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서쪽 끝단의 대명항을 돌아보고 차를 돌린다. 진입로를 빠져나와 4거리에 이르니 왼쪽으로 덕포진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좁은 도로를 따라 2㎞ 남짓. 덕포진의 너른 주차장이 나를 기다린다. 주차를 하고 나지막한 언덕길을 오른다. 올라서니 솔밭 사이로 염하강과 그 너머 강화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잔디밭 사이로 포대가 줄지어 있다. 앞쪽에 놓인 포대가 ‘가’ 포대이고 우측 언덕 너머로 ‘나’, ‘다’ 포대가 이어져 총 15개의 포가 설치되었다 한다. 덕포진은 강 건너 강화의 덕진진과 함께 구한말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때 이 사이를 지나던 프랑스와 미국 함대를 향해 맹포격하였던 격전의 현장이다. 언덕에서 바라보면 멋진 풍광이지만 외세에 대항하여 목숨바쳐 싸웠던 선조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언덕길을 따라 포대가 끝나는 지점에 잘 다듬어진 묘 하나가 눈에 띈다. 손돌묘이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고종은 강화도로 피란하게 된다. 왕은 바다를 건널 배가 없자 손돌의 작은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물길이 좁고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그의 목을 치라고 명령한다. 손돌은 이 지역이 물길이 험해서 그런 것이라 해명하였지만 왕은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 말하고 죽게 된다. 신하들은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바가지를 따라가니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였다. 경솔했던 왕은 크게 뉘우치고 손돌의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한 뒤 사당을 지어 억울하게 죽은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 한다. 이후로 그의 기일인 매년 음력 10월20일에 진혼제가 올려지고 현재는 김포시에서 그 전통을 잇고 있다. 또한 그의 기일 즈음에는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이는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이 바람으로 변하여 ‘손돌바람’이라 불린다고 한다.
차를 움직여 덕포진을 나서는데 입구에 ‘덕포진교육박물관’이 또 발길을 막아선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사고 탓에 시력을 잃은 아내를 위해 같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이 오랫동안 수집해 온 자료들을 모아 3층짜리 건물에 마련한 박물관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옛날 학교의 모습과 교육사료들, 심지어 농경시설까지 3층 공간 구석구석 방대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0년대 풍의 교실에 놓인 오래된 풍금 앞의 장인어른은 자리를 뜨실 생각이 없다. 교육자였던 어른은 빛바랜 음악책에서 찾은 동요 ‘꽃밭에서’를 연주하며 학생들을 가르치시던 그 시절로 돌아가 계셨다.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