 일이다. 이후 심신이 피로하고 허약했지만 고흐는 이곳에서 머무르던 70일 동안 80점의 유화와 64점의 드로잉을 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슴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심장에 총알이 박힌 채 숙소인 라부(Ravoux)의 집으로 내려온 그는 자살을 시도한지 이틀이 지난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천재예술가였으며 평생을 고독한 영혼으로 살아온 그가 쓸쓸한 방랑객으로 눈을 감았다.


                                             오베르 쉬르와즈에 있는 빈센트 고흐(왼쪽)와 동생 테오의 무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 것도 탕기아저씨다. 그가 눈을 감은 다음날 급히 파리에서 내려온 탕기와 동생 테오, 베르나르 그리고 가쉐 박사가 오베르의 공동묘지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다음해 그의 동생 테오도 형의 옆에 눕고 만다.

 단 한번, 알베르 오리에(Albert Aurier, 1865~1892)가 쓴 비평문이 유일할 정도로 화가로서 불우하고 외로웠던 고흐지만 그에게 있어서 탕기아저씨는 천군만마보다 더 큰 힘이 되어 주었으며 그의 가게에서 처음 본 우키요에(浮世繪)를 통해 새로운 회화로 한 발 더 성큼 다가섰던 그는 3점의 탕기아저씨 초상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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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코코시대의 두 거장, 화가 와토와 화상 제르생

글/정준모(국민대 초빙교수, 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Rigaud Hyacinthe <Portrait of of Louis XIV of France, 루이 14세의 초상> 1701년 


절대왕정을 완성시킨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완성시킴으로서 프랑스의 영광을 실현시킨 그 시기부터 섭정시대까지 활동했던 와토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과 그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지방에 있던 유럽미술의 중심축을 프랑스로 옮겨왔다.

특히 루이 14세가 1715년 사망하자 프랑스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무려 72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소모적 전쟁과 사치로 엄청난 국가 부채에다 과다한 세금으로 허덕이던 프랑스는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해 오를레앙의 필립 공작(Philippe d‘Orl?ans, 1674~1723)이 통치하는 ‘레장스’(R?gence; 섭정)를 맞게 되었다.



                     루이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했던 오를레앙 필립공.


당시의 문인이자 계몽 사상가였던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섭정시기 8년(1715~1723)을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프랑스인 본연의 민족성을 되찾은 시기”였다고 말 할 만큼 획기적인 시기였다. 

                     
                                            Houdon의  볼테르 좌상



감시와 통제를 위해 루이 14세에 의해 강제이주 하다시피 했던 귀족들은 감옥처럼 지긋지긋한 했던 베르사이유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새로 집을 짓거나 저택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집안을 화려하고 섬세하게 하지만 때로는 조악할 만큼 장식을 과도하게 했는데 이 시기 이런 양식을 로코코(Rococo)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 화려하고 장식적인 화풍으로 로코코(Rococo)시대를 대표했던 장 앙투안 와토 (Watteau, Jean-Antoine, 1684~1721)는 이미 당대에 명성과 부를 이룬 화가였다. 단지 후세사람들이나 당사자 모두에게 아쉬운 것은 그가 불과 37살이 되던 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데 있다. 
그의 화풍은 로코코 회화의 창시자이자 대가답게 경쾌하고 뛰어난 붓놀림으로 마치 속사를 하듯 그림을 그려냈으며 당시 풍속이나 패션, 연극, 소풍장면 등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여 오늘날 사회사나 복식사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화려하고 온화한 자신만의 색채와 분위기를 완성시켜 독특한 자신의 화풍을 구사했는데 그의 동료들이었던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이 ‘사랑의 향연’이라고 부를 만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당시 귀족들의 전원 속의 삶을 그렸다.


그의 화풍은 당시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왕조문화의 궁전풍속을 비롯하여 주로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던, 밝고 우아하며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매력을 풍기는 풍속이나 취미에 적합한 화풍이었고 로코코회화 특유의 테마와 정서를 반영하는 그림이었다. 


자연을 충실하게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풍을 이은 다른 로코코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움이 있었는데 이런 그의 화풍을 당대 사람들은 ‘아연(雅宴: 페트 갈랑트 fete galante)’이라고 규정했다. 프랑스 미술이 로코코 풍을 완성시키면서 이탈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전 유럽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 중심에는 와토와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 샤르댕(Jean-Baptiste-Sim?on Chardin, 1699~1779)  같은 이 들이 있다. 


그리고 새롭게 파리가 귀족들의 삶의 본거지가 되고, 집안을 새롭게 장식하고 꾸미는 동안 급격히 커진 프랑스 특히 파리의 미술시장은 플랑드르지방의 새로운 시스템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북 유럽 일부를 제외한 유럽에서는 여전히 그림을 사고팔기 보다는 주문 제작이 중심을 이루었고 이런 구조는 약 3~4백년이나 주목할 만한 변화 없이 지속되어 새로운 미술이 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따라서 화가들도 고객들의 눈높이에 봉사하는 미술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의 뛰어난 상재는 미술시장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고 상업을 통해 급성장한 중산층들의 그림수요가 폭증하면서 미술시장도 급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어느 정도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파리에서도 미술시장의 수요가 확대되면서 이런 선진적인 화랑시스템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화상과 같은 미술 중개인, 대리인, 그리고 갤러리는 시간상으로 고작 400여년에 불과한 1600년 경 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100여년이 지나 견고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절대왕정을 이룩한 1700년대이며, 루이 14세 이후의 프랑스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오늘날 대도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강력한 갤러리 시스템을 완성했는데 그 중심에는 위치했던 인물 중 하나가 에듬 프랑소와 게르생(Edme-Fran?ois Gersaint, 1694~1750)이다. 


당시 게르생은 브루군디 지방에서 파리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상인집안 출신으로 주식과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처음에는 그림을 수집하기 위해 세느강의 쁘띠 퐁트(Petit Pont)변에 화가이자 화상이었던 안토니 듀오(Antoine Dieu, 1662~1727)가 1699년 설립해서 1714년까지 운영했던 화랑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718년 이 화랑을 인수해서 태양왕의 천사라는 뜻의 <오 그랑 모나르크> (Au Grand Monarque)라는 이름의 화랑을 시작했다.  

최근 미술사학자 기욤 글로리유(Guillaume Glorieux,1971~ )는 게르생의 1725년과 1750년의 창고물품목록을 발견했는데 여기에 의하면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이국적인 진귀한 물건, 열대바다에서 나오는 조개껍질, 일본의 칠기와 중국의 도자기, 차와 커피, 동양의 칠기와 도자기, 차, 커피 마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다루었으며 그림과 함께 깨끗하고 멋진 액자와 거울 등 당시 파리가 문명의 중심이 되고자 필요했던 거의 모든 것을 거의 수십 년 동안 취급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우리는 초기 화랑의 형태가 어떠했던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당시 미술품을 다루는 상인 즉 화상들의 주요 임무는 자신들이 취급하는 화려하고 귀한 품목들로 귀족들의 저택 실내를 장식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귀족들의 저택 내부를 꾸미는데 필요한 가구와 집기 및 동양 도자기와 같은 이국적인 풍물이나 공예품을 컨설팅하고 판매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게르생 역시 초기에는 회화 작품에 주력하다가 점차 거래 품목을 온갖 종류의 값비싼 물품들과 희귀품목(nouvelles curiosit?s)으로 확대해나갔으며 당시 이런 상인들을 ‘마르샹-메시에’(marchand-mercier)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들이 취급하는 미술품 특히 그림도 실내 장식의 한 기능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게르생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시대 그리고 섭정 시대와 루이 15세의 시대를 통해 발달한 로코코 양식이 지배했던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화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호화롭고 화려했던 시대의 미술 시장과 호화사치품, 골동품 이국적인 풍물에 이르기까지 화랑에서 취급하는 품목을 넓히는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 그림을 팔기위해 작가와 주제, 크기, 제목, 매체 및 가격별로 분류하고 나열한 카탈로그를 만들어 그림을 팔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상재를 지닌 인물이었다. 


와토는 프랑스 파리로 나와 당시 오페라극장의 장식 화가였던 질로(Claude Gillot 1673.~ 1722)를 사사한 후 뤽상부르 궁전의 장식가인 오드랑(Claude Audran, 1657~1734)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특히 그는 초기에 희극배우들을 비롯한 인물을 주로 스케치했는데 오드랑과 함께 궁전에 들어가 바로크 회화의 거장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1640)의 작품을 접하고 감화를 받는다.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와토는 일찍부터 폐병을 앓아 1720년 요양 차 런던에 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런 와중에 친구 제르생이 화상을 시작하면서 간판그림을 부탁했고, 그 부탁을 들어 제작한 것이 <제르생의 간판>(Gersaint’s Shopsign, 1721년, 유화, 163x308 cm,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소장, 베를린)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몇 주 뒤 세상을 떠났으나, 18세기 전 유럽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와토 <제르생의 간판>



이 작품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간판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시기적으로 레장스 시기 초기 로코코 양식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와토의 정신과 양식에 대한 상징적인 요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있다는 점에서 간판이라기보다는 와토의 대표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간판’에는 와토의 전형적인 특색인 가볍고 밝게 빛나는 양식 안에 매우 사실적이며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한 주제를 통해 희비가 엇갈리는 아이러니를 전달하는 와토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역사와 예술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나름의 상징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회화적 규범 그리고 상류 부르주아계급까지 확대된 미술시장의 규모와 당시 유행했던 화풍이나 거래방법, 화랑들이 취급했던 물목 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생생하고 약동적인 이미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당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초 프랑스의 미술가, 미술상인, 수집가에 관한 단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림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당시의 시대상을 담아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제르생의 화랑은 노르르담 다리 위에 위치한 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 갈수록 깊어지는 구조를 지닌 수많은 상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와토가 그린 이 작품에서, 게르셍의 화랑은 도로변에 접한 면이 문이나 벽도 없이 개방된 구조로 안쪽에는 화려한 살림집이 딸린 구조로 그려져 있다. 

벽에 가득 걸려 있는 그림들은 평소 와토가 존경했던 플랑드르 지방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나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그리고 이탈리아의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경~1576)와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과 같은 작품들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인물의 됨됨이는 그림 속 그림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와토의 기호와 취미 그리고 동시에 당시 프랑스 컬렉터들의 취향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게르생이 제 아무리 컬렉터로서 경험과 안목을 가지고 미술시장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화랑 문을 연 지 1~2년에 불과한 게르생에게 이런 인기 있는 바로크 풍을 대표하는 작품을 다루는 데는 역 부족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새로 화랑을 개업하는 친구 게르생의 화상으로서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제르생의 화랑을 실제로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예술이 중심이 되었던  시대의 파리를 그리고 미술 시장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주었던 아주 우아하고 높은 안목을 지녔던 고객과 성숙한 무역업자가 등장한다. 3미터가 넘는 대작인 이 작품은 크기 때문에 두 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간판으로 유효했던 것은 불과 몇 주에 불과했다. 어떤 손님이 간판을 사겠다고 나섰고 그래서 몇 주 후에 판매되고 말았다. 그 후 이 작품은 일부가 유실되었는데 캔버스를 다시 팽팽하게 매는 과정에서 몇 인치정도가 날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에는 당시 화랑의 풍경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영국의 풍속화가 겸 풍자화가인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를 인도한 셈이다.
                                           William Hogarth <The Marriage Contract, 결혼 계약> 1743


사실 그림 속 인물에 대해서는 그 설이 분분하지만 그 중 하나를 빌어 그림을 살펴보면 왼쪽에는 점원이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1659~1743)풍의 루이 14세 초상화 한 점을 나무 상자 안에 담는 중이다. 이것은 바로 루이의 시대가 갔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프랑스 역사의 전환점이자 미술에 대한 취향과 인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오른쪽으로는 자신들의 저택을 장식할 그림과 소품을 고르는 세련된 귀족, 혹은 부유한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또 그림의 상태를 살펴보려는 듯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명은 서서 오페라 안경으로, 또 한사람 금발의 점원은 작품을 돋보기로 열심히 감정하고 있다. 이들이 보고있는 그림은 벌거벗은 님프가 목욕을 하고 있는 로코코시대의 전형적인 페트 갈랑트(우아한 연회)의 전형적인 예이다. 감정하는 점원의 대각선 즉 타원형 그림 뒤에 서서 그림을 설명하는 이는 제르생이다. 

<제르생의 간판> 세부1. 원형의 그림 앞에서 설명하는 이가 제르생이다.


그림의 뒤 배경에 걸려있는 그림들 중 하나는 사티로스가 갈대 숲 속에서 님프를 쫒아가는 관능적인 신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 그림들은 풍경, 신화, 그리고 누드의 여신상들로 18세기 초 프랑스 회화를 풍미하던 소재와 형식을 가벼운 터치와 창백한 색채로 모사하고 있다. 또 어둡고 근엄한 17세기 풍의 초상화나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회화를 연상시키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나 기도하는 수사 등을 그림 그림이 있지만 이 그림들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화랑 귀퉁이에 걸려있다. 


 화면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은 와토로 추정되는데 그는 정중하게 분홍 비단옷을 입은 한 숙녀를 화랑 안으로 이끌고 있다. 그녀는 화랑 안으로 들어서다 그림을 포장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여기에 카운터에 기대어 게르생의 부인이 열심히 작은 소품을 보여주며 그림을 설명하지만 그것을 듣는 귀족들의 태도는 심드렁하다. 이 작품은 장르화의 하나지만 원근법을 살려 화면에 깊이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장르화 와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이 그림에 의하면 압제와 공포의 루이 14세 시대는 가고 이제 귀족들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분위기는 섭정을 맡았던 오를레앙 공작이 죽고 1723년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 시대에 와서 맞게 되면서 로코코 양식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기 문화와 예술은 주로 살롱(Salon)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개 부인들이 특정 한 날 자기 집에 문화예술계 명사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하며,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 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는 풍습이 있었다. 

부쉐, <마담 드 퐁파두르> 1756


이 시기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1721~1764)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궁정의 극장을 관리했고, 지식인들과 왕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며 화가나 조각가와의 연계를 통해 18세기 문화와 예술 발전에 공헌했다. 

여기에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지지하고 보수적인 가톨릭과 왕당파들이 금서로 규정한 백과전서를 출판할 수 있도록 도운 여걸이었다. 루이15세의 총애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죽은 후 “20년에 걸친 우리 관계는 특별한 교제와 우정”이라고 술회할 만큼 역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로코코 회화의 완성과 절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귀족들의 권위를 되찾아 주었다는 평가와 함께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시대가 바뀔 즈음엔 언제나 사회, 정치, 문화, 예술분야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사람들이 같이 호흡할 동지들이 있을 때 가능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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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적인 미술시장의 탄생-해방과 속박의 경계에서

글 정준모(국민대 초빙교수, 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James Gillray가 그린 크리스티 풍경 캐리커처.(1796) - 배우 엘리자베스 패런(Elizabeth Farren)과 더비 경이 그림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다.

 


예술이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예술이 종교적, 봉건적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해방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예술과 돈과의 관계를 멀리 유지하려했지만 결국 그들의 해방은 다시 경제적 세력과의 해방과의 싸움을 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렇게 돈과 예술이 결합하는 것이 오늘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경제와 산업발전에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이들의 욕망은 예술에서조차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언제나 돈으로 거래되었다. 예술품에 대한 욕망은 이미 기독교가 공인을 받기 전인 로마시대에도 존재했다. 오늘날 예술품 시장이자 미술시장을 대신하는 경매(Auktion)가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다. 요즘 사용하는 경매(Auction)라는 명칭은 라틴어 'actio'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물거래로부터 비롯된 옥션과 성서고고학

요즘 예술품 시장과 유사한 시장의 초기형태는 중세에 호황을 누리던 성물 거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가시 면류관’, ‘성의’나 ‘순교자의 유골이나 유물’을 숭배하는 ‘성물숭배사상’은 그리스도나 성인으로 추대된 사람 또는 순교자들의 몸의 일부나 유품은 신성한 힘을 지닌 물건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러한 성물들을 소유하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고 때로는 성자들의 신체는 사후 나누어 가지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또 이러한 성물을 소장한 성당들이 위치한 도시는 많은 신자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성물 거래는 성서고고학을 잉태시켰다.



이후 성물숭배사상은 미국의 고고학자 윌리엄 F. 올브라이트와 그의 제자 G. 언스트 라이트를 통해 성서에 나오는 내용들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하는 ‘성서 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이라는 학문을 개척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그릇된 종교적 열망이 성물소유를 위한 행동의 동기가 되었고 권력자나 성직자, 부호들에게는 성물을 소장하기위해 경매 물품 목록을 뒤적이는 것이 일상이 되거나 습관이 되었다.
루이 13세를 등에 업고 무소의 권력을 행사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Armand-Jean du Plessis, cardinal et duc de Richelieu, 1585~1642)은 이탈리아에서 팔려고 내놓은 골동품을 그린 스케치가 들어있는 책을 보고 귀중한 물건을 선택했다. 영국의 국왕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누가 좋은 그림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여행목적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소장가들에게 접근하여 작품을 구입해왔다. 1328년부터 1707년까지 약 400년간 만토바를 지배한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곤차가 가문도 이러한 영국국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용병대장들이 노획해온 전리품을 팔아 전비를 마련했던 곤차가 가문의 어려운 재정상황은 결국 영국 왕에게 많은 귀한 미술품을 넘겨주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열심히 수입을 통해 미술품을 모은 영국에 드디어 17세기 말이 되자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는 곧 국경을 넘는 활기로 이어지면서 미술품이 국경을 넘거나 주인이 바뀌는 일이 많아졌다.


미술관 보다 앞서 형성된 미술 시장

이렇게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시장은 미술관의 역사보다 일찍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관이라 칭하는 루브르가 루이 16세가 처형되던 1793년 개관한데 반해 최초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이보다 27년 앞 선 1766년 런던에서 문을 열었다.

Thomas Rowlandson and Augustus Puginn , <크리스티의 옥션 룸 Christie's auction room in London>(1808-11).


미술시장이 문을 열자 많은 미술품들이 몰려들었고 화상들은 미술품을 중개하고 화가와 소장가들의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술품 수장가들은 후원자에서 수집가로 입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하고 아름다운 미술품 수집은 나라간의 경쟁으로 까지 번져나갔다. 이는 자신의 국가의 위신이나 국격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 러시아의 카타리나 여제(예카테리나 2세)



그래서 러시아의 카타리나 여제(Catherine II of Russia, 예카테리나 2세, 1729~1796)는 1764년 러시아 대사 돌고루키(Dolgoruky)의 주선으로 베를린의 화상 고츠코우스키로부터 유럽회화작품들을 구입했다.

돌고루키가 베를린에서 사들인 225점 중 Jacob Jordaens가 그린 '가족초상화'(1615)



돌고루키가 베를린에서 사들인 에르미타주 컬렉션 중 FransHals가 그린 <장갑을 쥐고 있는 청년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Man Holding a Gove>(1650)


이후 외교관들의 임무중 하나는 북유럽의 베니스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궁전에 미술품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Karl Beggrov가 그린 <에르미타주 궁전 Hermitage_Museum, View_of_the_Palace_Embankment)>(1826)

카타리나 여제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그의 연인이자 심복이었던 드미트리 고리친의 지휘로 10여 년간의 수집을 통해 그녀의 ‘겨울궁전’에는 약 2천여 점의 미술품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것이 모태가 되어 오늘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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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가들 상인을 겸하다-최초의 화상은 화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4)가 시스틴 성당에서 천지창조를 그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 <고뇌와 절정>(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을 보면 그림을 주문한 율리우스 2세와 다투는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분한 <고뇌와 절정>. 이 작품에는 시스틴 성당 천장화를 주문한 율리유수 2세와 미켈란젤로가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다툼의 원인은 돈 때문이었다. 작업에 필요한 대금을 계약대로 주지 않고 지급일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인문학이 절정에 이르고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후원이 가장 융성했던 르네상스 기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화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놓고 다음 소장가나 컬렉터를 찾는 대신 당시의 화가들은 주문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즉 화가들의 자유의지로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주문에 의해 그림을 그렸고 주문자는 특정한 색을 지정하고, 초상화의 경우 어떤 모습으로 그려달라는 것을 계약서에 명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은 오늘날과는 달리 철저한 주문제작에 의한 상품이었고 여타의 공방에 물건을 주문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초상화 제작이 주를 이루었던 당시는 요즘의 맞춤양복을 주문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계약조건에서 화가들을 괴롭힌 것은 작품이 주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그림을 인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급한 경비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또 계약서에 의하면 당시 귀했던 금이나 금색을 사용한다던가, 울트라마린 블루를 사용하는 경우 특별히 몇 그램을 사용한다고 명시할 정도였다. 왜냐면 울트라마린 블루의 경우 동방에서 수입한 준보석인 청금석을 간 후 그 가루를 여러 번 물에 녹여 추출해내는 고급의 안료로 매우 고가였기 때문이다. 


또 사실적인 화풍으로 르네상스를 강타한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1573~ 1610)의 삶을 돌아보면 당시 미술품 유통구조를 대강이나 그려볼 수 있다.


1595년, 25세가 된 카라바조는 조수생활을 청산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스튜디오를 연다. 그의 그림을 팔아줄 마에스트로 발렌티노(Maestro Valentino)라는 화상을 만난 때문이다. 어렵게 그림을 기던 그는 화상 발렌티노를 통해 교황의 실력자인 고위성직자 프란체스코 델 몬테(Francesco Maria del Monte, 1549~1626)추기경의 눈에 들어 그의 처소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타고난 다혈질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은 내내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컬렉터들 덕분에 다행히 연명할 수 있었다. 

카라바조, <성 바울의 개종(Conversion of St. Paul or 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1600~01), 캔버스에 유화, 230x175cm, 이탈리아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성 바울의 개종>의 수난은 당시 화가들의 처지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이다. 작품을 주문받은 카라바조는 자신의 방식으로 말에서 떨어지는 바울을 그렸으나 성당 측은 당시의 성화들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인간적인 바울을 보고 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부했다

이 일로 <성 바울의 개종(초판)>은 성당을 책임지고 있던 사네시오 추기경(Cardinal Sannesio)이 작품가를 지불하고 소장하게 되었고 현재는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 케이티 홈즈가 결혼식을 올린 로마 근교의 카스텔로 오데스칼치 성에 소장되어있다. 


화가면서 화상이었던 루이스달과 렘브란트 

그의 역동적 화면 구성과 테네브리즘(Tenebrism)[각주:1]을 계승한 17C의 렘브란트, 루벤스 등은 그림을 파는 재주에서는 카라바조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이미 바로크시대(1600∼1700년대 중반)로 접어들면서 화가들은 중산층과 시민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던 시기로  이 시기 대표적인 화가들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물론 루이스달(Salomon van Ruysdael, 1600,1603?~1670),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등은 화가로서의 재주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화상으로서의 재주를 겸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루이스달(Salomon_van_Ruisdael), <Ferry on a River>(1649), 101.5x134.8cm, 미국 워싱턴DC National Gallery of Art

외교관으로 외국을 떠돈 루벤스는  헤롯왕의 영아학살을 주제로 한 <Massacre of the innocents>(1611-2).

그는 외국 귀족들의 취향을 파악해, 역사화를 주로 그렸다. 그림은 공방에서 대량제작했다. 


 루벤스는 화가이자 외교관이었으므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많아 귀족들과 친분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취향을 간파하고 주로 귀족들의 일대기나 위대함을 주제로 한 역사화를 그렸다. 게다가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 분업 방식을 통해 다량제작방식을 운용했다. 우선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이 색칠을 하고 루벤스가 마무리를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경우 루벤스는 자신이 그렸다는 의미로 ‘Rubens Pinxit’라는 사인을 남겼다. 또 풍속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풍속화를 잘 그리는 브로웨르(Adriaen Brouwer , 1605~1638)가 그린 그림을 사 그 위에 더 그려 자신의 그림으로 팔거나 풍속화에 재주가 있는 다른 화가의 제자나 또 다른 화가들을 고용해서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다. 

<카드놀이를 하는 농민들>(1630~40)브로웨르는 브라우버르로 불리기도 하는데 플랑드르 지방의 농민들의 삶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브로웨르<술에 취한 농민 The bitter drunk>


 렘브란트는 리히텐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면서 경쟁이 심한 풍속화를 피해 경쟁이 비교적 덜 한 초상화분야를 선택해서 화상 헨드릭 반 율렌버그 (Hendrick van Uylenburgh, c. 1587~1661) 의 중개로 명성을 얻은 다음 역사화, 단체 초상화, 풍경화 등으로 분야를 넓혔다. 


렘브란트, <The night  watch(혹은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렘 반 라위텐부르흐 민병대)>(1642), 캔버스에 오일, 
363x437cm, 네덜란드 라익스 미술관 Rijksmuseum 소장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도 여러 점 남겼다. 왼쪽은 1640년 제작한 자화상, 오른쪽은 1669년 제작한 자화상. 



 영국의 화가 호가스는 화가나 판화가로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돈을 내고 배울 형편도 되지 못했다.시계 기능공으로서 은세공 기술을 익혀 판화가로 특히 인기가 많은 풍자적 판화로 인기를 얻으며 부호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화상의 등장: 플랑드르 지역의 경제적 안정과 그림의 수요 증가

특히 플랑드르 지방의 17세기는 소위 ‘황금시대’(Golden Age)라 일컬어지는 경제적 성장은 렘브란트 혹은 루이스달과 같은 재주 있는 화가들의 지위만을 상승시킨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유명 화가들은 늘 금전적으로 어려웠다. 그것은 수요 부족 때문이 아니라 수요가 넘쳐난 때문이었다.


 해양왕국 스페인의 뒤를 이어 대양을 장악한 플랑드르 즉 오늘날의 네덜란드는 많은 중산층들이 생겨나고 그림에 대한 수요 또한 폭증하였다. 이렇게 수요가 많아지자 지배자들은 미술가의 자격제한을 철폐하고 미술가 길드가  해체되면서 너도나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등장했고 바야흐로 화가들의 범람시대를 맞게 되면서 그림의 공급과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는 7만점의 그림이 시장에 나왔으며 어떤 그림이건 소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에 나온 그림에 대해 질을 담보할 만한 장치가 필요했고 그 결과 그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화상을 신뢰하고 그들의 신용을 담보로 작품을 구입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즈음 또 다른 변화가 화상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는데 그것은 화가와 화상이 가입되어있는 길드의 미술품에 대한 수요는 고정되어있었다. 그 이유는 가격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공급이 수요와 같아야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미술품의 공개적인 매매를 확하게 반대했다. 공개매매는 통제 할 수 없는 미술품의 공급과잉으로 나타나 가격하락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alomon van Ruisdael, <View of Deventer Seen from the North-West>(1657), Oil on oak, 
52x76cm, 런던 National Gallery


하지만 그와 반대로 풍경화가 루이스달를 중심으로 한 하를렘(Haarlem)의 화가집단은 공개매매 즉 경매방식을 선택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 수요를 촉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은 1644년 하를렘 시장으로부터 그림을 공개판매 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미술품에 대한 수요를 자극함으로서 미술시장의 확대를 꾀하는 판매기법이 된 것이다. 


미술 시장의 출현과 발달

그리고 길드에 의해서 통제되던 미술시장의 시장적 행위들이 힘을 잃게 되면서 미술시장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경매결과가 그림을 소장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이렇게 미술시장이 급증하면서 새로운 판매방식과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고 점차 전문적인 화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에 의해 미술시장은 수 백 년 동안 발전을 거듭했다.  


화가들은 이즈음 작품 제작단가 절감방안을 연구하여 실천에 옮겼을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안목을 바탕으로 중요한 미술품이나 골동품 등을 사두었다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창조하기도 했다. 사실 렘브란트가 말년에 어렵게 보내게 된 것도 미리 사논 작품에 문제가 생겨 빛을 냈던 것이 원인이었다. 



*화가보다 그림중개상으로 더 열심히 활동했던 베르메르. 

왼쪽부터 차례대로 <A girl with pearl earing> 1665. <The Music Lesson(또는 A Lady at the Virginals with a Gentleman> ca.1662-5 <The Milkmaid>1658


또 유명한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도 자신의 그림중개인이 있었지만 스스로 화가보다는 중개인으로서 시간을 더 할애했다고 전해진다. 

인류역사상 ‘주식회사’를 처음으로 고안해 낸 네덜란드인들이 그림을 파는 전문 화상의 길도 열어간 것을 보면 역시 그들의 상재는 당 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글/정준모(문화정책, 국민대 초빙교수)

  1. tenebrae는 어둠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조가 창안한 극적인 명암대조법을 말한다. 한 줄기 빛이 화면에 쏟아지고,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대비시켜 주제를 강조하는 것으로 렘브란트가 즐겨 사용했다. 이처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명암의 표현은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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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화가와 화상, 그 애증의 관계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화가들과 사조들이 명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름이 붙어있는 많은 화가들과 사조들이 미술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만 미술사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미술가 무리를 넘어선 자들만 우선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우리 곁에 남았을 뿐이다.

고흐가 생전에 그림을 한 점 밖에 팔지 못했던 시절, 당시 사람들은 그림을 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고흐의 동생 테오가 형의 작품을 단돈 100프랑에 팔던 시절 같은 화랑에서 프랑스 화가 알프레드 드 뇌빌(Alfred de Neuville, 1852~1941)의 그림은 15만 프랑에 팔렸다.

화가들의 경제적, 세속적 성공은 그가 살아있던 시절에 이루어졌다면 더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을 터이지만 모든 화가들에게 그런 영광이 찾아드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어이없게도 그가 어렵게 살다 죽고 나서 그 생전의 비운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거래되어 부러움과 함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시장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이런 일은 단순하게 운명이 결정지어주는 것은 아니다. 신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법의 힘, 가치 없는 것을 돈을 주고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귀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능력이 화가들에게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마치 사제가 밀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를 ‘주님의 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화가들의 것이 아니라 화상(gallerist)들의 몫이다.

이들은 문화적 재화인 미술품을 경제적 재화인 ‘돈’으로 바꾸어 낼 줄 아는 환전상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물적인 감각과 천부족인 사업 감각으로 작가와 그림을 고를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미술시장이라는 체제가 만들어내는 신화가 작품의 경제적인 가치의 척도가 된다. 미술시장에서 전설 같은 이익을 가져다 준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화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무명의 청년작가를 발견하고 그를 지원하고 후원하면서 많은 그림을 확보한다. 그 후 그가 유명해지면서 그 화상은 천문학적인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화상들이 이렇게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화상으로서의 본분(?)을 벗어나 작가와 작품에 대해 작가 못지않은 열정으로 덤벼들었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해서 불우한 말년을 맞은 이들도 많다. 경우에 따라 돈만 아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화상들이지만 이들 중에는 돈만 아는 이들, 돈도 알고 그림도 아는 이 그리고 돈 보다 그림이 좋아 실패한 화상들로 나뉜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돈도 벌고 명성도 얻는 동시에 미술사에서도 화랑과 화상들의 감각과 의지는 때로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고 실험적인 미술활동의 아카데믹한 평가를 이끌어 냄으로서와 미술사 발전에 한 몫을 하기도 한다.

인상파를 키운 폴 뒤랑 뤼엘.


현대미술의 단초가 된 인상파는 폴 뒤랑 뤼엘(Paul Durand Ruel, 1831∼1922)이라는 파리의 화상이 없었다면 미술사에 등재되지 못 했을 것이다. 또 20세기 미술사를 관통하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피카소 역시 프랑스의 화상이자 출판업자였던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8~1939)와 만남을 통해 그의 천재성은 발휘될 수 있었다. 그는 드가와 세잔, 마티스와 같은 무명 화가들을 발탁해서 천부적인 안목과 비즈니스 감각의 조화를 통해 작가들을 지원해 줌으로써 화상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입체파 작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다니엘-헨리 칸바일러


칸 바일러(Kahnweiler, Daniel-Henry,1884~1979) 화랑과 입체파, 오늘날의 구겐하임미술관의 모태가 된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의 금세기 예술화랑(Art of this Century Gallery)과 추상 표현주의, 베를린 슈투름(Der Sturm) 화랑을 열고 같은 이름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코코슈카 등 표현주의 미술을 미술사에 등재시킨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1879~1941), 미국의 팝아트를 대표하는 야스퍼 존스, 앤디워홀, 로버트 라우젠버그 등을 키워낸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1907~1999)의 존재 등을 살펴보면 미술사에 새로운 유파가 등장할 때 마다 화랑의 후원과 이해아래 발전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또 1955년 ‘움직임’이라는 전시를 개최한 드니즈 르네(Denise Rene, 1913~ )는 ‘키네틱 아트’의 산파로 미술사에 당당하게 그 이름을 등재시켰다.

이렇게 미술사를 풍성하게 해준 패트론(Patron)으로서의 화상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서 그들의 삶을 지배한 것이 돈이었는지 아니면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혜안이 그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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