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국내 주요 비엔날레들은 오랜 연구 없이 잠시 반짝한 남북한 화해 분위기에 기생한 전시를 기획에 빈축을 샀다. 작품 ⓒ천민정
올해 총선에 나선 여당 예비후보들의 주된 표제는 문재인 대통령 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길을 걷다 보면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현수막으로 내건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으며, 예비후보 경력에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포함시킨 경우도 심심찮다.
단지 전·현직 대통령 이름을 빌렸다고 지역일꾼으로 뽑는 유권자들이 있을까 싶다가도, 효과가 있으니 저런 장면들을 연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국민들을 위한 정책과 비전이 아닌 이념과 계파주의로 승부하려는 전략이 긍정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아니, 솔직히 필자는 그들의 양태를 친문마케팅이라 쓰고 ‘기생 정치’라 읽는다.
일반적으로 ‘기생(寄生)’은 숙주(宿主)에 의지하여 생존·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숙주와의 관계에 따라 공생하기도 하나, 대체로 해를 입히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미술계에도 기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시에서 곧잘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2018년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는 ‘북한’이었다. 당시 국내 주요 비엔날레 중 한 곳은 출품작의 다수가 북한을 주제로 한 것이었으며, 또 다른 비엔날레는 아예 섹션 하나를 북한 선전화로 채웠다. 이밖에도 북한을 다룬 사진전, 북한미술 소장품전 등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문제는 오랜 시간 연구된 성과로서의 전시라기보다는 잠깐 반짝하고 말 남북한 화해 분위기에 기생한 전시였다는 데 있다. 또한 정치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적이면서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는 기획들이었음에도 숱하게 만들어지고 이내 산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숙주로부터 필요한 영양성분을 섭취하여 살아가는 기생 전시들은 드물지 않다. 원작의 가치 따윈 아무 의미 없다는 듯 거장들의 이름에 빌붙어 예술인 양 하는 ‘짝퉁전시’들이 그렇고, 감동의 기억에 앞서 기록을 우선시하는 인스타그램용 전시들이 그렇다.
여기에 우리 작가들을 외면한 채 막대한 세금까지 퍼주며 모셔오는 외국 작가들의 사대주의적 이벤트성 전시와, 연예인들의 자본과 유명세에 묻어가는 수준에 불과함에도 거창하게 가공된 전시들 역시 기생 전시라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전시들은 시류에 편승한 대중영합주의를 제외하면 남는 게 없다. 호들갑스러운 마케팅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기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만 한국 문화예술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되고 나면 후회와 공허함만 부유한다. 허옇게 포토샵을 한 얼굴을 한 정치인들의 표제를 볼 때마다 떨쳐내기 힘든, 그 경험적 후회와 공허함과 똑 같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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