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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노동자의 가면

모나미 볼펜을 손에 들고 서류를 검토하거나 자를 대고 표를 그리는 모습이 생경하다. 책상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컴퓨터가 없는 사무실의 모습은 어색하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직원들이 가면을 쓰고 일하는 모습이다. 넥타이를 맨 양복차림에 가면을 쓰고, ‘요구관철’ 구호가 적힌 머리띠까지 한 모습은 이상하다 못해 괴기스럽다.

 

1971년 가면을 쓰고 감원반대 시위를 하는 한국전력 노조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배격한다! 우리는 횡포 기업주를.” 1971년 한국전력 노조원들이 내건 노동운동 슬로건이었다. 이른바 ‘관료자본주의시대’로 일컬어졌던 박정희 시대에는 기업주들이 관을 등에 업고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횡포를 자행했다. 근로기준법이 존재하면서도 노동자들이 무단해고, 불법 연장노동, 임금체불 등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권력은 ‘경제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의 불법행위를 암묵적으로 눈감아주었다.

 

그랬던 1970년대 시절의 노동운동 중에서 특이한 장면은 파업의 일환으로 가면을 쓰고 태업하는 모습이다. 비록 태업이지만 양복 차림으로 기어이 출근해 일하는 모습은 당시 노동자들의 서글픈 현실 같다. 그러나 더 서글픈 것은, 5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면을 쓰고 광장에 모여 기업주의 횡포에 저항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처지이다. 한편, 30명의 해고 노동자가 목숨을 잃어도 복직이 되지 않는 냉혹한 노동 현실은 그야말로 괴기스럽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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