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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민주주의의 위선

알리 바니사드르, 민주주의의 위선, 2012, 리넨에 오일, 76.2×91.44㎝ ⓒAli Banisadr


이란에서 태어난 화가 알리 바니사드르에게 ‘소리’는 작업을 풀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다. 탁월한 공감각 능력을 타고난 그는 소리가 전해주는 이미지를 그 영감과 연동하는 붓질로 화면에 펼친다. 구상과 추상의 결을 오가며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는 작가는 우리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성찰, 언어 사이로 빠져나가는 사유를 포착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자신의 공감각적 재능을 알아차린 건, 그의 어린 시절을 온통 지배했던 전쟁의 소리 덕분이다. 그의 가족은 이란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리 잡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의 포화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일상을 지배하는 전쟁 소리를 피할 수 없었던 그의 내면엔 파괴의 소리가 각성시키는 이미지가 차올랐다. 전쟁의 혼돈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업은 페르시아 역사를 아우르고, 동시대 전 지구적인 사회문제를 가로지른다. 그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촉발한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향한다. 합리와 모순이 얽혀 있어 늘 판단과 선택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오늘의 혼돈에 찬 공기가 그의 화면을 채운다.


하늘빛은 제법 푸르고 공기도 청명해 보이는 하늘 아래 바람에 팔랑거리는 낙엽처럼 흔들리는 형상들이 엉켜 있다. 깃발인지, 화살촉인지, 총알인지 알 수 없는 물체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사이, 절벽을 잇는 가느다란 사다리 옆에 선 두 사람은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땅 위의 울긋불긋한 형상들은 분주함을 과시하듯 어지럽다. 그 덕분에 대지의 공기는 제법 흔들리지만, 그들의 기운이 하늘까지 닿지는 못했는지, 하늘은 그저 잠잠하다. 작가는 바람 소리 가득한 이 작품을 ‘민주주의의 위선’이라고 불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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