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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그곳에 아무도 없다

맥박보다 느리게 뚜벅뚜벅 걷는 검은 자의 걸음은 숲을 지나 철문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울렁이는 소리에 둘러싸여 건물을 맴돈다. 이 오래된 곳에는 먼지가 화석처럼 붙어 있고, 부스러지는 벽 사이로는 풀이 자란다.


하루에 1만5000t의 하수를 처리하는 장소가 되기 위해 2만9041㎡의 땅 위에 1997년 등장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2년째 버려진 이곳은 ‘성남시 구미동 하수종말처리장’이라는 이름의 폐허다.


용인시 수지의 하수를 처리해주기로 한 이곳의 용도가 성남시 구미동의 지역 공동체는 불쾌했다. 남의 동네 하수를 처리하는데 악취마저 심했다. 시험가동을 마친 뒤 ‘혐오시설’은 문을 닫았다. 


박지혜, 그곳에 아무도 없다, 2019, 싱글채널비디오, 23분25초.


10년 후, 하수종말처리장이 되지 못한 이곳은 특수목적고등학교가 되고자 했다. 사람들은 반대했고, 다시 10년이 흘렀다. 소유권으로 갈등하고 쓸모로 다투는 사이 숲은 더 울창해졌고, 건물은 더 낡았다. 이제 이곳은 문화예술공간이 되고 싶다.


매년 몇억원의 유지비를 폐허에 쏟아부을지언정, 우리의 이해관계를 담을 수 없다면, 차라리 방치되는 편이 낫다. 지역 공동체는 이곳에서 문화예술관광 복합시설과 미술관을 만나기 위해 ‘도시미관을 해치는 흉물’을 견디며 20년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기존 청소년수련관에서 탈피, e스포츠 대회까지 열 수 있는 미래비전”을 가진 활용방안을 원하는 이 ‘합리적 공동체’는 그 숙원을 위해 “어떠한 행동도 불사”하고 싶다.


박지혜는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계절이 지나도록 꾸준히 이곳을 들렀다. 잘려나간 파이프, 벗겨진 페인트, 낙엽, 들풀 사이에서 ‘합리적 공동체’가 숨기고 드러내는 심리적 풍경을 발견한 그는, 공간의 감정을 화면에 담았다. 서로 다른 마음들은 뒤엉킨 채, 아직은 아무도 있을 수 없도록 이 공간을 붙잡았고, 기억하는 것과 지워진 것이 뒤섞인 이곳은 먼지가 쌓이고 풀이 자라는 또 한번의 10년을 예고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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