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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시계를 의식하는 일

크리스찬 마클레이, 시계, 2010, 비디오 설치, 24시간 상영


“우주는 신성한 존재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시계와 비슷하다.” 르네상스 시대 천문학자이자 점성학자였던 케플러는 우주의 질서에서 시계의 시스템을 보았다. 이 시기, 시계태엽 장치와도 같은 우주에서 신은 뛰어난 시계공이 아니겠느냐는 발언도 등장했다. 해시계, 물시계처럼 기존에 시간을 알려주던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계 시계의 등장은 유럽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산업을 견인하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과학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기계 시계가 내는 소음은 사람들이 시간을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계산하고 계량화하기 시작했다.

 

보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바탕에 두고 작업을 풀어온 크리스찬 마클레이는 인류 문명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합리성의 개념을 개인에게 탑재하는 데 일조한 시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멜로, 액션, 스릴러, 공상과학 영화 및 유럽 예술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5000여편의 영화 중 시계 또는 시간을 언급하는 대화가 등장하는 클립과 컷을 찾아 24시간을 연결했다.

 

작품 ‘시계’는 실제 24시간 동안 상영하며, 장면이 지시하는 시각과 실제 관객이 만나는 시각이 일치하여 흐른다. 극장에 앉아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서로 다른 서사 구조에서 역할을 수행하던 장면이 ‘시계’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맥락에 놓이면서 또 다른 흐름을 형성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간을 편집하여 서사를 구축하는 영화가 예술가 시계공의 손을 거쳐 새로운 시계태엽 장치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동참하는 이들은 새로운 시계가 지시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를 둘러싼 물리적 시간의 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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