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시청 앞 사거리에서 파주로 이어지는 서쪽도로로 조금만 가면 우측으로 누각이 있는 커다란 한옥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외삼문으로 불리는 이 대문 좌우에 낮은 담장이 크게 둘러져 있고 그 뒤로 여러 채의 한옥 건물들이 군집되어 있다. 지난 4월 복원을 마치고 일반에 개방된 양주관아이다.
양주관아는 조선 중종 때인 1506년 현재의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의정부에 있는 양주군청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417년간 경기도 제1의 도시이자 경제,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던 양주목을 관할하던 곳이다.
양주는 수도 한양을 방위하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조선시대 지방행정단위인 목, 부, 군, 현 중에 가장 큰 목으로 지정되었다. 고려 태조 때 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인 한양군을 양주로 개칭한 데서 유래하여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수도 한양을 제외한 한양의 동북부 대부분 지역이 양주목의 행정구역이었다.
양주목은 현재로 말하면 양주시를 비롯하여 남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구리시와 서울의 광진구,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최대의 행정구역을 갖고 있었다. 그 넓은 행정구역을 관할했던 양주관아는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발굴과 복원사업 끝에 지난 4월 양주목사의 정무공간인 외아(外衙)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내아(內衙) 등 9개 시설이 복원되었다. 9개 시설의 규모만 해도 현재 정도이니 기록에 남아 있는 31개 시설의 규모를 생각하면 양주목사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졌을지 짐작해 본다.
현재 비어 있는 외삼문 2층 누각에는 큰 북이 놓여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북을 두드려 아침저녁의 시간을 알렸다 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다시 단층의 내삼문이 기다리고 있다. 이 내삼문 안쪽에는 목사가 집무하던 동헌인 매학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집무공간은 관사인 내아의 동쪽에 있다 하여 일반적으로 동헌(東軒)으로 불렸다.
동헌 앞 너른 마당에는 죄인에게 주리를 틀던 의자와 곤장대, 그리고 곤장을 치는 포졸 인형이 있어 그 모습을 보니 사극에서 보던 형벌 장면이 떠오른다. 동헌 좌우에는 관아에 필요한 보조기능의 동행각, 서행각이 있고 서편의 담장 너머에는 목사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내아가 부속건물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뒤편의 불곡산 자락이 겹겹이 쌓여 있는 한옥의 관아 건물들과 어우러져 멋진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