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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꽃그림에 관한 단상


앙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 ‘벽감 속의 꽃정물화’, 1620년경


 


나이가 들면 그림 보는 취향이 달라진다. 예전엔 시선이 가지 않던 소재들이 새삼 좋아진다. 그 중 하나가 꽃그림이다. 자기 안의 꽃이 사라지기 때문인 걸까. 꽃그림은 소위 예술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회피하는 장르다. 그래서인지 꽃그림이 미술사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아주 늦다. 17세기 네덜란드에 와서야 비로소 주인공이 되는데, 그전까지 초상화나 성서필사본 말미에 부수적으로 그려졌을 뿐이다. 정물화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도 18세기 네덜란드 미술사학자 후브라켄에 의해서였다. 


꽃을 그리는 이유는 아름답고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형태 때문만은 아니다. 단언하건대 꽃은 시들기 때문에 그리는 거다. 시드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리고, 그림으로나마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갖고 싶어서 그리는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 정물화가들은 시든 꽃과 벌레먹은 과일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 피에로 보나르 역시 시든 꽃을 그렸다. 정원에서 스스로 가꾼 꽃을 그렸던 보나르는 가정부가 정원의 꽃을 꺾어두면 그림을 곧바로 그리지 않고 기다렸다. 꽃이 시들기를 기다렸던 것인데, 그래야 존재감이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많은 화가들이 꽃을 그렸지만, 그것은 단순히 꽃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정물화는 바니타스(vanitas·허무)를 의미하고, 샤르댕이 그린 정물은 한 편의 서정시였으며, 반 고흐의 꽃은 내면의 강렬한 표출이었고, 세잔의 꽃은 조형에 대한 탐구 자체였다. 그들은 모두 꽃이 자기에게 의미하는 바를 그렸다. 


꽃이 유혹하는 계절이 왔다. 꽃은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기다림일 것이다. 초여름밤 달빛 아래 탐스러운 수국 볼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