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원작이 선사하는 감동을 느끼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때의 경험은 기록이 아닌 기억으로 남는다. ⓒ 홍경한
10여년 전만 해도 미술전시에 가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에 올리는 문화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는 많이 변했다. 사진과 영상에 기반을 둔 플랫폼이 유행하면서 기존 미술관의 엄숙하고 무거운 느낌을 걷어낸 전시들이 인기다. ‘인생 짤’ 운운하는 인증샷 테마전도 부쩍 늘었다. 이를 소위 ‘인스타용 전시’ 혹은 ‘갬성(감성) 전시’라 부른다.
인스타용 전시를 찾는 관람객의 다수는 20~30대이다. ‘느낌적인 느낌’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에게 전시장은 일종의 문화놀이터에 가깝다. 미술관은 스튜디오이며 작품은 ‘나’를 빛내는 소품이다.
교양과 오락 사이의 모호한 중간지대인 이런 전시들은 대중과 예술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이래저래 자주 접하다보면 전시장과 작품에 대한 친근감도 생길 수 있으니 보다 능동적인 참여형 전시가 늘어나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가볍게 휘발되는 인스타용 전시들에는 없는 게 많다. 우선 작품이 없다. 단지 나를 빛내기 위한 도구로써의 이미지만 가득하다. 미술이 지닌 미학적, 철학적 의미 역시 발견하기 어렵다. 원작이 선사하는 감동도 없다. 거장들의 이름을 내건 채 휘황찬란하게 꾸며놨으나 대부분 거짓이자 가짜이다.
인스타용 전시이기에 읽히는 건 있다. 바로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의 암울함이다. 실제로 인스타용 전시의 흥행 이면엔 동시대에서 이루지 못한 인정에 관한 욕망과 불안이 들어 있다. 여기엔 사회 속 상실되어 가는 존재감을 비롯해 확인될수록 고통스러운 타자성도 녹아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실이 인스타용 전시에선 곧 돈이다. 그들은 위축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나마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허구적 환경을 제공해 돈을 번다. 실존에 대한 자각의 두려움에 대리만족과 환상이라는 진통제를 주사한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취한다. 이것이 인스타용 전시의 속살이다.
장사란 원래 상품을 팔아 이윤을 챙기는 것이 주업이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젊은 세대의 심리적, 현실적 결핍을 ‘과시’와 뭔가 그럴싸한 이미지로 포장할 수 있는 미술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품이다. 그러나 불안정한 삶의 리얼리티가 환영에 의해 잠시 감춰진다고 사라지는 건 아닐뿐더러, 사회적 책임에 가치를 두는 미술이 오로지 돈벌이에 소비된다는 측면에선 그리 반길 만한 것은 못된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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