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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간호사

리처드 프린스, Emergency Nurse, 2004, 캔버스에 잉크젯, 아크릴릭, 152.4×116.8㎝ ⓒ리처드 프린스


예술가들이 즐겨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다.” 해결책 없는 문제제기나 질문은 염증을 일으키지만, 탁월한 질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참여하지도 않은 전시에 참여했다는 거짓말을 한 뒤 ‘거짓말이 나의 출품작이었다’고 한다거나,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사진을 재촬영하여 제작한 ‘새로운 초상화’ 시리즈를 완판시키며 예술의 창작과 모방, 복제 논란에 또다시 불을 붙였던 리처드 프린스는 늘 광적으로 이것저것을 수집하고 들여다본다. 그는 전유와 도용, 모방으로 미국의 대중문화와 유머를 미술 안에 끌고 들어와 일상의 맥락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질문을 던지는 데 능숙하다.


그는 사스로 인해 전 세계가 히스테리의 최정점에 도달한 2002년 당시, 우리 모두가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로맨스 소설 표지를 뒤적이며 간호사 관련 삽화를 찾아 작업한 뒤 간호사 그림 연작을 발표했다. 눈 밑부터 턱을 크게 감싸는 흰색 마스크를 쓴 간호사들은 특정 개인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 익명의 얼굴은 하나의 개인을 넘어 더 큰 아이디어로 나아가는 아이콘이 되어 화면을 채운다. 태양이 저무는 듯 노을이 드리워진 어둑한 대기를 가르는 그의 몸짓은 어딘가 조급하다. 1950~1960년대 간호사의 전형적인 흰색 유니폼에 푸른 재킷을 걸치고 진료가방을 든 그의 상체가 살짝 앞으로 쏠린 때문인가. 긴장감이 감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간호사의 모습에서 공포와 위로를 동시에 목격하는 지금 우리의 상태는 2002년의 우리와 다를 바 없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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