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매퀸, 애시, 2002~2015, 투채널 비디오, 포스터, 20분31초 @스티브 매퀸
늘 당연하게 흘러갈 것이라 믿고 몸을 맡기는 일상은, 문득 당연한 듯 믿음을 배반한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생이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기대를 빗나가는 삶을 납득하기 위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배신의 가능성을 품은 일상은 다른 이야기를 숨긴 채 표표히 지나간다.
2002년 스티브 매퀸은 카리브해 그레나다에서 비디오 작품 ‘카리브 리프’를 촬영했다. 1651년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우던 카리브인들이 ‘카리브 리프’라고 불리는 소튜 마을 절벽에서 몸을 던졌던 역사와 이곳의 현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10여년이 흐른 뒤 다시 그 지역을 찾은 매퀸은 당시 촬영을 위해 섭외했던 청년 애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작업에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필름에 담은 지 두 달 뒤, 애시가 마약 문제에 연루되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는 청년의 짧은 생을 애도하며 10여년간 묻어두었던 장면을 꺼내 ‘애시’를 제작했다.
공중에 매단 스크린 양쪽으로 서로 다른 영상을 보여주는 이 작업의 한쪽 화면에서는 건강미 넘치는 젊은이가 바다 위 보트 끝에 앉아 미소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장면이 흘러나온다.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와 녹색 섬, 싱그러운 청년의 미소로 가득한 이 영상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홈비디오 카메라로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리운 공기와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관객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동료들의 음성과 함께 애시의 묘비명을 새기고 무덤을 조성하는 지난한 과정을 대면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삶과 죽음의 장면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단면을 담담하게 풀어놓으며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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